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4. 고려사회 지배세력의 성격론
  • 1) 관료제 및 가산관료제설과 그에 대한 비판

1) 관료제 및 가산관료제설과 그에 대한 비판

고려사회의 성격은 여러 시각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 아마 가장 많이 논의되어 온 것 중의 하나는 奴隷制 내지는 封建制 문제와 관련한 고대 또는 중세 사회론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사상적인 측면에서불교적 성격이 논의되기도 하였으며, 또 이 시기에 유난히 잦았던 외세와의 항쟁에 주목하여 대외적인 성격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위에 든 바와 같은 시각이 아니라 주로 정치적 사회적 주도세력의 측면에서 고려가 貴族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볼까 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사실 고려를 그처럼 귀족제사회로 이해하는 견해는 연구자에 따라 다소의 출입을 보였다 하더라도 1920년대 초 이래의 개설서로부터374)李基白은<高麗 貴族社會의 形成>(≪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152쪽;
≪高麗 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34쪽)에서 安廓의≪朝鮮政治史≫(1923) 및 孫晋泰의≪朝鮮民族史槪論≫(1948) 등을 들면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얼마 전에 발표된 전문적인 논문에 이르기까지375)대표적인 논문으로는 邊太燮의<高麗朝의 文班과 武班>(≪史學硏究≫11, 1961;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高麗社會의 特性>(≪史學硏究≫13, 1962;
≪韓國史의 省察≫, 三英社, 1978),<高麗貴族社會의 歷史性>(≪讀書新聞≫, 1972, 5 ;≪韓國史의 省察≫, 三英社, 1978)을 들 수 있다.
폭넓은 공감을 얻어 왔었다. 고려왕조는 출생신분을 크게 강조하던 身分制社會로서, 가문·문벌이 좋은 귀족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국가를 운영하여 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0년대 초기에 들어와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고려국가가 채택한 보다 일반적인 官人등용법은 개인의 능력 여하를 시험하여 선발하는 科擧制이었으며, 그에 따라 선발된 과거관료가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므로 고려왕조는 귀족제사회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官僚制社會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학설의 주창자는 자기가 말하는 관료제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웨버(Max Weber, 1864∼1920)가≪支配의 諸類型≫에서 그 하나로 지적한「家産國家」에서의 통치구조인「家産官僚制」를 뜻한다는 점도 같이 밝히고 있다.376)朴菖熙,<高麗時代「官僚制」에 대한 고찰>(≪歷史學報≫58, 1973), 35쪽.

그리하여 이 논자는 고려에서 과거제가 처음 시행되는(958) 光宗朝에 이미 과거에 합격한 과거관료를 골간으로 하여 官僚制가 수립될 수 있었으며, 이는 成宗代(982∼997) 이후 더욱 강화·발전되어 갔다고 하였다. 그는 이같은 자기의 입론을 위해 각 왕대에 크게 활동한 관료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 대부분은 과거급제자가 아니면 科試를 주관한 고시관인 知貢擧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高麗史≫列傳에 立傳되어 있는 650명의 인물들을 분석하여 보아도 같은 결과가 나오며, 이를 다시 주도적인 위치에 있던 관료의 숫자를 따졌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것은 기본적으로 관직이 血系와는 별반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 여하에 의거하여 주어졌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그로써 과거가 얼마나 중시되었던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상 父祖의 蔭德에 힘입어 官途로 나가는 蔭叙制를 많이 이용했을 듯싶은 공신의 후손들 역시 과거제에 적극 적응하고 있고, 또 비록 음서에 의해 등용되었다 하더라도 在官 중에 계속하여 급제를 시도하는 것도 같은 연유로 볼 수가 있다. 이처럼 과거제가 일반성을 띠고 있었을 뿐더러 절대적인 기능을 했던 고려는 마땅히 관료제사회로 파악되어야 하며, 따라서 蔭叙制 一般性說에 근거를 둔 귀족제사회론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377)朴菖熙, 위의 글, 39∼52쪽.

한편 이 논자는 원래 지방의 한미한 流外出身이었거나 대수롭지 않은 中·下級官吏의 자제가 급제한 것을 계기로 出仕·陞進하여 門地를 세운 예를 들어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이는 과거제가 하층신분의 상승 이동을 가능케 하여 주는 기능이 컸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으로 역시 귀족제 존립설을 부정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378)朴菖熙, 위의 글, 52∼55쪽.

검토하여 보건대, 이상의 논지는 일단 긍정적인 면이 많다고 생각된다. 과거는 원리상으로 문예·경전 등에 관한 개인의 학문적 실력을 기준으로 하여 관인을 선발하는 고시제도로서, 그 비중이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사회적인 기능이나 역할 역시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관인 선발제도의 또 다른 하나인 음서제를 강조하며 종래의 귀족제설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고려를「貴族官人社會」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동시에 발표되고 있고,379)金毅圭,<高麗官人社會의 性格에 對한 試考>(≪歷史學報≫58, 1973). 또 관료제설 주창자가 말하는「家産官僚制」나 과거제 운영의 실제와 그 성격에 관한 이해방식 등에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하는 논자도 나오고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같은 비판론에 관하여 살펴 보기로 하겠다. 고려왕조를 관료제 내지 가산관료제 사회로 보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우선 그 논지가 주로≪高麗史≫열전에 올라 있는 인물을 통계화하여 전개한 데 잘못이 있었다는 점에서 시작되고 있다.≪高麗史≫열전은 극히 제한된 사료일 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관료적 성격이 강한 조선 초기의 관인들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과거 출신을 중심으로 서술한 만큼 한계성이 뚜렷한 것인데 그와 같은 사실을 고려함이 없이 다만 그곳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의 숫자만 가지고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 입론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80)金毅圭, 위의 글, 62∼63쪽.

잠시 생각하더라도 이러한 견해는 일면 정당한 것 같다. 하지만 관료제설에 관한 비판은 과거제 자체에 대하여 이해를 달리하고 있는 데서 보다 적극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과거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광종조의 상황만 해도 그것을 채택한 목적은 매우 제한적이어서 급제자 수가 극소수에 그쳤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리라는 지적을381)姜喜雄,<高麗初 科擧制度의 導入에 관한 小考>(≪韓國의 傳統과 變遷≫, 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73), 269쪽. 할 수 있다. 즉 광종 9년(958)에 科試를 처음 실행한 이후 재위하는 18년 동안 8회를 실시하면서 進士는 27명, 明經은 5명을 뽑고 있어서 급제자 수는 고작 연평균 2명도 못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382)朴龍雲,<高麗時代의 科擧-製述科의 運營-)>(≪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1990), 271쪽. 이러한 실정에서 과거관료를 골간으로 하는 관료제의 수립을 논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판단되기 때문이다.

응시 자격의 면에서 볼 때 과거는 결코 신분을 초월하여 실력에만 기준을 두고 있던 관인등용법이 아니라는 지적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실제로 靖宗 11년(1045)에 발표된 判文에 “五逆·五賤·不忠·不孝·鄕·部曲·樂工·雜類의 자손에게는 赴擧를 許하지 않는다”고 한383)≪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靖宗 11년 4월 判.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5역과 불충·불효는 범죄자류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본인은 말할 것 없고 그 자손에게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분제도상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여러 종류의 천인을 지칭한 듯한 5천과 더불어 향·부곡인 및 악공과384)樂工을 樂·工으로 해석하는 논자도 있다.하급의 말단 吏屬인 잡류의 자손에게는 역시 응시가 금지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에서 잡류의 자손에게만은 얼마 뒤에 응시를 허용한 듯한 기사가 보이며,385)≪高麗史節要≫권 5, 문종 12년 5월·≪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限 職, 문종 12년 5월·≪高麗史≫권 95, 列傳 8, 李子淵. 그로부터 다시 얼마의 시기가 지난 인종 3년(1125)에는, “電吏·杖首·所由·門僕·注膳·幕士·驅史·大丈 등의 자손은 군인의 자손에게 諸業의 選路에 허통하도록 한 예에 의거해 赴擧케 하되, 製述·明經의 兩大業에 오른 자는 5품까지로 한정하고, 醫·卜·地理·律·算業에 (오른 자는) 7품까지로 한정한다”고 하여386)≪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限職, 인종 3년 정월 判. 급제자에 대한 限品叙用의 규정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응시가 허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시기에 따라 다소의 차이를 나타내고는 있으나, 5역·불충·불효 등의 특수한 경우 이외에도 5천이나 향·부곡인·악공의 자손 등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는 사회적 신분층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지방 향리의 경우는 문종 2년(1048)에 나온 判文에 규정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제술업(과)과 명경업(과)에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각 州縣 副戶長 이상의 孫과 副戶正 이상의 子’로 되어 있다.387)≪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문종 2년 10월 判. 그 뒤 문종 5년에는 향리의 승진 규정이 마련되어 ⑨諸壇史로부터 ⑧兵史·倉史로, 다시 거기에서 ⑦州府郡縣史로, 이어서 ⑥副兵正·副倉正→⑤副戶正→④戶正→③兵正·倉正→②副戶長→①戶長의 순서로 9단계를 밟도록 하고 있지마는38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문종 5년 10월 判. 이 사료에 나오 는 後壇史는 앞뒤의 문맥으로 보아 諸壇史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千寬宇,<閑人考-高麗初期 地方統治에 관한 一考察->(≪社會科學≫2, 韓國社會科學硏究會, 1958;≪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33∼34쪽) 참조. 응시 자격을 이와 견주어 볼 때 꼭 가운데에 위치한 부호정과 그리고 그 위의 호정 및 병정·창정은 子까지, 다시 그 위의 부호장·호장은 子·孫까지 응시하게 하고, 부병정·부창정 이하의 자손에게는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제술업과 명경업에는 향리층 가운데서도 일정한 선 이상의 자손만이 응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응시자격 문제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부류보다도 一般良民의 경우가 어떠했는가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들이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신분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검토하여 갈 때 우선 주목되는 기사가 위에서 든 바 향리층의 응시자격을 규정한 문종 2년(1048)의 판문 말미에, 雜業 가운데 하나인 醫業에는 호정 이상의 子에 한정하지 않고 비록 庶人이라도 응시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지칭하고 있는 서인은 종래 우리들이 이해하여 왔던 것처럼 일반양민과 동일한 존재로 생각된다.389)文炯萬은<高麗科擧制度에 있어 赴擧資格의 再檢討>(≪釜山史學≫4, 1980), 4∼6쪽에서 庶人을 오히려 良民과 대칭되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데, 필자로서는 선뜻 동감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양민은 의업 등 주로 기술직을 선발하는 잡업에는 응시가 가능했으나 제술업과 명경업에는 그것이 불가능하였다는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된 기사로 역시 앞에서 제시한 바(註 13 사료) 電吏·杖首 등 잡류의 자손은 “軍人의 자손에게 諸業의 選路에 허통토록 한 예에 의거해 赴擧케 한다”는 인종 3년(1125)의 판문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대업을 비롯한 각 科試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한「軍人」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일반 양민의 응시 가능성도 생각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의「군인」도 軍班制說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군인직을 전문으로 하는 京軍 소속의 군인으로 이해하는 게 옳을 듯싶다. 만약에 이와 같은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 것 같으면 특히 제술과의 경우「군인」에게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고 해서 그 사실을 근거로 일반양민에게도 허용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또한 어렵게 된다.390)朴龍雲, 앞의 책, 240∼241쪽.

양민에 대한 과거에의 응시를 명시한 규정은 이보다 10여 년이 더 경과한 인종 14년(1136) 11월의 판문에 나타나고 있다. 즉, 거기에 보면 明經業監試와 書業·算業·律業 등 각 雜業監試에 응시한 수험생에게 부과하는 과목이 白丁과 莊丁으로 나뉘어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391)≪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인종 14년 11월 判. 여기에서 백정과 장정이 과연 어떤 부류였느냐 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데, 현재로서는 백정이란 주로 職役을 부담치 않아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지 못한 농민층으로, 그리고 장정은 莊(장)·處民과 관련시켜 생각하여 보려는 견해가 많다는 정도로 언급해 둘 수밖에 없을 것 같지만, 하여튼 이로써 명경업과 잡업에는 백정 등의 일반양민이 응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확인이 된다. 물론 이것은 명경업의 응시 자격에 관한 문종 2년의 판문과는 차이가 있어 앞으로 좀더 검토가 필요할 듯싶지마는, 그러나 명문으로 나와 있는 본 규정에 의문을 가질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논자들이 그간 주목한 것은 이보다는 오히려 이 인종 14년의 규정에 하필이면 왜 제술업감시에 관한 내용이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제술업만은 백정과 장정에게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거니와,392)李基白, 앞의 책(1990), 57쪽. 필자도 이 의견이 옳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종래 논자들 가운데서는 제술업까지도 일반양민에게 개방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나,393)曺佐鎬,<麗代의 科擧制度>(≪歷史學報≫10, 1959), 149∼152쪽.
文炯萬, 앞의 글, 4∼6쪽.
李成茂,<韓國의 科擧制와 그 特性-高麗 朝鮮初期를 中心으로->(≪科擧≫, 一潮閣, 1981), 74·96쪽.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 또한 적지 않은 것이다.394)李基白, 앞의 책.
許興植,<高麗 科擧의 應試資格>(≪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84·85쪽.
朴龍雲, 앞의 책, 239∼243쪽.

하기는 근자에도 일반양민보다 사회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던 鄕·部曲人에게조차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395)朴宗基,<高麗 部曲制 成員의 分析>(≪高麗時代 部曲制硏究≫, 서울大出版部, 1990), 48∼51쪽. 이 논자는 과거라고만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은 제술업을 포함한 각종 科業을 모두 지칭한 듯 싶은데, 위에서 설명한 인종 14년의 판문에 장정이 언급되고 있음을 참작컨대 이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부곡인들이 어느 시기부터 명경업이나 잡업에 응시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데는 주저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제술업에도 응시할 수 있었을까는 여전히 의문시된다. 부곡인의 과거응시 긍정론자는 그 가장 중요한 근거로 역시 앞에서 든 바 ‘五逆·五賤·不忠·不孝·鄕·部曲·樂工·雜類의 자손에게는 赴擧를 許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온 靖宗 11년의 판문을 종래와는 달리 ‘五逆·五賤·不忠·不孝(의 죄를 범한) 鄕·部曲·樂工·雜類의 자손에게는 赴擧를 許하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五逆 등은 수식어가 되어 그같은 죄를 범하지 아니한 향·부곡·악공·잡류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이 해석할 경우 ‘五逆·不忠·不孝’는 그런대로 납득이 가나 ‘五賤’은 죄의 종류가 아니라 어떤 부류의 賤人 자체를 의미한다고 짐작되는 만큼 수식어로 사용되었다고 보기가 어려워 이해에 곤란이 따른다. 역시 새로운 해석에 동의하기에는 난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또 구체적인 실례로 들고 있는 鄭文만해도 그렇다. 논자는 정문의 급제가 ‘부곡인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好例’라 하였지만396)朴宗基, 위의 글, 52쪽. 사실은 그의 外祖가 부곡 출신이었을 뿐 정문 자신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더군다나 그의 부친은 제술과에 壯元으로 급제한 후 禮部尙書(정3품)·中樞使(종2품)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뒤에 私學 12徒 가운데 하나인 弘文公徒를 열어 門下侍中(종1품)·光儒侯에 추증된 鄭倍傑이었다는397)≪高麗史≫권 95, 列傳 8, 鄭文. 점을 감안할 때 정문을 부곡과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많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검토하여 왔듯이 명경업과 잡업은 시기의 문제가 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일반양민에게까지 개방되었으나 제술업은 향리의 경우 副戶長 이상의 子·孫이나 副戶正 이상의 子, 그리고 중앙 관리의 경우는 胥吏 이상층과 양반·귀족에게 응시가 한정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데 이들 세 과업 중 관료의 주된 공급원이 된 것은 매우 제한된 신분층만이 응시할 수 있었던 제술업으로서, 이것이 명경업과 잡업에 비하여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398)이 점에 대해서는 朴龍雲, 앞의 책, 588∼591쪽 참조. 그런 데다가 명경업이나 잡업마저도 경제적·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던 일반양민들이 그들의 처지를 극복하고 과연 얼마만한 숫자가 응시·급제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할 때 그리 전망이 밝지 않았던 것 같다.399)李基白, 앞의 책, 57∼58쪽. 응시 자격면에서만 하더라도 고려시대의 과거제가 지니는 한계성은 뚜렷했던 것이라 하겠다.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이 시기의 과거는 시행과정에서 가문관계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도 있다. 과거 절차법에 따르면 擧子는 시험이 시행되기 일정한 기간 이전에 行卷과 家狀을 貢院에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400)≪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선종 8년 12월 判·예종 11년 11월 判. 이 중 가장에는 당해인의 성명과 본관·四祖(父·祖·曾祖·外祖) 및 응시 자격·연령·4조의 관직 등을 기록하게 되어 있었는데,401)≪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試官 원종 14년 10월·공민왕 9년 同年錄. 同年錄에 대해서는 許興植,<高麗科擧制度의 檢討>(≪韓國史硏究≫10, 1974, 39쪽;앞의 책, 1981, 67∼68쪽) 참조. 그것이 비록 집안의 허물을 알아보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하지마는402)≪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예종 11년 11월 判. 과거시험 그 자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이다. 金富軾의 아들 金敦中은 차석으로 급제하였는데도 인종이 그의 아버지를 위로코자 수석으로 올려 주고 있는 예나,403)≪高麗史節要≫권 10, 인종 22년 하5월. 좀 시기가 뒤지는 때의 사실이긴 하지만 李穀과 許伯이 과거를 관장하면서 私情에 이끌려 대부분 ‘世家의 不學子弟’들을 선발하여 憲司의 탄핵을 받은 일404)≪高麗史≫권 109, 列傳 22, 李穀. 등이 그 증거로 들어진다. 또 일단 과시에 급제했다 하더라도 初職을 받을 때까지 대기하는 기간의 장·단, 제수받는 초직 자체의 이·불리, 臺諫의 심사과정 등에서 역시 가문관계가 작용했을 가능성은 컸다고 짐작된다.405)朴龍雲, 앞의 책(1980), 277∼302쪽 참조. 史書에 수석으로 급제한 사람의 성명은 모두 실려 있어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의종 24년까지만 하여도 130명이 찾아지는데, 그들 중 60%가 넘는 숫자인 80명에 가까운 인원은 성명만을 전할 뿐 官歷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주된 원인도 이같은 점에 있지 않았나 추측되는 것이다.406)朴龍雲,<高麗 家産官僚制說과 貴族制說에 대한 檢討>(≪史叢≫21·22, 1977≪高麗時代 臺諫制度 硏究≫, 一志社, 1980, 315∼316쪽).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향리나 流外의 서리들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계기로 出仕하여 門地를 세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과거제가 지니는 사 회적 기능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 왔듯이 당시의 과거제는 실제적으로는 제한된 상급의 지배신분층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면이 많았던 것이다. 요컨대 고려시대의 과거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특권을 배타적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생각되고 있지마는,407)李基白, 앞의 책, 61쪽. 이렇게 볼 때 과거제에 근거하여 주창된 관료제 내지 가산관료제 사회설은 다시 검토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편 위에서 살핀 내용과는 방향을 달리하여 관료제 및 가산관료제의 개념을 추구한 결과 양자간에는 상충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또 가산관료제와 같은 개념을 고려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기도 어렵다는 견해가 있었다. 즉, 관료제는 근대적인 소산물로 합리화·능률화를 목적으로 규칙의 지배·沒主觀性·專門化·階層的 權限秩序 등을 속성으로 하는 집행이나 관리 조직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조직을 구성하는 인적 요소인 행정간부, 곧 관료들도 인격적으로는 자유여서 오직 객관적인 관직 의무에만 복종하고, 명확한 관직 권한을 가지며, 그들의 선발은 전문자격에 따라 자유로운 계약에 의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칭되는 지배구성체가「家産制」였다. 즉 이는 전근대사회에 있어서의 전통적 지배의 한 형태로, 지배자의 권리는 그의 고유권으로 간주되어 그것이 임의의 소유대상과 같은 방식으로 專有되며 경제적 권익도 그와 동일한 양식으로 처분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띠었다. 그런데 이 가산제 지배자가 그의 권력을 국가권력으로 발전시켰을 때 그 국가를「家産國家」라 할 수 있거니와, 여기에 상당한 정도로 관료제적 요소가 나타남으로써 가산관료제의 개념도 도출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산관료제란 결국 가산제사회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합목적적인 직무 배분에 의하여 신분적인 階序制 조직을 이루어, 형식적으로는 관료제적인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 경우를 지칭하는 통치구조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 가산관료제는 본질적으로 家産制 지배구조에 원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정간부도 근대관료제의 그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몰주관적인 자격에 의하여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와의 개인적인 성실관계에 따라 그가 자의적으로 선택하였고 또 그 지배도 가산제적이었다는 것이다.408)朴龍雲, 앞의 책(1980), 295∼301쪽. 이와 같이 이해하고 보면 관료제와 가산관료제는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두 체제가 다같이 과거제가 시행되었다 하여 곧바로 성립되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대략 알 수 있다. 나아가서 기본적으로 가산제적 지배원리를 가지고 있던 가산관료제를 왕권이 宰樞群과 臺諫 등에 의하여 많은 견제를 받았던 고려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 역시 무리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 명확해진다. 고려왕조를 관료제 내지 가산관료제 사회로 보아야 한다는 제의에는 여전히 찬동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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