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4. 고려사회 지배세력의 성격론
  • 2) 귀족·귀족제의 개념

2) 귀족·귀족제의 개념

고려를 귀족제사회로 보려고 할 때 먼저 귀족과 귀족제에 대한 개념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종래 이에 대해서는「家門·門閥이 좋은 사람들」을 귀족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사회를 곧 귀족사회로 이해하였으며,409)邊太燮, 앞의 책(1971), 276쪽. 또 身分制社會라는 점에 중점을 두어 이같은 사회에서의 지배신분층을 귀족이라 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말할 때에 그 사회는 곧 귀족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는410)李基白,<高麗 中央官僚의 貴族的 性格>(≪檀國大 第4回東洋學學術會議講演鈔≫, 1974) 46∼47쪽. 견해 등이 피력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정의는 약간의 문제가 없지 않은 것 같다. 전자의 경우 가문·문벌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이 좋은 文班만을 귀족으로 보고 그것이 문반보다 못한 무반은 아예 귀족층에서 제외해 버리고 말았지마는, 엄연히 지배체제의 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또 功蔭田柴의 대우에 있어서나 자손의 음서 및 國予學·太學에의 진학에 있어서도 문반과 똑같은 특권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을 그렇게 처리하여도 좋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지배신분층은 생각하기에 따라 귀족에는 포함시킬 수 없는 豪族이나 吏族 등을 포괄하는 넓은 신분층을 의미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 규정은 좀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는데, 서양에서 전형적인 형태를 보인 것처럼 귀족의 범위를 公爵·侯爵·伯爵·子爵·男爵과 같이 爵位貴族으로 한정시킬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주지하듯이 그들은 각각의 작위를 자손에게 세습시키면서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는 특수신분층이었다.

고려에도 그와 비슷한 爵位制는 있었다.411)≪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爵·宗室諸君·異姓諸君 참조. 그러나 우리의 경우 왕족을 제외한 異姓으로 봉작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는 고위관료나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인물에 한정되고 있으며 또 그것이 자손에게 세습되지도 않은 것 같다. 말하자면 고려시대의 작위는 그것을 받은 당사자에 대한 優遇 조처일 뿐 세습도, 그리고 귀족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고려왕조에서는 작위와 같은 명목상의 기준에 의해 귀족의 여부를 판가름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런 점에 우리의 고충이 있지마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귀족은 ‘일반 인민과 구별되는 신분적·정치적 특권이 주어진 가족에 태어난 인간’ 또는 ‘신분제사회에서의 지배신분층’ 등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 물론 좀더 파고 들어 가면 이같은 규정도 약간의 문제가 없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그러나 어쨌든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귀족은 양민보다 상위의 특권신분층이라는 것과 이러한 신분은 특권적 家系에 출생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血의 상속」에 의해서 특권적 신분을 세습하며, 이러한 세습되는 특권적 신분에 적합한 정치·경제·사회 등 제부면의 특권적 지위까지도 향유하는 인간이 귀족의 범주 속에 편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은 귀족의 개념을 이와 같이 규정할 때, 이 규정에 맞는 사람들이 국가의 요직을 점유하고 귀족제적인 테두리 안에서 나라를 운영하여 간다면 그 사회를 곧 귀족사회라고 불러 무방하지 않을까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드러난다. 즉, 귀족제 아 래에서는 출생신분이 제1차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개인의 능력이나 資性은 제 2차적 문제가 된다. 어느 개인은 그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배경이 되는 종족·친척과 合體되어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또 귀족제 아래에서는 관직의 세습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정권은 소수의 가문에 의해 累代에 걸쳐 장악되며 그 결과 문벌이 형성되고 家格의 상하가 생겨난다. 이 家格意識은 혼인관계에 잘 표현되어 귀족들은 동일층 내지는 상층 가문과의 결혼을 희망하며 그에 따라 하나의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게 된다. 아울러 저들은 자기네의 물질적 뒷받침을 위하여 토지의 사적 영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을 모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412)朴菖熙, 앞의 글, 36∼37쪽.
朴龍雲, 앞의 책 (1980), 307∼310쪽.

그러나 이것으로써 역사상의 귀족 내지 귀족제의 개념이 분명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위에서 말했듯이 귀족은 세습적인 특권신분층이라고 했거니와, 이처럼 귀족은「역사의 堆積」에 의하여 형성될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역사의 퇴적」이 얼마만큼의 시간적 경과를 거쳐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또 귀족은 지배신분층이라고 했지만 그 범위는 유동성이 있을 수 있겠는데 그 한계는 어떻게 잡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살펴 가는 데 있어 官品이 하나의 기준으로 제시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 내지 중국사회의 귀족은 관직귀족이었던 때문이다. 우리의 귀족은 곧 관직보유자로서, 그들에게 있어 관직은 정치적 권력의 원천이요 경제적 수입원이며 사회적 위세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관직을 지니고 있었는지 여부 및 高下는 그 사람의 신분과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고려시대의 귀족을 5품관 이상으로 보자는 견해가 있다. 물론 논자 중에는 종9품 이상의 品官 전체를 귀족으로 이해하자는 의견도 있으나413)白南雲,<貴族群>(≪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改造社, 1937), 274쪽. 거기에는 좀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당시에 귀족적 특권이 부여된 품계는 5품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음서의 특전이 그러하며 공음전시를 지급하여 자손에게 세습시킬 수 있도록 한 것도 5품관 이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차 관료로의 진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국자학·태학에의 입학도 5품관 이상의 자손에게 한정하는 등 5품과 6품 사이에는 커다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처럼 5품관 이상의 고위관료가 되어야 여러 가지 귀족적 특권을 부여받게 되고, 이 특권적 지위를 세습적으로 이어 나가 代를 거듭하게 됨에 따라서 하나의 가문을 형성, 귀족으로 행세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 5품 이상 귀족관료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官途에의 첫 출발은 아주 하위의 官位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저들이 아직 6품 이하의 관 직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고려의 귀족도 관직귀족이었던 점에서 이러한 미묘한 문제가 있지마는, 그래도 역시 저들은 귀족으로 파악해야 하리라 판단된다. 저들은 출생과 동시에 귀족적 신분을 부여받은 셈이며 현재 그 특권의 혜택을 누리고 있고 또 장차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귀족적 특권을 향유할 수 있는 지위를 약속받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의 지배신분층 중에서 이와 같은 귀족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가문은 얼마 안되는 소수에 불과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료로서의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14)朴龍雲, 앞의 책(1980), 310∼312쪽.

다음으로 귀족이나 가문과 같은 의식의 형성에 소요되는 시간의 경과에 대한 문제인데, 대체적으로 3세대는 지나야 하지 않았을까 보고 있다. 아마 어느 하급관료가 특별한 공로로 인하여 귀족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그 지위가 당대로 끝나고 말았을 때 우리는 그의 집안을 귀족가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같은 의식의 형성에는「역사의 퇴적」이 필요하였거니와,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3세대 정도는 경과해야 하지 않았을까 인식되고 있으며, 고려시대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415)朴龍雲, 위의 책, 312∼313쪽.

위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즉, 귀족은 특권적 신분층에서 출생하 여 또다시 그 지위를 자손에게 세습시키는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3세 대를 거치는 동안 하나의 門地를 세우게 되면 귀족가문으로서 여타의 지배신분층과도 구별되는 家格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들은 그들의 가격에 부응하는 정치적 특권과 경제적 혜택 및 사회적 위세까지도 세습적으로 향유하면서 자기네끼리의 連姻關係를 통하여 하나의 통혼권을 형성하는 특징도 나타내었다. 고려사회에서는 이같은 귀족적인 특성이 5품관 이상의 선에서 뚜렷이 보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성격과 특징을 지닌 귀족층이 대부분의 국가 요직을 점유하고 정책의 결정이나 가치의 배분을 귀족제적으로 운영하여 갈 때 그 사회는 곧 귀족제사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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