•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4)<삼국도>의 작성과 비보사상

4)<삼국도>의 작성과 비보사상

 도선이 내세운 풍수지리설의 중심 사상은 裨補에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런 만큼 풍수지리설에서 비보사상은 중요하다. 왕건이 자손에게 내린 訓要 10조에서 “諸 사원은 모두 도선이 점쳐서 추정한 산수의 順逆에 따라 개창하라.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외에 망령되이 창건한 즉, 地德을 손실시키고 박하게 하여 祖業이 길지 못하다’고 했으니, 짐은 후세의 국왕·공작이나 侯爵·後妃·朝臣들이 각각 원당이라 칭하면서 더욱 창건하여 간다면 크게 우려할 바라 생각한다”475)≪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라고 하였다. 곧 도선은 전국에 비보사찰을 점쳐서 정해 둔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은 산수의 순역에 따라 어디어디 산수는 순하고 어디어디 산수는 역하니까, 사찰은 어느 곳에 세우라고 추정해 둔 것인 만큼, 이미 산수의 순역에 의해 전국토의 형세가 정해져 있었음이 틀림없다.

 산천의 순역 형태를 토대로 비보사상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도선이<三國圖>를 그리고 있음은 중요하게 생각된다. 이러한<삼국도>의 작성이 바로 국토의 재구성안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산수의 형세에 따라 삼한의 명당을 설정하여 그 곳을 중심으로 작성한 삼한의 지도이다. 그런데 나말의 풍수지리설이 모두<삼국도>를 작성할 수 있을 정도의 국토 재구성안으로 성립된 것 같지는 않다. 그 중에는 어느 지역의 산수를 살피는데 그친 것도 있고, 또한 상당한 규모의 지역을 재편하는 성격을 가진 것도 있었다.476)金杜珍, 앞의 글(1988), 46∼47쪽.

 다만<삼국도>를 작성할 정도인 곧, 국토 재구성안의 성격을 띤 풍수지리설은 그렇게 많이 형성되어 있지는 못했다. 이런 종류의 풍수지리설을 수용할 수 있는 지방호족 세력은 지금의 郡單位 정도의 지역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후삼국의 세력판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호족이었음이 분명하다. 전국 규모로써 거의 완전할 정도로 작성된 국토 재구성안이 바로 도선의 풍수지리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 다음 단계의 비보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풍수지리설에서 일단 陽基로 결정되어 도읍이나 궁실 등의 터로 되어 버리면, 그것은 옮겨가기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속성을 지녀서, 결국 비보사상이 등장하게 될 소지를 가졌다. 비보사상은<삼국도>로 작성된 전국토의 운영 원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며, 과감한 변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비보에 대해서는 “고려가 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바꾸지 않고 이끌면서 가만히 도움을 받는 자본으로 삼아, 이에 안팎으로 사원을 많이 설치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77)徐居正,≪東文選≫권 70, 演福寺塔重創記. ‘바꾸지 않고 이끔’은 일단 양기로 정해져서 바꾸기 어렵게 된 국토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면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후삼국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가는 고려의 통일정책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갑작스레 바꾸지 않고 가만히 도움을 받는 자본으로서의 비보는 멀리는 고려의 친신라적 정책과 연관될 수 있다. 후삼국의 동란을 조장하는 세력은 弓裔와 성격을 같이 하는 반신라적 인물들로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왕건은 친신라적 정책을 표명함으로써 통일 이후의 국가질서 회복에 노력하였다. 한편 그것은 현실적으로 왕건의 호족연합책과 표리를 이루었다. 왕건이 기존의 지방호족 세력을 해체시키지 않고 통일된 고려국가를 이룩하였을 경우,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아울러 이미 귀족으로 인정된 호족들을 통어할 필요를 느꼈다. 여기에 도선의 비보사상이 왕건의 호족연합책과 제휴될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478)金杜珍, 앞의 글(1988), 45∼47쪽.

 물론 도선이 비보사상을 내세우면서 처음 작성된<삼국도>에서 명당으로 규정한 국토의 중심부는 송악으로 설정되지 않았을 수 있다. 다만 전국 규모의<삼국도>를 작성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반드시 대호족이거나 아니면 후삼국 지배자의 후원을 받았을 법하다. 그런 면에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애초에 왕건보다는 견훤과 연결되어, 그에게 통일이념을 제공한 것으로 봄이 오히려 무리가 없어 보인다. 사실 도선이 활동한 지역은 후백제의 영역 내에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토의 중심인 명당을 송악으로 대치하기만 하면, 그것은 왕건이 삼한을 통합하는 데 충분히 이념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통일 고려왕조와 밀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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