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2) 왕건의 즉위와 후삼국의 통일
  • (2) 왕건 즉위 초 호족의 동향

(2) 왕건 즉위 초 호족의 동향

궁예를 축출하고 高麗의 태조로 즉위한 王建 또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왕건이 즉위한 지 5일째 되던 날 혁명 내부세력 가운데 왕건의 왕위를 넘보고 왕권에 도전한 반혁명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뒤 궁예의 정치적 지지 기반이었던 청주지역 호족세력들이 모반을 꾀하여 왕건에 저항하였으며, 일찍이 궁예의 세력 기반이 되었던 溟州지역 대호족인 順式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많은 호족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이는 태조 원년(918) 8월 己酉에 왕건의 즉위를 빌미로 각 지역의 도적들이 변방에서 정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조정에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우의를 다질 것을 신하들에게 당부한 사실032)≪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8월 기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려왕조를 창업하고 왕건이 즉위하는데 공이 있었던 桓宣吉은 馬軍將軍으로서 정예군을 통솔하면서 궁궐을 숙위하고 있었다. 처음에 환선길은 그의 아우 香寔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갖고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은밀히 병사들과 결탁하여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마군장군으로 개국공신의 한사람인 卜智謙이 미리 알고 태조에게 보고했으나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 하에서 태조는 이를 믿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던 중 태조가 學士 몇 사람과 궁전에서 국정을 의논하고 있는 자리에 환선길이 그의 도당 50여 명과 함께 병기를 가지고 습격하여 왔다. 이 때 태조는 태연하게 일어나 큰 목소리로 꾸짖었다.

朕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이 자리에 올랐으나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天命이 이미 정해졌는데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桓宣吉).

이에 환선길은 태조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복병이 있는 것으로 알고 도망을 치다 호위군사들에 의해 추격당한 끝에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033)≪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桓宣吉.

또 이 사건이 일어난 후 9일째 되던 날 궁예에 의해 마군대장군에 임명되어 熊州(公州)를 공격하여 장악하고 있었던 伊昕巖이 반역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처단되었다.034)≪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경신. 그런데 이 사건은 이흔암의 처가 환씨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앞서 일어난 환선길의 반역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진다.

왕건이 즉위한 지 보름도 되기 전에 발생된 두 반역사건은 궁예의 정치세력들에 의한 反王建의 성격을 지닌 사건임에 틀림없다. 결국 웅주 지역과 관계된 두 모반사건으로 인해 2개월 뒤인 그해 8월에 熊州·運州(洪城) 등 10여 주현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자발적으로 귀부하였던 것이다.035)≪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8월 계해.

이렇듯 왕건이 즉위한 이후에 궁예를 지지했던 각 지역의 호족세력들이 동요하고 있었는데, 특히 후백제 영역과 근접한 지역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그해 9월에 徇軍吏 林春吉이 그의 출신지인 청주인과 결탁하여 반역을 도모한 사실이나 10월에 靑州帥 파진찬 陳瑄이 그의 아우 宣長과 함께 반란을 도모한 데서 잘 드러난다.

靑州(淸州)는 본래 백제의 上黨縣으로 娘臂城 또는 娘子谷이라 불리던 곳으로 군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 삼국 간에 상호 치열한 공방전 속에 영역을 달리 했던 곳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새로이 마련한 9州·5小京制 하에서 5소경 중의 하나인 西原小京으로서 정치와 지방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어 후삼국시대에는 효공왕 4년(900)에 왕건이 광주·충주 등지를 평정할 때 이 곳 지방세력가들인 淸吉·莘萱 등이 國原(충주)·청주·괴양 등을 들어 궁예에게 자발적으로 귀부함으로써 고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던 곳이다.036)≪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孝恭王 4년 동10월.

그런데 궁예는 국호를 摩震으로 고치고 자신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 해(효공왕 8년) 7월에 청주인 1,000戶를 철원에 이주시켜 새로운 세력 기반을 구축하려 하였다. 이는 청주의 호족세력들이 대개 몰락한 신라의 진골귀족 계열로서 신라왕실로부터 버림받은 궁예와 쉽게 결합할 수 있는 반면에, 고구려의 부흥에 동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고구려 부흥세력의 구심체인 왕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하여 청주세력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양성함으로써 고구려 부흥세력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듯 청주세력은 궁예정권의 지지 세력으로 성장해 나갔었다.037)崔圭成,<弓裔政權의 支持勢力>(≪東國史學≫19·20, 1986).
鄭淸柱,<弓裔와 豪族勢力>(≪全北史學≫10, 1986).
申虎澈,<新羅末 高麗初 昧谷城(懷仁) 將軍 龔直>(≪湖西文化硏究≫10, 忠北大 湖西文化硏究所, 1992) 등에 보면 金甲童의 앞의 책, 41∼42쪽의 인용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金甲童은 궁예가 청주를 차지한 후 청주인 1,000호를 鐵原으로 사민시키고 다음해에는 도읍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한 것에 주목하여 이 지역이 궁예의 지지 기반이 되었음에 의문을 표하였다. 즉 徙民政策은 강제적으로 실시되었고, 이는 청주를 완전히 지배하여 후백제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집단인질적인 조치였으며 청주인들이 궁예의 지배 하에 있었어도 마음속으로는 불만을 가졌을 것이며 이 점은 궁예의 휘하에서 당시 청주를 정복한 왕건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궁예나 왕건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반정부세력과 한편으로 궁예정부에 협조하여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여 정치적 지위를 누린 무리로 대별할 수 있고 고려 건국 후 이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변란이 일어날 소지가 있었다고 하였다(金甲童, 위의 책, 29∼43쪽 참조).

그런데 청주의 호족세력은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즉위하자 이해관계에 따라 심한 내분을 겪으면서 왕건에게 협조한 文植·明吉·金勤謙·寬駿·金言規 등의 세력과 能達·堅金 등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태조 왕건은 즉위하면서 그에게 저항하는 청주인을 회유하고 청주인들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 명길·문식·능달 등을 청주에 보내어 동태를 살피고 오게 하였다. 이에 능달은 청주인들이 딴 마음이 없다고 보고하여 청주의 領軍將軍으로 있었던 견금 등의 재지세력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고, 문식과 명길은 청주인들이 모반의 뜻이 있음을 上京從仕하고 있었던 청주인 金勤謙·寬駿·金言規에게 말하면서부터 두 세력은 서로 상대방을 모함하고 대립하게 되었다. 그래서 왕건은 그들이 서로 모함하는 것을 용서하고 회유·무마하는 한편 마군장군 洪儒·庾黔弼 등으로 하여금 1,500명의 병사를 鎭州에 보내어 변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038)≪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堅金.

이러한 가운데 태조 원년 9월에 중앙에서 청주인 순군리 임춘길이 동향인 裵規, 季川人 康吉·阿次, 昧谷人 景琮 등과 모반하여 청주로 돌아가려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卜智謙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홍유·유금필의 군대가 중앙으로 철수하였고, 이어 임춘길·경종 등의 誅殺에 대한 여파로 청주의 민심이 동요되는 상황에서 10월에 청주의 在地豪族 세력으로 보여지는 靑州帥 파진찬 진선이 그의 아우 선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청주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道安郡에서 “청주가 비밀리에 백제와 내통하여 장차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왕건은 마군장군 능식에게 군대를 파견하여 鎭撫하게 하였다. 이렇게 일련의 모반 사건이 발생하자 태조는 즉위 6개월 뒤인 태조2년(919) 정월에 서울을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이와 같이 왕건이 즉위한 후에 궁예가 정치적 세력 기반으로 삼았던 청주나 궁예의 지지 세력이었던 공주지역 호족들은 반역을 도모하거나 지리적으로 인접한 후백제와 내통 또는 귀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궁예가 진성여왕 8년(894)에 梁吉로부터 벗어나 장군으로 추대되어 처음으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데 중요한 군사적 지지 기반이 되었던 명주 지역의 대호족 順式도 왕건에 대해 불복하고 있었다.039)≪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일찍이 진성여왕 8년 궁예는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명주 지역으로 들어가 이 지역 지방세력의 협조 하에 3,500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때 궁예는 3,500명의 군사를 14隊로 나누어 편성하고 部長을 두어 각 대를 통솔하도록 하였는데 이 군사력이 바로 궁예의 강력한 세력 기반이 되어 嶺西 지역의 猪足(麟蹄)·犭生川(華川)·夫若(金化)·금성·철원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고 세력을 사방에 떨치면서 진성여왕 9년에 내외 관직을 설치하여 국가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040)≪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

그런데 이처럼 궁예의 세력 확대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명주에는 신라에서 임명된 知溟州軍州事 순식 계열과 토착세력으로 군사적·실력자인 (王)乂 계열이 지배세력으로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라 진골 출신들로서 왕예는 본래 姓이 金氏로 宣德王의 후계자 다툼에서 金敬信에게 왕위를 빼앗긴 金周元의 6세손이다.

앞서 김주원은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하고 명주로 가 살았는데 元聖王으로부터 溟州郡王에 봉해지고 명주는 물론이고 翼嶺(襄陽)·三陟·斤乙於(平海)·蔚珍 등지를 食邑으로 받았다. 그리하여 金周元은 신라왕실과 동등한 자격의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의 후손들 중 憲昌-梵文 계열은 金憲昌과 梵文의 난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그밖에 대부분이 건재하였다. 특히 東靖-英吉-善希-乂 계열은 명주의 토착세력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왕)예는 군사적 실력자인 都令의 지위를 가진 지방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041)金甲童, 앞의 책 참조.

또한 순식도 진골 출신으로 신라 말기에 명주에 내려와 지명주군주사로서 이 지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렇게 명주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세력이 모두 신라 진골출신이었고 궁예 자신이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이 지역과 연고가 있는 世達寺에서 승려 생활을 한 사실은 이 지역 세력가들과 궁예와의 연결 가능성을 말해 줄 뿐 아니라 그 뒤 궁예세력과 연합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요컨대 명주세력은 일찍부터 궁예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궁예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데 지지기반이 되었고 그 뒤 국가를 세우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런데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 명주세력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오랫 동안 불복하여 왕건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는 태조 19년(936) 후백제 神劍과의 一利川 전투에 동원된 고려의 총병력 87,500명 중 순식 휘하의 군사력이 馬軍 2만이었던 점042)≪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9년 9월 갑오.으로 미루어 명주세력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태조 왕건은 건국 초에 궁예를 지지하고 있었던 각 지역 호족들의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게 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정세를 관망하고 있던 호족세력들이 후백제로 기울어짐에 따라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어 갔다. 이에 왕건은 적극적으로 호족 포섭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은 즉위한 다음날인 6월 정사일에 군신들에게 조서를 통해 자신이 왕위에 나간 것이 여러 호족들의 추대에 의한 것임을 밝혀 호족들과의 친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같은 달 무오일에 궁예에게 억울하게 피해를 본 청주 출신인 尹全·愛堅 등 80여 명의 군인들을 석방하는 등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앞서 본 바와 같이 마군장군 桓宣吉과 伊昕巖의 역모사건으로 정치적인 동요가 일자 8월 기유일에는 신하들에게 “각 지방의 도적들이 짐이 처음 즉위함을 듣고 혹시 변방의 화를 도모할까 염려된다”고 하는「單使」를 각지의 호족들에게 파견하여 ‘幣帛을 후히 하고 言辭를 낮추어서 惠和의 뜻을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호족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적극적인 대호족 포섭정책의 실행은 많은 호족들이 귀부해 오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달 8월 경술일에 궁예의 고려 건국에 호응하였다가 궁예의 배신과 실정으로 인해 궁예로부터 도망했던 鶻巖城의 尹瑄이 귀부해 왔고 또 9월 갑오일에 尙州의 賊帥 阿字盖가 사신을 보내어 내부하였다.043)≪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8월 기유·9월 갑오. 이때 태조는 예의를 갖추어 사절을 영접하였다.

한편 태조3년(920) 봄에는 강주(진주) 장군 閏雄이 그의 아들 一康을 인질로 보내면서 내부하였다. 이 때 태조는 일강에게 阿粲의 품계를 주고 卿의 지위에 있는 行訓의 누이와 혼인하게 하였으며 郎中 春讓을 강주에 파견하여 귀부를 위로하였다.044)≪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3년 정월. 이 지역은 일찍이 해상 교통의 요지로서 王逢規의 세력이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역활동을 전개하면서 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세력을 떨치던 곳으로, 나주 지역과 더불어 왕건에게 있어서는 해상 활동을 통해서 남해 일대의 견훤세력을 제압하고 후백제의 배후를 치는데 주요한 거점이었다.

그리고 태조 5년 6월 정사일에는 下枝縣(安東부근)의 장군 元奉(元逢)이 투항하여 왔다.045)≪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5년 6월 정사. 이에 태조는 다음해 봄3월 원봉에게 元尹을 제수하였고, 또 하지현을 順州로 승격시켰다. 더욱이 태조 5년 7월 무술일에는 오랫 동안 굴복하지 않아 왕건을 초조하게 만들었던 명주의 대호족 순식이 長子 守元을 보내 귀부하여 왔다.046)≪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5년 7월 무술.

왕건은 순식을 포섭하기 위해 侍郎 權說의 건의에 따라 당시 內院의 승려로 머물고 있었던 순식의 父인 許越을 명주에 파견해서 설득시킴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태조 5년에 순식은 수원을 통해 귀부 의사를 먼저 밝히고 태조 10년에는 그의 아들 長命에게 군사 600인을 주어 왕건의 숙위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이어 이듬해 봄 정월에 순식이 자제와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직접 親朝하였다. 이 때 왕건은 순식에게 王氏姓을 하사하고 大匡을 수여하였다. 그리고 순식의 아들 장명에게는 廉이라는 이름을 주고 그의 小將 官景에게도 王姓을 하사하고 大丞을 수여하였다.047)≪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그런데 왕건이 명주 지역의 호족세력에게 왕성을 하사한 것은 혈족과 같은 유대관계를 유지하여 이탈을 방지하고자 한 방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순식에게 수여된 대광은 그 당시 생존한 인물에게 준 최고의 관계였고 태조대에 대광의 관계를 수여한 예가 在京勢力 중에는 몇몇 있으나 지방세력 중에서는 순식 혼자 뿐인 사실을 통해 왕건이 순식을 포섭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는 一利川 전투에 동원된 순식의 2만 병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순식의 세력이 왕건에게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그리고 당시 순식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명주의 대호족 순식의 귀부는 태조 왕건의 대호족 포섭정책에 있어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태조 5년 11월 신사일에는 眞寶城主 洪術이 사신을 보내와 귀부하였다. 그 다음해 3월 신축일에 命旨城 장군 城達이 그의 아우 伊達·端林과 함께 내부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임신일에 碧珍郡(星州)장군 良文이 조카인 圭奐을 보내어 귀부해 왔다.048)≪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5년 11월 신사·6년 3월 신축·8월 임신.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안으로 적극적인 호족 포섭책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태조 7년 견훤의 선제공격으로 曹物郡에서 전투가 개시되면서 고려와 후백제와의 평화 공존은 깨어지기 시작하였다.049)≪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7년 7월.

그리하여 왕건은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親新羅政策을 추진하여 신라 판도 내의 지방세력들에게 신임을 얻고 협조를 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면서 신라왕실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실제로 왕건은 궁예가 신라를 적대시 하던 방식을 버리고 즉위 초부터 신라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태조 3년 정월에 신라가 처음으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 친선관계를 맺었다.050)≪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3년 정월. 그 뒤 같은 해 10월에 견훤이 신라의 大良(陝川)·仇史(慶山?)의 2郡을 침공하였을 때 신라의 요청으로 왕건이 원병을 보내어 견훤의 군대를 물러나게 한 사실051)≪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3년 10월.에서 그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와 신라왕실 간의 관계는 매우 밀착되어 있었는데 양국 간의 우호적인 여건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태조 8년 10월 신라 高鬱府(永川) 장군 能文이 내투하였을 때, 왕건은 그 城이 신라 왕도인 경주와 가깝다 하여 그들을 위로하여 돌려 보낸 사실052)≪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8년 10월 기사.이 있는데 이것은 신라에 대한 관계를 고려해 내린 조치였던 것이다. 결국 왕건의 친신라정책은 견훤의 신라에 대한 무력정책보다 신라 영역내의 호족세력들을 더 효과적으로 설복시켜 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태조 10년 9월 견훤이 영천을 거쳐 경주를 기습하여 景哀王을 죽인 뒤에 왕의 외사촌아우 金傅를 왕으로 세우고, 금은 보화와 병기 등을 약탈하고 왕비와 궁녀들을 능욕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뒤부터 신라 영역내의 호족들의 움직임은 親王建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태조 13년 1월 정묘일에는 載巖城 장군 善弼이 귀순하였다. 같은 달 병술일에는 왕건은 古昌의 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은 고창의 石山에 주둔하여 서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을 때 이 지역 호족인 金宣平·權幸·張吉 등이 왕건에게 가담함으로써 견훤을 대패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또 이 때 永安·河曲·直明·松生 등 후백제 측의 30여 군현이 고려에 항복해 왔다.053)≪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3년 정월 정묘·병술·경인. 이렇게 견훤의 경주 침입사건과 안동 고창전투를 계기로 신라왕실은 더욱 고려에 의존하였다.

한편 고창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백제에서도 점차 붕괴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후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왕건의 친신라정책과 호족포섭책은 마침내 대세를 고려에 기울게 하였고 후백제 내부의 동요를 가져 오게 하였다. 후백제 昧谷縣의 장군 龔直이 고려로 자진 투항해 왔다.054)≪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5년 6월. 매곡현은 지금의 충북 懷北으로 지리적으로 靑州·報恩·文義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험준한 곳으로써, 태조 원년(918)을 전후로 하여 고려와 후백제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던 중북부의 접경지역이었다.

공직은 바로 이 매곡성의 성주로서 큰 아들 直達과 둘째 아들 金舒 및 딸 하나를 후백제에 볼모로 보내면서 견훤의 심복이 되었다. 공직이 견훤의 심복이 된 데에는 그의 처남 景琮(昧谷人)이 태조 원년 9월에 일어난 청주인 순군사 임춘길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것과도 관계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공직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견훤과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군사세력면에서 우위에 있었던 견훤이 태조 13년 1월에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왕건에게 대패를 당한 이후에 공직이 다시 왕건에게 귀부한 데에서 확인될 수 있는데, 공직이 후백제에 입조하러 가서 인질로 잡혀 있는 맏아들 직달과 부자 사이에 주고 받은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달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나라를 보니 사치하고 무도하여 내가 비록 심복으로 있었지만 다시 이곳에 오지 않겠다. 듣건대 王公(왕건)은 文으로 족히 백성을 안정시키고 武로 능히 暴을 禁하므로 사방에서 그의 위엄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그의 덕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다 하니 나는 그에게 귀부하고자 한다. 너의 뜻은 어떠하냐?”

직달이 대답하기를, “볼모로 여기에 온 이래 그들의 풍속을 보니 부강함만 믿고 서로 다투어 교만하고 내세우기만 힘쓰니 어찌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버님께서 明主에게 귀순하여 弊邑을 보전하고 편안하게 하고자 하시니 의당한 일입니다. 저는 마땅히 아우와 여동생과 함께 틈을 타서 돌아 가겠습니다. 만약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버님의 현명하신 조처에 의해 자손에게 경사가 흐르게 되면 저는 비록 죽어도 한이 없으니 아버님은 염려하지 마십시오.”(≪高麗史≫권 92, 列傳 5, 龔直).

그 뒤 공직은 뜻을 정하고 태조 15년(932) 6월 병인일에 그의 아들 英舒·咸舒와 함께 왕건에게 귀부하였다.055)≪高麗史≫권 92, 列傳 5, 龔直.

이에 왕건은 공직을 大相에 임명하고 白城郡(안성)을 녹읍으로 주었으며 騎馬 3필과 彩帛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함서는 佐尹을 시키고 貴戚인 正朝 俊行의 딸을 영서의 아내로 삼게 해서 우대하였다.

즉 안동 고창전투 이후 영안·하곡·송생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투항하고, 신라 동쪽의 110여 성이 항복하는 등 신라 영역의 많은 호족세력들이 왕건을 지지함은 물론이었다. 중부권에서 조차 왕건에 의해 천안에 도독부가 설치되고 청주에 성이 축조되는 등 고려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반면에 견훤의 세력이 점점 위축되는 상황에서 공직은 치밀한 사전 준비 하에 고려로 귀부하게 된 것이다.056)申虎澈, 앞의 글 참조.

한편 공직이 왕건에게 귀부한 이후 중북부 지역은 고려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공직이 귀부한 다음달인 7월 왕건이 친히 一牟山城을 정벌하였고, 또 태조 17년(934) 9월에는 운주(홍성)를 정벌하여 견훤을 크게 격파시켰다. 이어 후백제의 웅진 이북 30여 성에서 항복을 받았다.057)≪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5년 7월 신묘 및 동 17년 9월 정사. 이렇게 급변한 상황 전개는 마침내 태조 18년 3월 후백제의 붕괴를 촉진하는 내분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후삼국 성립 시기의 각 지역의 호족세력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삼국 간의 세력 판도에 따라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혹은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과 이해 관계에 의해 또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 고려나 후백제 또는 신라 측에 가담하였다. 특히 옛 신라 영역에 해당된 호족세력들은 고려와 후백제의 각축전이 전개되는 동안 견훤의 무력주의 노선을 배척하고 평화주의를 표방한 태조 왕건을 지지함으로써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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