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 시련의 극복과 체제의 정비
  • 2) 문종의 체제정비와 전성
  • (5) 유교와 사학 및 도서출판

(5) 유교와 사학 및 도서출판

고려의 유교주의 정치는 이미 성종 때부터 기틀을 마련했으며 11세기에 거란의 침입이 수습되고 문종대 같은 태평세월이 열리면서 문운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문종의 문치 장학과 최충의 사학교육은 특히 큰 계기가 되었다.

원래 고려시대의 유교와 불교는 오랫동안 서로 보완의 관계를 유지하여 양쪽을 똑같이 중시하고 겸하는 학풍이 흔하였다. 최승로·채충순·의천이 다 그런 이들이었지만 성종 때의 학술진흥이나 광종 이후의 과거제 실시 등으로 점차 유교를 많이 공부하게 되어 문종대에 이르면 최충 부자나 鄭倍傑 등 훌륭한 유자가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시가와 문장에 힘쓴 이들이 과거의 고시관(知貢擧)을 지내면서 자연 明經科보다 製述科를 중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최충에 의한 사학교육의 시작과 계속적인 흥성은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에 새 물꼬를 트게 되었다. 최충은 벼슬을 마친 다음 자기 집에 사학을 열었는데 학도가 운집하자 九齋學堂을 마련하니(문종 9년:1055) 이는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시초를 이룬 것이다. 이 사숙이 부진한 관학을 압도하고 대성황을 이루게 되자 개경에만도 11개의 유명한 사학이 설립되어 세칭 12徒私學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중 시중 崔公徒(뒤에 文憲公徒)가 가장 명성을 떨쳤는데 여기에서는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만이 아니라 道學의 중추가 되는≪中庸≫에 주목하여 도의 연마 등 실천윤리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海東孔子 최충의 영예로운 이름은 累代儒宗으로 대를 물려 가며 학벌귀족485)朴性鳳,<國子監과 私學>(≪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5).
朴贊洙,≪고려교육제도사연구≫(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2).
의 본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추세에 자극된 듯 문종 17년(1063)에 국자감 격려와 직제 강화가 있었다. 즉 학관의 책임을 논하고 학도의 성적에 따라 진퇴를 정하라는 규제가 내려지고 관계 교관의 직품이 제정되었다.486)≪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문종 17년. 그러나 다음대에 국자감의 정폐론까지 나온 것을 보면 별 진전이 없었던 듯하다.

이처럼 문종 때까지 관학이나 과거제의 정비는 미진한 점도 있었으나 인쇄술의 발달 등 전반적인 문화 기운은 종래의 침체를 넘어선 듯하다. 원래 목판 인쇄술은 신라이래 계속 발전되어 온 것이지만 불교·유교서와 의서 등의 수요가 늘고 특히 대장경 등의 대규모 사업과 宋板本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여 정종대부터 經史관계 간행사업이 활발하였다. 문종 10년(1056)에는 서경의 주청으로 秘閣 소장 경사자집류 여러 책을 각각 하나씩 인출하여487)독일 Mainz에 있는 Gutenberg박물관은 고려의 인쇄문화를 중시하여 거론하면서도 이러한 소량 인쇄의 특성을 일러 ‘steel stamp’라고 평가하고 있다.서경학원에 간직토록 하였으며 또 전국 중요 지방관원들이 의약서와 경사서를 새로 조판하여 비각에 보내 왔다.

이와 같은 도서의 교류는 중앙·지방간만이 아니라 송·일 등 국제간에도 확대되었으니 이는 사학 발달 등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문풍의 향상과 확산의 추세가 그만큼 커진 것을 뜻한다. 의약서가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물론 문종의 병약치료와 직접 관련된 것이지만 이러한 학술의 발달과 교류는 다음대로 계속 이어져 갔다. 무엇보다 당시의 古印本이 오늘날까지 국내외 도서관 등에 전해 온 것은488)종래 일본에만 전한 것으로 알려진 초판 대장경 판본이 최근 국내에서도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런 실정을 잘 나타낸 것이다. 이 무렵 지필묵의 발달도 촉진되어 고려의 출판인쇄 문화는 송나라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수준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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