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2. 왕권의 확립과정과 호족
  • 4) 호족 연합정권설의 문제
  • (1) 호족 연합정권설과 그 비판

(1) 호족 연합정권설과 그 비판

지금까지 혜종대부터 경종대까지의 정치사적 전개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종래 학자들은 태조대부터 경종대까지의 정치형태를「豪族聯合政權」이라 불러 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에 대한 강력한 의문과 비판이 제기되고 있어 주목된다.

우선 豪族聯合政權說에 대해 살펴 보자. 신라 말기에 오면 여러 가지 모순이 폭발하게 된다. 이 때 지방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豪族이었다. 호족은 그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강력하게 내세우는 존재였다. 이른바 후삼국시대는 호족의 존재를 배경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다. 나아가 태조의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도 호족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태조 왕건 당시의 정치형태를 호족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규정한다면 호족 연합정권이라 말할 수 있다. 왕건과 호족과의 결혼정책이라든가 賜姓政策, 정치기구에 나타난 특징이 그것을 말해 준다. 또 중앙정부는 지방관을 각 지역에 파견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일정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던 호족들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전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은 성종이 즉위하여 중앙집권적 개혁을 추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215)李基白,<槪要>(≪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1), 3∼4쪽.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먼저 호족 연합정권설의 가장 큰 전제는 호족들의 독자성이다. 당시 호족들은 성주 혹은 장군이라 불리우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민중들을 직접 지배하며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兵部·倉部 등과 같은 관부를 설치하여 지방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216)李基白,<新羅私兵考>(≪歷史學報≫9, 1957;≪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66쪽).
河炫綱,<高麗初期의 地方統治>(≪高麗地方制度의 硏究≫, 韓國硏究院, 1977), 12∼15쪽.
호족들은 이러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잃지 않은 채 고려왕조에 참여하였으므로 태조는 호족의 세력 기반을 중앙행정력에 흡수시킬 수 없는 왕권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호족들은 중앙에서도 독립된 단위로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의 예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태조 원년 6월 桓宣吉의 반역사건 때 그와 같이 행동하였던 ‘其徒五十餘人’이 환선길 개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세력 기반이었을 것이다. 태조 10년 8월 溟州將軍 王順式이 그의 아들 長命을 개성으로 보내 ‘卒六百’으로 숙위케 하였는데 이들도 장명이 직접 지휘하는 군사적 기반이었을 것이다. 또 혜종대에 왕규와 대립하게 된 박술희는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병사 100여 명을 수행시켰다. 이 경우의 병사 100여 명도 박술희 개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사적 기반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호족들은 중앙에 진출해서도 사병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217)河炫綱,<高麗王朝의 成立과 豪族聯合政權>(≪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7), 48∼50쪽.

둘째로는 호족과 왕권과의 관계다. 이것은 호족의 독자성과도 관련되는 문제로 태조대의 왕권은 그만큼 미약했다는 것이다. 태조는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지방에 사신을 보내 ‘선물을 많이 하고 말을 낮추는(重幣卑辭)’ 자세를보였고 이에 歸附者가 많게 되었다. 그러나 호족들이 귀부하였다고 해서 그출신 지방에 중앙의 행정력이 침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족들이 고려왕조에 대하여 적대의식 또는 독립적인 태도를 버리고 고려왕조에 가담하거나 협력하는 대신 그에 상응한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고려왕조와 지방호족 사이의 호혜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이후에도 상당히 오랫 동안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태조 3년 정월 康州將軍 閏雄이 그의 아들 一康을 개경으로 보내어 볼모로 삼게 한 것도 귀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웅은 강주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다만 충성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었을 뿐이다. 태조는 이에 대해 일강에게 阿粲의 관등을 주면서 중앙 고관의 딸과 결혼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례는 이밖에도 다수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218)河炫綱, 위의 글, 46∼48쪽.

셋째로는 태조의 혼인정책을 들 수 있다.≪高麗史≫后妃傳에 의하면 왕건에게는 29명이나 되는 왕후·부인이 있어서 마치 호색가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왕건이 결코 여자를 좋아한 때문만은 아니었고 대부분 정책적인 결혼이었던 것이다. 왕건은 각지의 유력한 호족의 딸들과 결혼함으로써 그들과의 끊을 수 없는 결합을 굳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부인들은 각지의 중요한 지방 출신들이 많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貞州 柳氏·羅州 吳氏·平山 庾氏·平山 朴氏·廣州 王氏·瑞興 金氏·江陵 王氏·順天 朴氏 등은 각기 그 지역 호족세력의 딸들이었다는 것이다.219)李基白,<王建>(≪韓國의 人間像≫2, 1965 ;≪高麗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22∼23쪽).

또한 태조는 29명의 부인에게서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얻었는데 이들을 근친결혼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그 이유는 왕실세력이 미약했던 태조가 자녀들이 유력한 다른 호족과 결혼하게 되면 왕실세력이 분열되지 않을까 염려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태조는 고려 왕실의 기반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족들의 세력을 왕실 주변에 묶어 두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220)河炫綱, 앞의 글, 55쪽.

넷째로는 여러 가지 제도상의 특징에서 호족 연합정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중앙의 정치기구면에서 廣評省·徇軍部의 존재가 호족 연합정권의 성격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광평성은 태조 원년 6월의 인사 조처에서 볼 때 서열 1위의 최고관부인데 단순한 행정기관이라기보다 호족세력을 대변하는 국가의 정책결정 기관일 것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광평성의 글자가 뜻하는 바와 같이 널리 평의하는 기관이었으며 장관인 侍中이 2명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보고 있다.221)李泰鎭, 앞의 글, 13쪽.
李基白,<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18∼20쪽.

순군부는 여러 호족의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협의체적인 군사 지휘권의 통수부로 보고 있다. 즉 군사에 관한 왕명을 시행하는 관부로 여겨지는 병부보다 순군부가 서열이 높다는 것은 태조가 이미 전제왕권과 결별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222)李泰鎭, 위의 글, 8쪽. 또 호족들의 귄익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그 군대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종합적인 기관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 근거로는 청주세력의 모반 직후 청주인 玄律의 徇軍郎中 임명을 裵玄慶 등이 반대한 것에서 찾고 있다. 나아가 순군부가 병부보다 중시된 것은 당시 호족의 군사력이 고려정부의 군사력보다 더 우위에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고 있다.223)河炫綱, 앞의 글, 51∼52쪽.

其人制度와 事審官制度에서도 호족 연합정권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있다. 기인제도는「건국초기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볼모로 삼고 또한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고문에 대비케 한」제도이다.224)≪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其人. 그러나 고려 초에는 국왕의 일방적인 필요나 강요에 의하여 호족의 자제가 選上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호족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자제를 중앙에 보내 중앙의 권위를 후광으로 하여 지방에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가지려고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태조도 중앙에 올라 온 호족들의 자제를 잘 대우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기인제도도 국왕과 호족과의 호혜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제도였다는 것이다.225)河炫綱, 앞의 글, 46∼48쪽.

사심관제도는 태조 18년 신라의 경순왕 김부가 항복해 오자 그를 경주의 事審으로 삼아 副戶長 이하의 관직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자 다른 공신들도 이것을 본받아 각기 자신의 고을의 사심관이 되었다.226)≪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事審官. 그런데 태조가 이 제도를 시행한 것은 호족세력을 무마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중앙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침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도에 거주하는 호족 출신의 지배계층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인 지방통제를 꾀하려 했던 것이라 보고 있다.227)河炫綱, 앞의 글, 55∼56쪽.

결론적으로 말해 이러한 특징을 가진 호족 연합정권설의 핵심은 왕권이 호족세력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약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조대 뿐 아니라 혜종대의 경우도 혜종이 자신에게 도전해 오는 왕규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왕권이 왕규세력보다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광종대에도 여러 가지 왕권 강화책을 실시하였으나 여전히 호족세력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고 보고 있다. 아직도 왕권 내지 고려의 중앙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침투하지 못하였고 호족세력은 여전히 강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광종대 왕권 강화책의 의의는 호족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한 결과 왕권과 호족 세력 사이에 호혜적인 정치적 절충이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228)河炫綱,<豪族과 王權>(≪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1), 109·152쪽.

그러나 이 호족 연합정권설에 대해 많은 비판과 반론이 제기되었다. 우선 호족의 독자성과 관련된 사병문제에 대해 비판이 가해졌다. 즉 환선길·왕순식·박술희와 관련된 무리들은 사병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환선길이나 왕순식은 국왕에 대한 신하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 군신관계 속에서 자율적 규제를 하고 있는 존재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군신관계의 성립이 인정되는 한 ‘其徒五十餘人’이나 ‘卒六百’은 궁극적으로 국왕의 지배 아래 편입되었음을 뜻하며 완결된 독립세력일 수 없다. 또 사료를 보면 태조는 환선길을 “심복으로서 위임하여 항상 정예를 거느리고 숙위케 하였다”라고 되어 있는 바 문맥상 이 정예를 환선길의 사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환선길 자신이 중앙의 한 장군으로 있었으며 그의 정예부하들 역시 중앙군 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환선길에게 태조도 통제할 수 없는 사병이 있었다면 태조는 그에게 경호 임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호족의 개념과 관련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환선길을 과연 호족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229)朴菖熙,<高麗初期 ‘豪族聯合政權’說에 대한 檢討-‘歸附’ 豪族의 정치적 성격을 중심으로->(≪韓國史의 視角≫, 永言文化社, 1984), 37∼38쪽.

왕순식이 아들 장명과 함께 중앙으로 올린 ‘卒六百’의 경우 원래 이들이 왕순식 휘하에 있을 때는 사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 병력을 중앙으로 올려 보낸 것은 왕권 견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태조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숙위 임무라고 하는 것은 성격상 왕의 직속군이 행하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장명이 이끌고 온 병력은 숙위 임무를 수행하게 되면서부터는 현실적으로 사병으로서의 속성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박술희의 호위 병력 100여 명도 사병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혜종의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비상한 불안사태 속에서는 관군병력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장군에 대한 호위라든가 쿠데타에 동원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조의 신임을 받았던 박술희가 이 때 운용한 병력은 관군의 일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230)鄭景鉉,<高麗 太祖代의 徇軍部에 대하여>(≪韓國學報≫48, 1987), 38쪽.

둘째, 호족과 왕권과의 관계에서 성립된「歸附」의 문제도 재검토되었다. 즉 고려 태조와 귀부 호족과의 관계가 서로 간의 호혜적 혹은 협조적 관계였다는 호족 연합정권론자들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태조대에 있어 호족의 귀부는 인질을 두는 것을 상례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개경에 인질을 두는 사태는 한편으로는 왕권의 확인, 그리고 지방세력의 견제책으로서 국왕의 필요에 의하여 (호족에) 강요된 사태인 것이며 다른 면으로는 호족이 국왕에 臣屬됨으로써 고려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 권력의 권위를 후광으로 삼고 지방에 계속적인 안정 세력을 유지하려는 필요에 의해 창출된 것이다. 결국 호족의 국왕에 대한「歸附」란 군신적 상하관계의 성립을 말하는 것이라 하고 있다.231)朴菖熙, 앞의 글, 21쪽.

강주장군 윤웅이 그의 아들 일강을 개경에 인질로 파견한 경우는 태조와 견훤 사이의「交質」과 같은 것은 아니고, 일방적으로 윤웅에 의한 볼모의 개경 파견인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하위자가 상위자에 대한 사대의 표시로서 행하는 것이다. 그는 하위자의 위치를 자인하면서 고려왕조로부터 일정한 보호를 받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볼모를 보내는 그 시점에서 국왕과 볼모를 보내는 자 사이에 군신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계는 昧谷城主 龔直이나 신라의 경순왕 김부, 명주장군 왕순식, 碧珍郡將軍 良文, 眞寶城主 洪術 등이 귀부했을 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232)朴菖熙, 위의 글, 22∼32쪽.

특히 일찍이 태조 11년 來朝한 바 있는 왕순식이 一利川 전투에 대병력을 이끌고 온 바가 있었다. 그러자 태조는 왕순식을 만나 꿈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대화 중에 태조는 자신을 朕이라 하면서 순식을 卿이라 부르고 또 순식은 자신을 臣이라 칭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이들이 완전한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233)文暻鉉,<豪族聯合政權論의 檢討>(≪高麗太祖의 後三國統一 硏究≫, 螢雪出版社, 1987), 176쪽.

한편 태조 3년 이전에는 태조와 귀부 호족의 관계가 어느 정도 대등한 입장에서 협조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태조 3년 이후에는 지배와 복속이 작용하는 군신관계로 발전하였다. 즉 왕권이 안정된 태조 3년 이후에는 지방호족들이 자신의 향토와 인민의 보전을 위해 스스로 고려에 귀부하여 왔다. 이 때의「歸附」는 신속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양자 사이에 지배와 복속이 작용하는 군신관계가 설정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234)嚴成鎔,<高麗初期 王權과 地方豪族의 身分變化-‘豪族聯合政權’說에 대한 檢討->(≪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38∼47쪽.

셋째, 태조의 호족 연합정책 중의 하나로 중요하게 거론되어 온 혼인정책에 대해서도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즉 태조의 결혼이 전국 각지의 유력 호족들과 결속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 근거로 后妃들의 출신지가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29명의 후비 중 출신 지역을 알 수 있는 26명을 조사해 보면 고려 지역이 11개 지역에 18명, 후백제 지역이 2개 지역에 2명, 신라 지역이 4개 지역에 6명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고려 지역 출신 호족들이 타지역 출신 호족보다 태조와 혼인관계를 맺는데 유리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 호족들은 궁예 때부터 上京從仕하여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역할을 했거나 일찍이 고려에 귀부하여 태조의 측근으로 활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태조가 이 지역 출신의 많은 호족과 혼인관계를 맺게 된 주요 배경이다. 다시 말해 태조 후비들의 출신지가 주로 고려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점은 태조의 의도적인 정략결혼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태조의 후비들을 보면 한 가문에서 2, 3명의 비가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태조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인가. 그보다는 후비들의 친부가 태조의 측근으로 중앙에서 일찍부터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것과 중앙에서의 확고한 기반을 다지려는 이들의 의도에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하고 있다. 태조의 장인들 중에는 지방의 유력 호족으로 보기 어려운 자들이 있다. 王柔(儒)·王景·王乂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태조의 혼인은 중앙으로 진출한 호족들이 중앙에서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왕실과의 통혼을 절실히 원했던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고 있다.235)嚴成鎔, 위의 글, 48∼51쪽.

이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호족 연합정권론자 자신도 태조의 혼인이 고려 왕실의 요청에 의한 경우보다는 호족들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236)河炫綱, 앞의 책(1988), 130쪽. 따라서 莊和王后 吳氏의 경우는 그 소생을 낳지 않으려 하기도 하였으며,237)≪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太祖 莊和王后 吳氏. 혼인은 했으나 같이 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大·小西院夫人 金氏는 태조와 혼인했으나 찾아오지 않자 결국 여승이 되었던 것이다.238)≪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太祖 大西院夫人 金氏·小西院夫人 金氏. 그러나 태조의 혼인이 그 妃父들의 중앙 진출 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은 선뜻 받아 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태조와의 혼인이 이루어진 뒤에 비부의 자격으로 중앙에 진출한 자들이 더 많았지 않나 한다. 그것은 태조 후비들의 출신지가 궁예 휘하에서 왕건이 경략했던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면에서 엿볼 수 있다.239)金甲童, 앞의 책, 110∼114쪽.

넷째, 제도적인 측면에서 호족 연합정권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가해졌다. 우선 태조 원년에 서열 제1위로 나타나는 廣評省이 호족세력을 대변하는 기관이 아니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광평성은 장관인 시중을 정점으로 하여 조정에서 널리 정치를 평의하는 정무기관이었다는 것이다. 광평성은 궁예 때부터 있었던 기관인데 고려 초에 호족 출신이 여기에 진출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역시 공식적인 행정관부로서의 성격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라 하고 있다.240)邊太燮,<高麗初期의 政治制度>(≪韓㳓劤停年紀念論叢≫, 知識産業社, 1981), 169∼173쪽.

그것은 광평성의 장관인 시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913년에 왕건이 광평 시중에 임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왕건이 궁예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건이 송악의 호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가 시중에 임명된 것은 호족의 대표자로서가 아니라 관료로서였다. 때문에 광평시중은 호족세력의 대표자이기보다는 왕명을 받드는 행정 책임자였다는 것이다.241)趙仁成,<弓裔政權의 中央政治組織-이른바 廣評省體制에 對하여->(≪白山學報≫33, 1986), 74∼75쪽. 또 태조대에 시중에 임명된 金行濤·朴質榮·劉權說·康公萱·柳德英·李(柳)陟良·王鐵 등의 출신지를 분석해 보면 개성 부근, 즉 洞州·平山·信州·貞州·中和와 忠州였다. 이들은 직접 태조와 혼인관계를 맺었거나 혼인관계를 맺은 호족 세력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국왕의 명을 받아 백관을 거느리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시중은 지방 호족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서있다기보다는 국왕의 관료였다. 다시 말해 시중은 국왕 밑에서의 정치적, 행정적 기능이 보다 중시되었다는 것이다.242)陰善赫,<高麗 太祖代의 侍中>(≪湖南文化硏究≫18, 全南大 湖南文化硏究所, 1988), 148∼156쪽.

호족 연합정권론자들이 호족 제장들의 군사력과 연결된 협의체로 보는 徇軍部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다. 순군부는 병권을 맡아서 군중에 호령하는 군사지휘권을 가진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태조가 청주인 현률을 순군랑중에 임명하자 배현경·신숭겸 등이 논박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이전에 순군리 林春吉이 모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병권을 맡은 데다가 本州를 믿었기’때문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배현경 등이 현률의 순군 랑중 임명을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순군부의 기능이 지방호족의 군사력과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병부는 단순한 군사행정 기관의 역할을 담당한 기관으로 보고 있다.243)邊太燮, 앞의 글, 172∼173쪽.

그런데≪高麗史≫권 76, 百官志에는 순군부가 혹시 掌兵의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려사 찬자의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掌兵이란 무장들이 출전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게 되는 실제적인 전투지휘 활동을 말한다. 따라서 순군부가 중앙군의 각급 전투지휘관들로 구성된 기구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순군부의 관리들이 문신 계열이었다는 점에서 인정하기 어렵다.「徇」자를 巡行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순군부는 왕권을 보위하기 위하여 중앙의 여러 병력들의 동태를 순행 감시하던 일종의 보안기구가 아닐까 하는 견해도 나왔다. 그 근거로는 순군부의 관리들이 주로 충성심이 확실한 자들이었으며,「典兵權」이란 표현도 무장들의 지휘권 행사의 동태를 살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44)鄭景鉉, 앞의 글, 64∼66쪽. 그러나 이 견해는 좀 지나친 추측이 가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순군부가 일종의 보안기구라면 왕명을 받들어 군사지휘권을 행사하는 관부는 병부라는 말인가 아니면 또 다른 관부가 있었다는 뜻인가. 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其人制度에 대한 비판은 앞서「歸附」의 문제를 다룰 때 대략 언급하였다. 즉 고려왕조의 강요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호족들이 자신의 자제를 서울에 올려 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평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관계의 성립을 뜻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왕이야말로 그 인질에 대하여 이런 저런 반대급부적 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당사자인 것이며 인질을 보내는 자는 다만 하위자로서 피동적 위치에 있다고 할 것이다. 국왕은 이러한 호족들을 군신관계 하에서 지배함으로써 그 지방의 지배를 임시적으로 위임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245)朴菖熙, 앞의 글, 20쪽.

事審官制度가 호족들을 통한 지방의 간접지배 양식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태조가 이 제도를 시행·운용한 것은 호족들의 힘이 강대하여 중앙행정력이 지방에까지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상황에서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지방 통제책이었을 뿐이었다.

태조는 필요에 따라 호족들을 벌주거나 제재를 가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下枝縣將軍 元奉의 예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원봉은 일찍이 태조 5년(922) 來投해 온 바 있는데 그 대가로 이듬해 元尹이란 관계를 수여받고 그 출신지가 順州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태조 13년 원봉이 견훤의 군대에게 패배하자 태조는 원봉을 죄주는 한편 순주를 다시 하지현으로 강등시켰던 것이다.246)≪高麗史節要≫권 1, 태조 5·6·13년.

이처럼 태조는 자신에게 귀부하거나 협조하는 호족들의 근거지는 승격시켜 준 반면 반항하거나 패배한 호족들의 근거지는 그 격을 강등시켰다. 태조대에 安東府·高鬱府 등의 府와 50여 개 가까운 州가 탄생된 것도 이러한 정책의 결과였다.247)旗田巍, 앞의 책.
金甲童, 앞의 책, 93∼123쪽.
물론 많은 군·현이 강등되기도 하였다. 현재의 전라도 지역에는 승격된 곳이 거의 없는 반면 강등된 곳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호족들의 反附에 따라 태조가 군현을 승격 또는 강등시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태조대에 중앙의 통치에 의한 군현의 來屬關係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도248)金甲童, 위의 책, 126∼137쪽. 호족세력보다는 태조의 왕권이 훨씬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태조는 중앙이나 지방에 있는 호족들에게 고려식 官階를 수여하였다. 물론 이 관계가 호족들에게만 수여된 것은 아니었다. 귀부·내투한 호족들 이외에도 무인들과 왕의 장인들, 그리고 문인·유신들도 그 수여 대상이었다.249)金甲童, 위의 책, 189∼199쪽. 그런데 관계를 제수받았다는 것은 이제 그들 자신이 국왕의 臣僚임을 자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방에서 분권적 세력을 형성한 호족들도 태조정권의 합법적인 신료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250)金光錫,<高麗太祖의 臣僚制>(≪白山學報≫33, 1986). 태조는 지방의 유력 호족들에게 관계를 수여하여 이들을 국가의 공적 질서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한편 이들에게 그 지역의 통치권을 위임하였던 것이다. 관계를 수여받은 호족들의 근거지가 대체로 주·부의 읍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태조의 지방 통제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51)金日宇,<高麗初期 郡縣의 主屬關係 形成과 地方統治>(≪민족문화≫12, 民族文化推進會, 1989), 51쪽.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려 초기에는 호족세력이 왕권보다 강하였다는 호족 연합정권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비판 중에는 문제가 있는 것도 없지 않으나 대체적인 면에서 볼 때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도 왕권은 호족세력보다 우세하였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듯하다. 다만 다른 시대에 비하여 호족세력이 강하였으므로 그들을 배려한 여러 가지 정책이 실시되었을 뿐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왕권이 호족세력보다 강하면 호족 연합정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같은 물음은 호족 연합정권론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호족세력이 왕권보다 우세하면 이것이 호족 연합정권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처음부터 호족 연합정권이 무엇인가라는 개념 정립을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다. 따라서 호족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고 연합정권의 개념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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