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3) 태조의 여러 시책
  • (1) 대내정책

가. 대호족정책

918년 王建이 궁예를 타도하고 즉위한 후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안정의 달성이었다. 그는 태봉의 수많은 豪族 중 유력한 자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高麗의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를 시기하고 의심하여 협조하지 않은 세력과 그를 질시하고 적대하여 정권을 빼앗으려는 세력이 많아서 전혀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太祖 왕건의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여러 차례의 정권탈취 기도사건이 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태조는 주위의 여러 호족들로부터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호족 포섭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태조의 호족에 대한 정책으로서는 結婚政策·賜姓政策·事審官制度·其人制度가 있다. 그리고 호족들에 대한 유화적인 和合政策을 들 수 있다.

태조는 먼저 호족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동시에 왕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실행하였다. 태조는 무려 29명이나 되는 后妃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많은 후비를 거느리게 된 것은≪高麗史≫后妃列傳을 보면 정략적인 혼인정책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만난 貞州人 三重大匡 柳天弓의 딸인 神惠王后 柳氏와 羅州人 莊和王后 吳氏를 제외한 나머지 후비들의 지역적인 배경과 妃父들의 정치적 지위로 볼 때 보다 분명해진다. 즉 神明順成太后 劉氏는 충주 호족 內史令 劉兢達의 딸이고, 廣州院夫人·小廣州院夫人 王氏는 광주의 호족인 대광 王規의 딸이며, 禮和夫人 王氏는 春州人 대광 王柔의 딸인 점이나, 貞穆夫人 王氏와 大溟州院夫人 王氏는 각기 명주의 호족세력인 王景과 王乂의 딸인 점에서, 왕건이 각 지역의 유력한 세력들과 혼인관계를 통해 유대관계를 강화하고자 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오랫 동안 태조에게 불복했던 명주 지역의 호족세력들에 대해 혼인과 賜姓을 통해 결속을 다지고자 한 점이 태조가 행한 혼인정책의 목적을 보다 확연히 말해 주고 있다.

더욱이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던 昇州 호족 박영규의 딸인 東山院夫人 朴氏와 新羅王 김부의 백부인 億廉의 딸인 神成王太后 金氏와 혼인한 것은 후삼국 통일 후의 통치지배질서 마련을 위한 태조의 통일전략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또한 태조는 고려 건국의 1등 공신 홍유의 딸인 義城府院夫人 洪氏나 平州 호족 太師 三重大匡 朴守卿과 그의 형 朴守文의 딸인 夢良院夫人 朴氏와 月鏡院夫人 朴氏, 그리고 평주인 태사 삼중대광 庾黔弼의 딸인 東陽院夫人 庾氏와 황주인 太尉 三重大匡 皇甫悌恭의 딸인 神靜王后 皇甫氏와의 혼인관계를 통해 지지 기반인 호족들과의 결속력을 더욱 다져 통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태조는 각지의 유력한 호족들이나 세력가의 딸들과 혼인을 통한 유대관계를 강화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서 통일을 위한 군사적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태조 자신이 많은 자손들을 두어 왕가의 기반을 다져 고려 왕실의 번성을 꾀하려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태조는 직계 자손을 제외한 그밖의 친족세력은 미미하였다. 이렇게 수적으로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가문을 위해서 태조는 많은 부인을 통해 자손을 두고자 하였기에 모두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많은 자녀를 둔 태조는 그의 자녀들을 혼인시키는데 있어서 특별하였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安貞淑儀公主와 聖茂夫人 朴氏 소생의 공주가 고려에 항복해 온 신라왕 김부와 혼인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이복 남매끼리 결혼을 하고 있는 점이다. 신라를 들어 고려에 자진 항복한 김부의 경우는 고려왕실이 김부에게 왕녀를 시집보내고 동시에 신라왕실에서 후비를 맞아 들이는 이중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유서깊은 신라왕실과 대등한 지위를 확보하여 통치 지배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고 그밖의 대부분은 극도의 근친혼이었다. 특히 신명태후 유씨와 貞德王后 柳氏는 자기들 소생의 자녀들을 서로 바꾸어 결혼시켰다. 그리하여 두 왕후는 태조 왕건의 배후자라는 관계 이외에 서로 상대한 소생의 왕자에 대해서는 장모로 공주에 대해서는 시어머니로서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고려왕실이 이렇게 복잡한 근친혼 관계를 맺은 것은 태조가 많은 후비들의 자녀들이 유력한 다른 호족과 혼인했을 경우 파생되는 왕실의 분열과 대립을 방지하고, 각 지역 호족들의 딸인 후비 소생의 자녀들끼리 중첩되는 결혼을 통해 가족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이들 호족세력들을 왕실 주변에 묶어 두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069)河炫綱,<高麗前期의 王室婚姻에 對하여>(≪梨大史苑≫7, 1968) 참조.

태조는 유력한 호족들에게 王氏 성을 하사하여 이들과 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어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는 먼저 태조와 명주세력과의 관계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태조 5년(922) 7월 무술일에 오랫 동안 불복하여 태조를 노심초사하게 하였던 명주 장군 순식이 그의 아들 수원을 보내 귀부해 오자 태조는 王姓과 田宅을 준 사실과 태조 10년 8월에 순식이 그의 아들 장명에게 600인의 군사를 주어 태조의 숙위를 담당하게 하고, 이어 태조 11년에는 순식이 자제들과 부하들을 이끌고 親朝하자 순식에게 왕성을 주고 대광으로 임명한 데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 때 장명에게 廉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원보로 임명하였으며 小將 관경에게도 왕성을 하사하였다. 역시 명주의 재지세력인 金乂도 이 때 왕성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光海州(춘주) 사람으로 궁예에게 협력하여 東宮記室의 벼슬까지 지내고서 궁예의 실정을 보고 숨어 살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찾아 온 朴儒의 경우에도 태조는 禮로써 대우하고 왕성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태조는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에 계속된 반란과 배신으로 야기된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여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후삼국 통일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각 지역의 유력자들과의 결속력을 다지는 방편으로 결혼정책과 더불어 賜姓政策을 시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밖에도 호족들에 대한 시책으로는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들 수 있다.

事審官의 기원은 태조 18년에 신라왕 김부가 고려에 항복해 오자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副戶長 이하의 관직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케 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 이후 다른 공신들도 각각 그 출신지의 사심관으로 삼게 되면서부터 사심관제도는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태조가 이 제도를 시행한 목적은 호족세력을 무마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에 開京에 거주하는 호족들로 하여금 출신지역을 관장케 하는 간접적인 지방통제를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其人制度는 후삼국시대에 각 지역의 호족세력들이 고려나 후백제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서 자신들의 자녀들을 인질로 삼게 한 것으로, 태조는 지방 호족세력들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시행하였다. 其人의 성격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되어 그 지위도 격하되었지만 태조대에는 개경에 기인으로 거주하고 있던 각 지방호족들의 자제를 우대하였다. 이는 당시 호족세력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 후백제 견훤과의 군사적 대립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 것이었다.070)河炫綱,<高麗王朝의 成立과 豪族聯合政權>(≪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참조.

또한 태조는 호족 포섭을 위해 유화적인 화합정책을 추진하였다. 태조가 호족들과의 화합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참으로 정성스러웠다. 그는 즉위한 다음 날인 6월 정사일에 신하들에게 자신이 왕위에 나간 것은 여러 호족들의 추대 때문이라 하고 군신 모두가 친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즐거움을 함께 하자면서 조서를 내렸다.

…내가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망한 왕의 전철을 경계하고) 풍속을 개혁하여 모두 새롭게 하고자 하니 마땅히 새 법규를 세우고 이전 것을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물과 고기처럼 서로 화합하여 이 나라 강산이 평화롭게 되는 경사가 있을 것이니 내외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 마땅히 나의 뜻을 알게 하라(≪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하6월 정사).

같은 달 무오일에는 韓粲 聰逸을 시켜 청주 출신으로서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을 석방케 하였다.

이전 임금(궁예)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 하였다. 그대의 고향인 청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호걸이 많아 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 하여 장차 모두 섬멸하려고 군인 尹全·愛堅 등 80여 인의 무고한 사람들을 불렀다. 그들은 지금 결박되어 오고 있는데 그대는 빨리 가서 그들을 방면하여 고향으로 돌아 가게 하라(≪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하6월 무오).

또한 8월 기유일에는 왕이 군신들에게 아래와 같이 유시하자 과연 각처의 호족 중 고려로 귀부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각처의 도적들이 내가 처음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듣고 혹 변방에서 변란을 일으킬 것에 대해 염려된다.「單使」를 각지로 파견하여 폐백을 후히 하고 언사를 낮추어서「惠和」의 뜻을 보이게 하라(≪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8월 기유).

같은 달 신해일에도 왕은 거듭 화합을 장려하는 조서를 내렸다.

신하로서 뛰어난 책략으로 제왕의 창업을 도와 세상에 보기 드문 공훈을 세운 자에 대해 토지를 나누어 주고, 높은 관직을 주어 포상하는 것은 百代의 모범이며 천고의 규범이다. 내가 미천한 출신으로 재주와 식견이 보잘 것 없으나 실로 여러 신하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마땅히 폭군(弓裔)을 폐할 때 충신의 절개를 다한 자에 대해 상을 주고 그 공훈을 표창해야 할 것이다. 洪儒·裵玄慶·申崇謙·卜智謙 등을 1등으로 하여 금은 그릇과 비단 침구와 능라·포백 등을 차등있게 주고, 堅權·能寔·權愼·廉湘·金樂·連珠·麻煖은 제2등으로 하여 금은 그릇과 비단 침구와 능백을 차등있게 주고, 제3등 2천여 인에게는 각각 능백과 곡식을 차등있게 주게 하였다. 내가 공들과 더불어 백성들을 구제함에 있어 끝까지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음에 이 공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이 있는데 상을 주지 않으면 장차 사람들에게 일을 하도록 할 수 없다. 이런 연유로 해서 오늘 포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나의 뜻을 알라(≪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8월 신해).

태조 스스로가 미천한 출신이요, 재주와 식견이 모자라는 데도 불구하고 중망에 힘입어 왕위에 나갔으며 또한 그들과 함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신하가 지킬 도리를 지키지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겸하의 뜻을 표하고 홍유 이하 2천여 인의 국가공로자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 9월 갑오일에 尙州賊帥 阿字盖가 사신을 보내어 내부하자 태조는 의례를 갖추어 이를 영접하게 하였는데, 이 영접을 위한 연습까지 할 정도로 신중과 정성을 다하였던 것이다.071)≪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6년 하6월 계미.

이와 같은 태조의 다년간에 걸친 화합과 포섭의 노력에 의하여 태조는 즉위 직후에 환선길·이흔암·임춘길·진선 등 내부 호족들의 모반사건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외부로부터는 朔方鶻巖城帥 윤선·尙州賊帥 아자개·康州將軍 윤웅·下枝縣將軍 원봉·溟州將軍 순식·眞寶城主 홍술·命旨城將軍 성달·碧珍郡將軍 양문·買曹城將軍 능현·高鬱府將軍 능문 등 각지의 유력한 호족을 동맹자로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태조는 내적으로는 고려정권에서의 왕권의 안정을 이룩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국력의 신장을 가져 올 수 있었으므로, 드디어 외적으로 후백제와 쟁패전을 벌일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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