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 시련의 극복과 체제의 정비
  • 2) 문종의 체제정비와 전성
  • (7) 대외문물 교류

(7) 대외문물 교류

여송국교는 요와의 얽힘 때문에 반세기 이상 단절된 상태에 있었으나 문종 연간에 들어 다시 정식으로 열리게 되었다. 즉 문종 25년(1071) 金悌 등을 송에 보내어 국교를 재개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親宋 준비는 이미 문종 12년(1058)부터 큰배를 건조하는 등 착실히 추진되고 있었다. 재신들이 반대하여 처음에는 국교가 지연되었으나 앞서부터 송이 고려에 환심을 사는 방책을 세우고 22년(1068)에는 정식으로 통교를 제의해 와서 이 때 성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요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왕 28년(1074) 金良鑑 등을 보내면서 종래의 동쪽 길, 즉 登州 등 산동반도를 경유하지 않는 남쪽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이에 충청·전라 연안을 끼고 곧바로 남행하여 明州에 배를 대고 송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문종대를 전후한 여송 양국간의 공사간 무역 거래는 특히 볼만한 것이 있었다. 대표적인 공무역의 예로 문종 32년(1078) 朱使가 가져 온 예물을 보면 막대한 옷가지·구슬류·비단·차·악기 등이 있지만 따로 公的·私的으로 서적과 약재 등이 엄청나게 수입되었다. 즉, 대장경 등 불서를 비롯 유가·도가 및 제자백가서 등이 많이 들어와491)이런 과정에서 蘇軾이 두 번이나 고려 사신들의 책 구입을 막으라고 上奏했던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후대에 소문난 愛書愛藏의 나라가 되고 송에 역수출되기도 하였다. 또 약재의 대량수입은 문종 33년(1079)의 한 예만 보아도 100종을 넘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풍환자이던 문종 자신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지만 여송간 문물교류의 밀접함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수입과 짝하여 수출도 활발하였다. 문종 25년(1071)과 34년(1080)의 조공무역품의 예를 보면 역시 옷가지·비단·금은의 사치품과 종이·먹 등이며 이 밖에 부채·자개·붓·화문석 등이 송나라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여송간의 公私 사행과 상인 왕래는 역대 어느 왕조들보다 활발한 편이었고 그 중 문종대가 고려 일대를 통해서도 가장 성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가운데 唐樂이 문종 27년(1073) 2월에 들어와 연주되었다거나 송의 저명인사가 많이 귀화한 것도 인상적인 사실이다. 현종대의 周佇는 우선 두고라도 문종 때의 張琬·盧寅 등 6·7인이 유명하며 다음 예종·인종 때에는 胡宗旦·林完 같은 명사까지 들어와 고려 문운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처럼 여송관계가 매우 돈독하게 되니 여러 사신을 위한 客館이 설치되었고, 문종 9년(1055)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몇 십 몇 백 명이 어울리는 큰 잔치가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또 禮成江口는 국제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여 송의 상인 외에 일본 상인·대식국 상인까지 많이 내왕하였다.

한편, 북방민족과는 직접 국경을 접한 관계로 분규가 많은 편이었으나 문물교류 또한 활발하였다. 요와는 문종 연간 내내 弓口門(경계문) 설치(동왕 8∼9년:1054∼5), 賣買院(무역소) 제의(동왕 16년:1062), 探守院(정찰소) 설치 등으로 긴장관계가 이어졌고 문종 29년(1075)부터는 地界審定 문제로 사신이 왔다 갔다 하였다. 이후 互市場인 榷場 설치문제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소위 夾帶무역 등 밀무역을 하면서까지 교역이 계속되고 앞에서 서술한 불교 교류는 영향과 성과가 자못 컸다.

또, 여진과는 현종 이래 많은 교류가 있어 오다가 문종 때부터는 한층 긴밀한 관계가 맺어졌다. 즉, 그들의 歸附가 더욱 잦아 문종 27년(1073)에는 귀순 주인 羈縻州를 넘어선 본연의 군현화 논의까지 나왔다. 그리하여 이 해에 여진 장수와 합세하여 북청 三山村의 蕃賊을 친 적도 있고 동서 여진의 來附者가 너무 많아져 문종 35년(1081)에는 赴京 통제규정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여진이 금나라로 발전하면서 尹瓘의 원정 등 전쟁상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고려를 부모의 나라, 상국으로 받들어 그들의 건국시조가 고려인이라는 설화492)≪金史≫권 135, 列傳 73, 外國 下, 高麗.도 전하고 있음을 보면 양국간의 긴밀도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일본과는 일찍부터 來投者가 많고 또는 생포자의 송환문제도 생겨 피차의 교섭이 빈번하였다. 문종 10년(1056)에는 日本國使가 오고 동 27년(1073)에는壹岐島 句當官이 사람을 보내 와서 방물을 헌납하기도 하였다.493)森克己,<日麗交涉と刀伊賊の來寇>(≪朝鮮學報≫37·38, 1966), 105쪽.
≪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추7월 병오.
또 같은 해와 그 이듬해에도 일인 수십 인이 토산물을 바치고 하사물을 받아 가는 등 문종 연간의 왕래는 매우 활발하였다. 특히 표류민 관계로도 문종대 내내 접촉이 많았는데 전반적으로 일본이 적극적인데 비해 고려는 피동적이었다.494)金庠基,<해상의 활동과 문물의 교류>(≪東方史論叢≫, 서울大出版部, 1974).
羅鍾宇,<高麗前期의 麗·日貿易>(≪圓光史學≫1, 1981).
또 宋醫가 옴에 따라 日醫生의 초청 교섭도 있었으며 일본 상인과 함께 남방물산도 들어 왔다.

이상과 같이 고려사상 11세기는 귀족사회가 무르익어 간 흥륭기·전성기라 할 만하였다. 처음에는 큰 국난으로 시련을 겪기도 하였지만 관민이 뜻을 합쳐 이를 극복하고, 특히 문종 전후 반세기는 왕의 노력이 가세하여 태평세월이 오래 지속되고 문물제도가 각 방면으로 다듬어지며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음서제·공음전시법·연줄 혼인관계 등등에 의해 귀족사회가 성숙되면서 폐단이 나타나 다음대에는 척족의 발호 난동까지 보기에 이르렀다. 송나라 徐극競은 이 무렵 정황을 보고 고려인이 명망있는 가문을 숭상하여 國相은 훈신·척신이 독점했던 사실을≪高麗圖經≫에 남겼거니와 문신귀족 편중적 문운의 제도와 운영은 그 후 더욱 굳어져 무신집권기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朴性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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