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 1) 이자의의 난과 숙종의 즉위
  • (3) 왕권강화 정책과 그 의의

(3) 왕권강화 정책과 그 의의

숙종은 즉위하던 그 날 元信宮主와 그 아들들인 한산후 형제를 慶源郡으로 유배시키고,538)≪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즉위년 10월 경오. 소태보를 守太尉 門下待中으로 하는 등의 중앙정계 개편을 단행하였다.539)≪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즉위년 10월 무인. 이후 그는 재위기간 동안 외척의 발호에 의하여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 즉 태자 지위의 강화·義天에 의한 天台宗 개창의 지원·南京 경영·鑄錢政策의 실시·別武班 창설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왕권강화 정책에 대하여 아래에서 순서대로 살펴 본 다음 그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숙종은 문종대 이후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어 온 인주 이씨를 중앙 정계에서 배제하였다. 이는 숙종의 재위 동안 중앙정계에서 활약하였던 인물들로는 李䫨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계림공 시절 혼인하였던 貞州柳氏 柳洪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였을 뿐540)정주 유씨에 대해서는 李樹健,<高麗時代 土姓硏究>上(≪亞細亞學報≫12, 1976, 71∼72쪽;≪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참조. 역대 왕들처럼 여러 명의 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유홍의 정주 유씨가≪宋史≫에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성씨집단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지만541)≪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숙종 당대에는 외척으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이는 유홍과 그의 아들 柳仁著의 숙종 당대의 활동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유홍은 문종 25년 給事中·左承宣이 된 이후 中樞院使·參知政事를 거쳐 선 종 7년 2월 門下待郎平章事에 이르렀으나, 동왕 8년 11월 죽었으므로 숙종 재위 시기 동안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유인저도 숙종 다음의 예종대예 蔭職을 제수받아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동왕 3년 예부시에 급제, 8년 참지정사로 죽었기 때문에542)≪高麗史≫권 97, 列傳 10, 柳仁著. 숙종대 그가 외척으로서 발호한 흔적은 없다. 이와 같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외척이 존재하지 않았던 점은 숙종이 왕권강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왕위 계승권자인 태자의 지위 강화와 관련된 조치 즉 詹事府의 강화이다. 첨사부는 현종 13년(1022) 장자 延慶君 欽을 왕태자로 책봉하면서 설치된 것이었으나,543)≪高麗史節要≫권 3, 현종 13년 5월. 하나의 완전한 기구로 기능한 것은 아니었다. 첨사부의 관원은 현종 당시 師·保 및 司議郞 1인·司直 1인·通事 2인과 丞·注簿·錄事 각 1인으로 구성되었으며,544)≪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東宮官. 문종 8년에는 3품관 이상의 손·5품관 이상의 아들 20인을 선발하여 東宮侍衛公子로, 5품관 이상의 손·7품관 이상의 아들 10인을 侍衛給事로 하였다. 그리고 동왕 22년 첨사부 관원의 증원과 품계의 확정 및 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졌으나545)위와 같음. 이 규정대로 임명된 예는 숙종대까지 찾아 볼 수 없다.

숙종은 3년(1098) 3월 “과인이 망녕되이 凉德으로서 태자를 두었으니 마땅히 震位에 올릴 것이므로 유사에 특명하여 태자첨사부·左春坊·延慶宮司 등의 관부를 갖추고 臣僕과 식읍을 모두 이에 예속케 하라”546)≪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3년 3월 계해. 하여 첨사부·좌춘방·연경궁사 등의 관부를 갖추고 문종 22년의 규정에 의거하여 동궁관원을 임명하였다. 이러한 숙종의 조치는 선종 사후 헌종대 약화된 왕권의 실체를 체험하였던 그로서는 태자에게 보다 안정되게 왕권을 물려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547)南仁國, 앞의 글, 137쪽.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첨사부 소속의 관원으로는 소태보·황유현·黃瑩과 같이 숙종 즉위에 공로가 있었던 인물, 당시 중앙정계의 요직에 있었던 金上琦·崔思諏 그리고 尹瓘·文翼·魏繼廷 등 새로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던 인물들이 임명되었는데 이로써도 위에서 언급하였던 숙종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첨사부의 조직을 정비하고 나서 숙종은 5년 1월에 왕자 俁를 왕태자로 책봉하였으며,548)≪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5년 1월 을미. 첨사부와 춘방 소속관원에 대해서 2등급씩 加資하여549)≪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5년 2월 을사. 태자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중앙정계의 개편, 왕위 계승권자인 태자의 지위 확립 등의 조치를 취한 다음 이자의의 난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사면조치를 단행하여,550)≪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6년 2월 임자. 이완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대장군 高文盖·張洪占·李弓濟와 장군 金子珍 등의 변란551)≪高麗史≫권 96, 列傳 9, 崔思諏.을 사전에 진압함으로써 더욱 왕권강화에 진력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의천에 의한 천태종의 개창 역시 왕권 강화의 한 측면을 지닌 것이었다.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불교계의 동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52)蔡尙植,<修禪結社 成立의 社會的 基盤>(≪高麗後期佛敎史硏究≫, 一潮閣, 1991), 34∼35쪽. 고려사회는 11세기 이후 현종·문종대를 지나면서 집권적 귀족사회의 골격을 갖추고 차츰 문벌귀족층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고려사회는 문벌귀족에 의해 장악되고 불교계도 이들의 영향력 속에서 좌우되는 실정이었다. 당시의 사정은 문벌귀족들이 개경을 중심으로 많은 願堂을 건립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사원 자체를 장악한다든가 심지어 그들의 자제를 대대로 출가시켜 교단 자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553)許興植,<佛敎와 融合된 社會構造>(≪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참조.

당시 문벌귀족과 결탁되었던 대표적인 교단은 왕실과 연결되었던 화엄종과 경원 이씨세력과 연결된 법상종이었다. 이는 현종대 이후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정비되고 그 지배체제의 운영 주도세력인 문벌귀족이 대두하면서 보수적인 귀족불교의 성격인 법상종이 융성하고, 중앙집권화라는 정치적 배경으로 고려초기 이래 성장한 화엄종의 지속554)崔炳憲, 앞의 글, 참조.이라는 이해에 근거한다.555)崔柄憲,<天台宗의 成立>(≪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7), 81쪽에서 화엄종과 법상종의 공통점과 차이점 및 민중불교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화엄종이나 법상종은 법성종과 법상종이라는 교리 면에서의 기본적인 차이가 있어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었지만, 양자 모두 중앙집권 체제의 안정한 운영만을 위주로 하여 기성집단 세력의 유지만을 도모하는 왕실이나 외척세력 및 그와 연결된 문신귀족 등의 지배세력과 지나치게 밀착됨으로 말미암아 일반 민중불교와는 유리도가 심해졌다. 반면에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대다수의 농민·천민층은 특정 종파세력과는 괴리된 채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결성하여, 정토신앙·공덕신앙을 기반으로 한 사원의 소규모 造塔·鑄鐘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팔관회·연등회 등과 같은 불교와 전통신앙이 결합하고 있는 형태의 신앙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문벌귀족에 의해 장악된 불교교단이 보수적 경향을 띠게 되었을 때 의천이 출현하여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에 대한 개혁, 나아가 왕실의 가장 암적인 존재인 문벌귀족 체제에 대하여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의천의 불교계에 대한 개혁의도와 숙종의 왕권강화 정책이 연결되어 숙종의 강력한 지원하에, 선종대에 착수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지 못하였던556)선종대 국청사의 공사와 관련된 정치세력과 사원세력 간의 갈등은 金光植, 앞의 글, 121∼127쪽 참조. 國淸寺가 준공되고 국가권력이 개재된 상황에서 선종 승려들의 참여 속에 천태종은 개창되었다.557)許興植 앞의 책, 287쪽. 그러나 의천의 노력은 본질적으로 문벌귀족 체제와 동일한 기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와 불교계에 대해 전반적인 개혁의 방향으로 안목을 돌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사회, 즉 기층사회에서 널리 유행하던 신앙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지적558)蔡柄植, 앞의 책, 35쪽.되기도 하였다.

숙종은 대각국사 의천의 “用錢을 시행하면 교환과 운반에 편리하고, 米·布에서 파생되는 수취 및 교환의 부정을 방지할 수 있고, 녹미의 독촉으로 피해를 입는 가난한 사람을 보호할 수 있으며, 미곡의 저축으로 인하여 흉년에 대비할 수 있다”559)≪大覺國師文集≫권 12, 鑄錢建議上訴.는 주전건의 상소에 따라 동왕 2년(1097) 12월 아래의 교서로서 화폐유통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옛부터 우리나라의 풍속은 소박하고 간략하였는데, 문종대에 이르러 문물과 예악이 융성해졌다. 짐이 선왕의 유업을 이어 받아 장차 민간의 큰 이익되는 일을 일으키려고 하니 鑄錢官을 세우고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통용케 하도록 할 것이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이후 화폐유통의 여건이 마련됨에 따라 6년 4월 주전도감에서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화폐를 사용하는 이점과 그 편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 사실을 종묘에 고하도록 하소서”560)≪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하였고, 같은 해 銀甁을 만들어 화폐로 사용하였다. 7년 12월에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데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서북 양국에서는 이를 시행한 지 오래되었으나 우리 동방만은 아직 행하지 못하였다가 오늘날 비로소 鼓鑄(쇠를 녹여 돈 만드는 것)의 법을 만들었다. 그 주조한 돈 1만 5천관을 재추·문무양반·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화폐통용의 시초로 삼게 하라“561)위와 같음.하였으며, 이때 화폐의 명칭은 海東通寶라고 하였다.

이어서 “처음으로 용전함을 태묘에 고하고 즉시 京城에 左右酒務를 설치하고, 거리의 양쪽에는 신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각각 점포를 두어 화폐사용의 이익을 크게 거두도록 할 것이다”562)위와 같음.라고 하였다. 그러나 화폐를 유통시킨지 3 년이 되었지만 백성들이 가난하여 활발하게 통용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9년 7월 다시 官錢을 내려 주고, 주현에 명령하여 미곡을 내어 酒食店을 열게 하고, 백성들에게 사고 파는 것을 허락하여 화폐의 유리성을 알도록 하였다.563)≪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권 12, 世家 12, 숙종 9년 7월 신축.

위와 같은 숙종대의 화폐 유통정책은 의천과 윤관 등의 건의와 郭尙 등의 반대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다.564)≪高麗史≫권 97, 列傳 10, 郭尙, 숙종대의 주전정책과 관련하여 의천의 주전건의는 “의천이 화폐 사용을 열렬히 주장한 것도 당시 송과의 무역의 발달과 그의 탁월한 식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금융의 수준이 높았고 이를 이용할 필요성에서 주장되지 않았을까 한다”565)許興植, 앞의 책, 10∼11쪽.는 사원경제적인 면에서의 언급도 있지만, 이와 관련된 연구에서는 대체로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성종대나 숙종대의 화폐 유통책은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력 강화와 국가재정 확보라는 정치적·재정적인 필요성에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왕권강화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경경영에 필요한 재정적 뒷받침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군사력 강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566)蔡雄錫,<高麗前期 貨幣流通의 基盤>(≪韓國文化≫9, 서울대 韓國文化硏究所, 1988), 90∼94쪽.나 12세기 고려사회의 내적인 성장과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왕실의 회복·왕권강화를 추구하기 위해 시도된 국가적 비상사태 하의 국가상업의 이익을 장악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구현된 것567)金光植, 앞의 글, 132∼146쪽.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그 예이다.

숙종대의 남경경영도 지리도참사상을 이용한 왕권강화 정책의 하나였다. 숙종 1년 7월 金謂磾의 남경건설을 주장하는 상소568)≪高麗史節要≫권 6, 숙종 1년 7월.로 시작된 남경경영은 柳伸·庾祿崇 등 소수의 반대도 있었지만, 재상과 하위관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배경으로569)≪高麗史≫권 95, 列傳 8, 柳伸 “國家欲移都南京 宰相及庶僚 皆以爲可 伸與左散騎常侍庾祿崇 獨言其不可.” 이 내용을 숙종대의 것으로 이해함은, 이병도, 앞의 책 참조. 동왕 4년 9월 宰臣과 日官으로 하여금 楊州에 남경을 건설하는 것을 의논케 하였으며, 곧 이어 왕비·원자·양부 관료들이 대각국사와 함께 양주에 행차하였다.570)≪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4년 9월 정묘·윤 9월 을해. 이후 6년 9월에는 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고 최사추·윤관·任懿 등을 파견하여 터를 잡게 하였으며,571)≪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6년 9월 정묘. 다음달에는 남경이 창건되자 이를 종묘·사직·산천에 고하였다.572)≪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6년 10월 병신. 9년 5월 남경에 궁궐이 완성되고,573)≪高麗史≫권 12, 世家 12, 숙종 9년 5월. 7월 남경에 행차함으로써574)≪高麗史≫권 12, 世家 12, 숙종 9년 7월 무술. 남경경영은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숙종의 남경경영은 그의 주전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주전론자의 대표자격이며 숙종의 측근으로 왕권강화를 돕고 있던 대각국사와 윤관이 남경 창선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근거로 한다. 숙종의 남경경영과 관련된 최근의 연구에서는 남경 설치의 이유를 “즉위시 인주 이씨세력과의 대결을 위해 서경계통 사람들의 힘을 빌었으나, 다시 이들의 견제를 위하여 남경을 설치하여 양자간의 균형을 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왕 자신의 독자적 세력이 미약하고 귀족세력이 강할 때 귀족간 균형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일종의 미봉책 내지는 과도적 형태라 볼 수 있겠다”575)權純馨,<高麗中期 南京에 대한 一考察>(≪鄕土서울≫49, 서울市史編纂委員會, 1989), 16쪽.라고 하여 남경경영을 정치세력의 재편과 관련지워 이해하기도 하였다.

숙종 9년부터 고려와 여진의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었는데, 林幹과 윤관의 정벌이 실패한 이후 그 패인을「敵騎我步」에서 찾은 윤관의 건의에 의해 9년 12월 別武班이 설치되었다.576)≪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및 권 81, 志 35, 兵 1, 兵制.
李基白,<高麗別武班考>(≪金載元回甲紀念論叢≫, 1969).
金塘澤,<別武班의 設置와 軍制의 變化>(≪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참조.
별무반은 약 17만 명 수준이었다고 전하는데, “문무 산관·서리로부터 상인·노복·승려 및 주·부·군·현”577)≪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숙종 9년 12월.에 이르기까지 그 구성이 광범위하였다. 고려시대의 군인들은 피복·무기 등을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578)李基白,<高麗州縣軍考>(≪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214∼216쪽. 그러나 17만 명 수준이었다고 전해지는 별무반에게 제공되는 전투시의 군량 등 군수물자의 비용은 막대하였을 것이므로 이러한 국가적인 막대한 재정 보충의 필요성이 왕권강화의 기본구도와 연계되면서 주전정책이 전개되었다고 하는 견해579)金光植, 앞의 글, 142∼143쪽.도 있고, 별무반의 설치가 윤관이라는 숙종 측근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본관체제가 이완되면서「無賴」·「豪俠」의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징병이 실시되면 사회적 통제효과를 가져오고 그러한「無賴豪俠之徒」를 제도권내에 편제하는 효과도 있어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집권력의 강화를 가져 왔을 것이다580)蔡雄錫, 앞의 글, 93쪽.라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숙종의 별무반 설치를 왕권강화 정책의 하나로 파악하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581)별무반의 설치를 왕권강화책과는 달리 군사제도적 측면에서 분석한 李基白은 “별무반의 주 구성원은 토지경작자인 농민(白丁)이며, 이들은 州鎭軍의 일정한 군사 조직 속에 편입되어 전투부대의 주력이 아닌 예비병력에 지나지 않았지만 별무반으로 강제 징발되어 전투부대로 나타난 것은 군역을 세습하는 軍班氏族의 몰락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그 배경으로 한다” 하였으며(앞의 글, 49쪽), 金塘澤은 이기백의 견해를 근거로 하면서 “군반씨족의 와해로 인한 국방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이해하였다(앞의 글, 249쪽).

숙종대에 행해진 왕권강화 정책, 즉 태자 지위의 강화·천태종 개창의 지 원·주전정책의 실시·남경경영·별무반의 설치 등은 정치·경제·사상 등 모든 부분에 걸쳐 행하여졌다. 이러한 정책들이 지니는 의의는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지향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의 계승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82)南仁國, 앞의 글, 141쪽. 숙종의 왕권강화 정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빚어진 문제점 또한 적지 않았는데, 그것은 예종 1년 양부·대간 등에 의해 제기되었던 封事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