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 2) 귀족사회 내의 갈등과 이자겸의 난
  • (2) 인종의 즉위와 이자겸의 난

(2) 인종의 즉위와 이자겸의 난

인종의 즉위 이후 정치 지배세력 내부에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현실화한 것은 인종 즉위년(1122) 12월에 이자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한안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을 제거한 일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는 다음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왕(예종)이 죽자 태자는 어리고 여러 왕제들이 왕위를 넘보았는데, 이자겸이 태자를 받들어 즉위케 하니 이가 인종이다. …자겸의 권세가 날로 성하여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는 온갖 꾀로 중상하였다. 왕제 帶方公 俌는 京山府로 유배하고, 平章事 韓安仁은 해도로 귀양을 보냈다가 죽였으며, 崔弘宰·文公美·李永·鄭克永 등 50여 인은 귀양보냈다(≪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임인년 4월 俁(예종)가 죽자 여러 아우들이 왕위를 다투었다. 숙종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우가 장남이었다. 자겸이 이미 인종을 즉위시켰는데 작은 아버지 대방공 보가 왕위를 찬탈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 마침내 문하시랑평장사 한교여(안인의 초명), 추밀사 문공미와 더불어 계획을 세우고 이에 예부상서 이영·이부시랑 정극영·병부시랑 임존 등 십여 인이 내응하였으나, 일을 치르기도 전에 누설되어 곧 체포되었다. 자겸이 곧 왕에게 간하여 보는 해도에 유배하고 群惡은 죽이고 支黨으로 체포된 자가 수백 인이었다(≪高麗圖經≫권 8, 人物, 守太師尙書令 李資謙).

이 사건에 대하여 관련자들의 출신 배경을 근거로 누대 문벌귀족 대 신진관료 세력의 분열·대립으로 보았거나624)金潤坤, 앞의 글, 40∼50쪽. 예종 사후 지나치게 세력이 강대해진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한안인 세력의 도전에서 비롯된 것으로,625)Edward J. Shultz, 앞의 글, 163쪽.또는 예종대 이래 외척 내지 문벌들의 부당한 정치 간여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 온 유신들을 제압하고자 가장 대립의 형세를 취해 온 한안인·문공미 등을 이자겸 세력이 전격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것626)朴性鳳, 앞의 글, 163쪽. 등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이자겸 및 그 일파의 문벌귀족 세력이 그들에게 도전해 오는 지방출신의 신진관료 세력을 제거·추방하려는 정치적 책동으로,627)姜晋哲,<개요>(≪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7), 2쪽. 또 다른 경우 이자겸 일파와 한안인 일파는 예종대에서 인종대에 걸친 시기의 고려조정의 대표적인 세력들로서 전자는 이른바 문벌귀족이라고 하는 대귀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후자는 중소귀족 내지는 신진세력에 속하는 부류라고 규정한 다음 이들 두 세력의 대립에 기인한 것으로628)盧明鎬, 앞의 글, 169쪽. 해석하기도 한다.

반면에 이 사건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629)金庠基, 앞의 책, 339∼340쪽.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인종의 추대를 추진하였던 이자겸을 대표로 하는

세력과 보다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지향하면서 대방공 보를 추대하려던 한안인을 대표로 하는 세력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전개된 갈등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630)南仁國,<高麗 仁宗代 政治支配勢力의 成分과 動向>(≪歷史敎育論集≫15, 1990), 81∼82쪽. 후자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존재는 아래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예종이 즉위하자 侍學한 舊恩으로써 왕과 친밀하여 권세를 부렸고, 왕의 은총이 점점 더함에 형제와 인척이 모두 그 연줄로써 중요한 지위를 나누어 차지하였고 사대부 중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 자들이 붙지 않은 자가 없었다(≪高麗史≫권 97, 列傳 10, 韓安仁).

한편 이자겸을 대표로 하는 세력에 의해 유배되거나 파직당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한안인을 昇州의 甘勿島에 유배하였다가 물에 빠뜨려 죽였다. 문공미는 충주에 유배되었다. 韓柱(惟忠의 舊名)는 한안인의 일당이라 하여 靈光郡 松島로 유배하였다. 또 이영과 정극영은 외지에 유배되었다. 한안인의 형 상서우승 安中·아우 僧 永倫·사촌동생 예부낭중 冲·아내의 아우 시어사 林存·사위 합문지후 李仲若·아들 糸貞 등 4인, 문공미의 아우 지후 公裕·僧 可觀·극영 누이의 사위 右正言 崔巨鱗·姻婭(사돈) 원외랑 任元濬, 안중의 아들 綸 등 5인, 이영의 아들 元長 등 3인이 모두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형부에서 또 좌정언 李逢原, 司天監 全幹, 殿直 安天餉 등이 늘 한안인의 집에 모여 반드시 음모에 가담하였을 것이니 그 직을 박탈하자 하였다(≪高麗史≫권 97, 列傳 10, 韓安仁).

한안인과 함께 화를 당하였던 인물들 대부분이 가족관계와 혼인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근거로 이들을 족당세력으로 규정하고, “한안인 일파에 가담한 족당세력은 친족관계가 결코 單系的인 것이 아니고 남녀를 통한 다양한 계보들이 포함되어 있고 촌수로 나타낼 수 있는 親疏 관계의 차이에 의해 원친보다는 근친 간에서 결집되고 있는 양측적 친속관계의 특징을 보여 준다”631)盧明鎬, 앞의 글, 178∼183쪽.라는 견해가 있어 이들의 성격을 이해함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서는 “구성원간의 혼인과 친족적 유대, 개경 정치무대에 새롭게 등장하여 경험이 없는 많은 경기지역 출신자들 사이의 지역적 유대, 비슷한 교육배경과 대간으로서의 활동, 禪宗과의 유대 등에 의한 것”632)Edward J. Shultz, 앞의 글, 148쪽.이라거나 “족당세력의 결집에는 친속관계의 유대와 또 다른 결집요인 즉, 각자의 사상 등에 따른 입장이나 이해관계의 합치도 작용하였을 것”633)盧明鎬, 앞의 글, 195쪽. 그는<高麗時代의 親族組織>(≪國史館論叢≫3, 1989), 115∼116쪽에서 정치적 세력집단의 결집에는 이해관계나 입장의 합치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하여 기왕의 견해를 보완하였다.이라는 등의 견해가 있어 이 시기 정치 지배세력의 결집 계기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위의 사건을 거치면서 이자겸의 정치적 입지는 보다 확고해졌으며, 그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였던 金仁揆·朴昇中·崔弘宰 등을 중심으로 중앙정계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와 아울러 이자겸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최홍재를 제거하여634)≪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巨 1, 崔弘宰 및 앞서 인용한 권 127, 李資謙傳의 내용 중 최홍재가 한안인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에 반발하는 인물들을 중앙 정계로부터 배제하는 한편,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면서 배타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손자인 인종에게 자신의 셋째 딸을 들이어635)≪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외조부이자 장인이란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이중적 신분을 확보하였다.

태자로 책봉되어 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을 경우 그 배우자는 공주 또는 왕실의 여자로 함이 원칙이었는데,636)鄭容淑, 앞의 책, 45쪽. 인종의 혼인은 이를 무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인종의 원칙에서 벗어난 혼인에 대하여, 즉위 당시 14세에 불과하였고 왕위를 둘러싼 불안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이자겸의 도움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혼인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637)鄭容淑, 위의 책, 44쪽.과 인종의 혼인이 왕위 계승과 관련된 사건 이후 이루어졌음과 인종의 혼인 연령이 역대 왕의 그것과 비교하여 일렀던 것을 근거로 보다 강력한 왕권의 옹호세력을 필요로 하였던 인종과 배타적인 권력을 소유하려고 하였던 이자겸의 정치적 목적이 일치함으로써 이루어진 상호 호혜적인 타협책의 결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638)南仁國, 앞의 글, 83∼84쪽.

인종대 초기의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한 이자겸 일인으로의 지나친 권력집중은 예종대 여진정벌 이후 윤관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을 때 당시 정치 지배세력 내부에 반윤관세력의 결집을 초래하였던 것처럼639)南仁國,<高麗 睿宗代 支配勢力의 構成과 動向>(≪歷史敎育論集≫13·14, 1990). 412∼413쪽 참조. 이자겸에 대한 적극적 내지 소극적 반대세력의 성장을 가져 왔다. 반이자겸세력의 존재는 인종 4년(1126) 2월에 있었던 이자겸과 척준경의 제거 움직임과 이자겸의 난의 발생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알 수 있다.

내시지후 金燦·내시녹사 安甫鱗이 동지추밀원사 智祿延, 상장군 崔卓·吳卓, 대장군 權秀, 장군 高碩 등과 더불어 이자겸과 척준경의 제거를 시도하였으나 이를 행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겸과 준경이 병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침입하였다. 임술일에 궁궐은 불타고, 계해일에 왕을 위협하여 남궁으로 옮기고 안보린·최탁·권수·고석 및 숙위하던 좌복야 洪灌 등 17인을 죽였으며, 나머지 군사들도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4년 2월 신유).

자겸은 녹연 및 오탁의 아들 子升, 석의 아우 甫俊을 죽이고, 찬을 먼 지방에 유배하였다. 녹연과 찬의 처와 아들을 몰수하여 노비로 삼았다(≪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이자겸의 전횡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던 인종과 인종의 이자겸에 대한 그와 같은 반응을 인지한 인종의 측근이었던 김찬·안보린 등,640)≪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그리고 이자겸 군사력의 근간이었던 척준경의 전횡에 반발한 상장군 최탁·오탁 등의641)위와 같음. 무신이 연결되어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 이자겸의 난으로 가는 단초였다. 즉 당시 정계의 원로였던 金仁存과 李公壽 등이 “왕이 외가에서 성장하였으므로 그 관계를 끊을 수 없고, 지금은 그들의 당여가 조정에 가득한 만큼 경거망동해서는 아니되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642)≪高麗史節要≫권 9, 인종 4년 2월.고 우려했던 것처럼 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화를 당하였다.

더욱이 이자겸은 김안과 최탁 등에 의하여 화를 당하였던 인물들에게 증직 조치를 취하는 한편 왕의 측근이었던 내시 25인을 축출하여643)≪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일시적이나마 왕권을 무력화시켰고 이로 인해 인종은 이자겸에게 선위의 의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금관계도 정치 지배세력 구성원 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자겸과 척준경은 사대하기로 결정하는644)≪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4년 3월 신유. 등 국가의 중요 정책마저 자의적으로 처리하였다.

이자겸의 난의 개요는 인종 4년 5월 “이자겸이 군사를 보내어 장차 御寢을 범하려 하자 왕이 비밀히 척준경을 회유하여 자겸을 잡아 가두었다”645)≪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4년 5월 을유.와 “이자겸과 처자를 외지에 유배하고 나머지 무리는 원지에 유배하였다”646)≪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4년 5월 병술.란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화를 당한 인물은 다음의 내용과 같다.

이자겸과 처 최씨 및 아들 之允을 靈光에, 之美를 陜州에, 公儀를 珍島에, 之彦을 巨濟에, 之甫를 三陟에, 義莊을 金州에, 之元을 咸從에 유배하였다. 합문지후 朴彪·文仲經, 直長 朴永, 太史令 梁麟, 冬官正 梁獬, 내시 李叔晨·李芬, 대장군 金好, 장군 池顥·池福臣, 낭장 崔思琰, 별장 位好, 散員 宋用中 등 30여 인 및 官私奴 무릇 90여 인을 먼 지역에 유배하였다. …그 親黨 평장사 資德·김인규, 동지추밀원사 金義元·王毅, 예빈경 李資元, 殿中少監 朴孝廉, 지후 李存은 모두 수령으로 내렸다(≪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高麗史節要≫권 9, 인종 4년 5월).

이자겸의 난에서 주목되는 점은 먼저 척준경의 반이자겸화이다. 그는 인종 4년 2월의 사건에서 아들과 아우를 잃었으며, 이자겸과는 사돈 사이였는데, 그가 崔思全의 중재에 의하여 친인종 세력이 되기 전까지는647)≪高麗史≫권 98, 列傳 11, 崔思全. 이자겸의 강력한 군사적 기반이었다. 그러하였던 척준경의 반이자겸화는 김찬·최탁 등의 거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빛어진 ‘射宁位 火宮禁 罪當死’라는 국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관련된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야기되었다.648)≪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南仁國은<高麗 仁宗代 政治支配勢力의 成分과 動向>(≪歷史敎育論集≫15, 1990), 86쪽에서 “이자겸과 척준경은 어디까지나 국왕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이를 독점적으로 운용하려 하였다. 따라서 척준경의 반이자겸화에는 이자겸이 국왕의 존재를 부정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즉 이자겸의 왕위 찬탈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였는데 참고로 제시하여 둔다.

이자겸과 정치적 행동을 같이 하였던 인물의 대강은 위에 제시된 화를 당하였던 인물들의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이자겸과 가족관계 및 혼인관계로 연결되었던 친속집단과649)盧明鎬, 앞의 글, 172∼178쪽 참조. 이자겸이 권세부릴 당시부터 아부하여 자신의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켜 온 박승중·許載·崔湜 등650)≪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巨 1, 朴昇中.과 같은 인물, 그리고 이자겸의 제거세력과는 반대의 입장을 가졌던 尹先·金好 등 군사력의 운용과 관련된 인물, 왕 측근이면서도 이자겸의 입장에 섰던 내시나 宦者 趙寧 및 중·하급관료들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이자겸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집단을 형성하였던 것은, 그들을 결집시킨 요인을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이자겸과 정치적 이해를 같이 하였음에 기인할 것이다. 이는 이자겸의 난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와 관련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자겸의 아들 義莊에 의해서 동원된 불교계 세력 즉 승병집단도 이에 가담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651)≪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謙.
金潤坤,<李資謙의 勢力基盤에 대하여>(≪大丘史學≫10, 1976).
林英正,<麗末鮮初의 私兵>(≪韓國史論≫, 國史編纂委員會, 1981).
李相瑄,<高麗時代의 隨院僧徒에 대한 고찰>(≪崇實史學≫2, 1981) 등 참조.
이에 대하여 완결된 논문은 아니지만, “이자겸의 난은「禁中作亂」제거라는 기치 아래 근왕적 명분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당시 이 난에 가담하였던 隨院僧徒의 활동이「斫神鳳門柱」이후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이들이 내세웠던 대의명분과 실제 사이에 나타난 괴리에 회의를 품고 무력활동을 중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652)秋萬鎬, 앞의 글, 55쪽.는 해석도 있다.

이자겸의 인종폐립 주장은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분석해 볼 때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 바 있지만,653)藤田亮策,<李子淵と其の家系>(≪靑丘學叢≫13·15, 1933·1934).「十八字爲王說」에 근거하여 반왕적인 성격의 것으로 보는 것이 기왕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자겸의 난의 성격이 그러하다면 이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에 대한 사후 조치가 유배나 외직으로의 貶黜에 그쳤던 점으로 미루어 과연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남게 된다. 한편 근왕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자겸에 의해 인종 초년에 정계에서 축출되거나 죽음을 당하였던 인물들의 지향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문점이 역시 남는다. 따라서 이자겸의 난은 당시 정치 지배세력 내부에서 권력의 배타적 장악과 이에 대한 반발에서 빚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자겸에 의하여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인물들 대부분이 이자겸의 축출 이후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하였거니와 이자겸의 난에 연루되었던 인물들도 상당수가 다시 중앙정계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정치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그것으로 인한 새로운 사건발생이 예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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