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 시련의 극복과 체제의 정비
  • 2) 문종의 체제정비와 전성
  • (4) 불교의 흥성

(4) 불교의 흥성

고려의 숭불과 그에 따른 불교의 생활화는 문종대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왕과 귀족이 정치·경제적으로 불교에 기울어지고 민중은 불교생활에 젖어 들어 오히려 속화의 폐단이 커졌으므로 아래에 보이는 바와 같이 단속령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불교는 여러 가지 특권과 특혜 속에서 義天이나 그의 스승 爛圓과 같이 왕공·귀족자제가 다투어 출가함으로써 승려는 일급귀족이 되고 개경에만도「佛寺七十區」라는 대성황을 이루는 가운데 불교법회가 끊이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興王寺는 문종 10년(1056)에 창건되어 12년 동안 2,800칸에 달하는 巨刹로 발전하였다. 성을 두르고 금탑을 쌓은 이 문종의 원찰은 지금 터만 확인되고 있지만 그 화려함이나 법회의 성황 등이 전고에 유례가 드문 것이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문종 때에 갖가지 불교의식의 절차가 정해지고479)洪潤植,≪韓國佛敎思想史硏究≫(圓光大, 1975). 거란, 송 등과 佛典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에 흥왕사에서는의천의 속장경과 같은 경판 사업도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왕공·귀족불교의 전성과 더불어 문종의 왕자가 셋이나 출가하였으며 이는 손자대에로 이어져 의천 외에 道生·圓明 등 왕자손·小君 고승이 나왔다. 이리하여 문종대만도 圓融·慧炤·智光 등 국사가 배출되었다.

문종의 넷째 아들 大覺國師 의천이 天台宗을 개창하고 속장경을 간행한 사상사·문화사상의 위대한 업적은 따로 상론될 것이므로480)≪한국사≫16,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국사편찬위원회, 1994 간행예정) 참조. 간단히 언급하는데 그치려 하거니와, 왕자로 송나라에 유학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준비성과 열정, 그에 따라 단시일에 얻어 낸 성과 등은 후세에 길이 모범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부왕이 창건한 흥왕사에서 천태종을 강론하여 불교의 일대 혁신을 기하고 이어 敎藏都監을 두어≪新編諸宗敎藏總錄≫을 공들여 만들고 마침내 麗·宋·遼·日의 당대 불교 총결집인 속장경을 간행한 문화·사상사상의 기여는 만고에 빛나는 업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신라승 元曉를 비롯한 20여 명의 대찬술을 모아 그 높은 경지를 재발견 정립하여 대승불교사상 龍樹·馬鳴과 맞겨루게 한 공로481)≪大覺國師文集≫권 20, 續海東敎迹.
高翊晉,≪韓國古代佛敎思想史≫(東國大出版部, 1989) 참조.
는 필설을 넘어선 위업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신라와 그 문화에 대한 재발견·재창조 노력은 고려문화가 최고경지에 도달했던 것을 반영한 예가 된다고 보겠다.

또 불교를 중심으로 한 문적 교류도 볼만하였다. 문종대를 전후한 송과의 교류는 특히 두드러지거니와 의천의 노력이 가세하여 불전의 수입과 수출은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문종 37년(1083)에 송의 대장경이 들어 왔고 그 후에도 많이 전래되었는데 신라 때 들여 왔던 智儼·賢首 등의 화엄학 책은 송에 역수출되기도 하였다. 거란과의 불교 교류는 더욱 뜻깊은 의미가 있었다. 거란대장경은 이미 문종 전기에 해당하는 道宗의 淸寧年間(1055∼1064)에 완성되자마자 문종 17년(1063)과 26년(1072)에 고려에 들어 왔으며 속장경에는 거란 불경이 많이 들어 있어 본고장에는 없어진 것이 고려대장경에만 전해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의천과 제자 守其 등의 진력으로 원효의 經疏가 요에 전해져 왕의 애독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전 교류는 여·일 간에도 행해져 문종 때 일본승 25명이 와서 현물한 사실도 있었으며 의천의 장경 원본이 오늘날에도 그곳에 전하고 있는 것482)義天日錄을 비롯 몇 권의 殘本이 전하고 있다. 국내에는 松廣寺에 국보로 지정된 5책 등이 알려져 있다.은 당시의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가 이처럼 안팎으로 퍼지면서 문종 13년(1059)에는 한 집에 3子 중 1子는 15세 때 승려가 되도록 허락하는 법이 제정되고 僧科 및 왕사·국사제도도 행하게 되었으며 각종 법회의 성행은 유난스러웠다. 보살계 도량은 문종 때 5회 거행된 것을 비롯하여 왕의 정례적 受戒 행사가 되었으며 여러 가지 명목의 祈福·消災道場이 성행하였다. 특히 仁王經을 내세운 도량과 갖가지 經行은 왕실이 매우 즐겨하던 것으로 그 규모와 빈도가 대단하였거니와, 이 때 몇천 몇만 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베푼 飯僧 행사는 고려불교의 특이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거국적 행사는 연등회나 팔관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483)주 37) 참조.

한편 이처럼 불교가 크게 장려되고 생활화함에 따라 폐단이 생기고 단속령이 나오기도 하였다. 벌써 문종 10년(1056)에 “절간은 떠들썩하고 불교행사에는 더러운 냄새가 풍기며 중이 속민과 어울려 가축을 기르고 밥장사를 하면서 놀아나고 행패를 부리니 엄하게 다스리라”는 사례484)≪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10년 9월 병신.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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