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4) 태조의 정치이념과 사상
  • (3) 풍수지리사상

(3) 풍수지리사상

羅末麗初의 사회적 전환기에 사상적으로 불교에서는 선종이 대두하여 호족세력과 연결되면서 번성해 나갔고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유학사상이 새로이 내세워졌으며 한편으로는 風水地理思想이 널리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세력확장을 도모하던 지방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명당으로 내세워 기존의 경주 중심의 고정적인 지역 관념을 깨고 나말려초의 분열상을 합리화하고 호족 자신들의 독립적인 세력 형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풍수지리사상을 수용하였다.

당시 풍수지리의 대가인 道詵은 전라도 靈岩 출신으로 신라 하대의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선종 계통의 승려로서 光陽의 玉龍寺에서 독자적인 禪門을 개설하였다. 이 시기에 영암은 京畿道 南陽灣과 함께 對唐交通의 중요한 관문으로 당에 유학한 승려들이 대거 이곳을 거쳐 귀국함에 따라 이 지역은 禪門 9山 중 3파의 중심지가 될 정도로 선종의 중심지였는데 이곳에 중국의 풍수지리사상이 함께 들어 와 도선이 이를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119)崔柄憲,<高麗建國과 風水地理說>(≪韓國史論≫18, 國史編纂委員會, 1988).

그 뒤 신라사회의 해체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그리고 각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던 호족세력들의 새로운 움직임을 통찰하면서 살다 간 도선이 시대적 모순을 자각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 속에 당시의 자연환경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人文地理的인 지식과 경주 중앙귀족들의 부패와 무능, 각 지방에서의 호족들의 대두, 그리고 안정을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 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 태도를 종합하여 풍수지리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은 결과적으로 역사의 무대를 경주에서 중부지방인 송악으로 옮기게 하였고, 시대의 주역들을 경주의 진골귀족에서 지방의 호족으로 바뀌게 하여, 송악을 세력근거지로 한 왕건에게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유리한 입장이 되게 하였다. 특히 풍수지리사상은 인문지리적인 인식이 기존의 질서에 대한 혁명적인 선종과 연결되고 예언적인 圖讖說과 결부되어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건은 물론 각 지역의 호족들은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을 통해 민심을 장악하고자 노력하였다. 崔惟淸의 道詵碑文에 “이후 신라의 정치와 교화가 점차 쇠퇴하여 멸망의 조짐이 있었다. 도선이 장차 천명을 받은 성인이 일어날 줄 알고 가끔 송악군에 가서 놀았다”고 한 점이나 동 비문에서 도선이 왕건의 父인 龍建을 찾아가 그 집터를 잡아 주고 왕건의 출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하여 주었다는 내용은 비록 도선이 入寂한 다음에 고려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지만, 역으로 왕건이 도선의 풍수지리사상을 통해 민심을 장악하고, 호족의 포섭이나 고려 건국의 정당성 그리고 후삼국 통일의 당위성을 내세워 새로운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통치 차원의 방책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閔漬가≪編年綱目≫에서 “도선이 송악에 가서 17살 된 왕건에게 出師置陳·地利·天時의 법과 望秩山川과 感通保佑하는 이치를 알려주었다”라고 한 점도 도선과 왕건과의 관계를 통해 왕씨세력의 성장과정이 역사적 당위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케 하는 동시에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이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둔 天理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補閑集≫권 상에 실린 태조와 그의 참모였던 최응과의 대화에서 태조가 전쟁 중 陰陽과 浮屠에 뜻을 두고 있는데 대해 최응이 음양과 부도를 믿지 말고 文德을 닦아 인심을 얻을 것을 충고하자, 태조는 “그 말을 난들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리 나라는 산수가 신령스럽고 기이한 데다 편벽된 지역에 있으므로 백성들의 성품이 부처나 신을 좋아함으로써 행복과 이익을 구하려 한다. 지금은 전쟁이 쉬지 않고 안위를 결정하지 못해 밤낮으로 두려워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리하여 부처와 신의 비밀스런 도움과 산수의 영험에 혹 잠시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을까 생각할 뿐인데 어찌 그것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얻는 큰 법을 삼겠는가. 세상이 안정되고 편안히 살기를 기다려 풍속을 바꾸고 교화를 아름답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태조가 당시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풍수지리사상과 불교에 심취해 민심을 끌어 모아 안정을 얻고 호족들을 포섭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교정치 이념의 수용에 앞서 풍수지리사상과 불교사상에 입각해 일차적인 국가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풍수지리사상은 불교사상 혹은 고구려 계승이념과 함께 태조 왕건의 의식 속에 서로 구분되어져 있지 않고 상호적인 사상체계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태조의「訓要10조」중 제2조에서 볼 수 있다.

새로 세운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山水의 順逆을 내다 보며 점쳐서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을 쳐서 정한 이외의 곳에 함부로 절을 더 짓는다면 地德을 덜고 박하게 하여 祚業이 영구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으니 짐이 생각컨대 후세의 國王·公候·后妃·朝臣들이 각기 願堂이라 하여 혹시 사원을 더 세운다면 이는 크게 근심할 일이다. 신라의 말엽에 浮屠(절)를 다투어 함부로 세워 지덕을 덜고 쇠하게 해서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하4월).

태조는 풍수지리사상을 근거로 설립된 裨補寺塔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정치적 구심체를 마련하고자 한 의도가 나타나 있는 반면에 풍수지리사상을 내세워 사원의 양적 확대로 인한 국가경제 기반의 약화와 국가의 통치력이 약화되는 것을 막아 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또 제5조에서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서경을 중시함으로써 고구려의 계승이념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朕이 삼한의 산천의 陰佑에 따라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水德이 순조로워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大業萬代의 땅이다. 마땅히 네 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巡駐하여 백 일이 지나도록 머물러서 나라의 안녕을 이루게 하라(≪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하4월).

이와 같이 풍수지리사상은 신라의 붕괴와 고려의 건국 그리고 고려의 三韓統一의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태조 왕건이 민심을 얻고 호족들을 포섭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하였고, 나아가 국가이념인 고구려의 계승이념을 정당화하고 불교 장려를 빙자해 초래될지도 모를 국가의 통치력과 경제력 약화를 방지하는데 기여한 태조의 지도이념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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