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1) 고려 초기의 정치제도
  • (3) 고려 초기 정치기구의 변화

(3) 고려 초기 정치기구의 변화

 태조대의 광평성 중심의 정치체제는 성종 초 3성 6부가 성립될 때까지 계 속되었다. 태조 중엽에 새로이 내의성이 설치되고 점차 독립적인 개국공신계 열이 공식기구 안에 편입되는 변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건국 후의 정치체제는 그 골격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그것은 경종 즉위년(975)에 만들어진 김부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김부고서는 고려 초기의 정치기구의 기능과 권력관계를 명백히 표시하는 동시에 또한 그 동안의 정치기구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김부고서는 경종 즉위년에 김부(신라 敬順王)를 尙父에 책봉하는 告身이다.≪高麗史≫에는 김부에게 尙父·都省令의 호를 가하고 功臣號를 내리고 있는데0010)≪高麗史≫권 2, 世家 2, 경종 즉위년 10월.≪三國史記≫에는 이런 冊誥의 主文에 이어 그 시행절차가 실려 있어0011)≪三國遺事≫, 紀異 2, 金傅大王. 당시의 정치기구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여기에는 고서의 시행 절차가 3단계로 되어 있는데 이를 검토해 보면 정치기구 사이의 기능관계를 명백히 이해할 수 있다.

 김부고서의 제1단계는 大匡·內議令·兼摠翰林 臣 融이 宣奉行한 것이고, 제2단계는 시중·내봉령 등 광평성·내봉성·군부·병부의 장관과 차관이 署 또는 無署한 것이며, 제3단계는 郎中·主事 등 吏屬이 완결한 것이다. 원래 당의 고신은 중서성에서 초안을 기초하고 문하성에서 심사하며 상서성에서 집행하는 세 단계의 과정을 밟았는데, 이런 점에서 김부고서는 당의 고신 형식을 취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제로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제1단계로서 고신의 초안을 기초하고 그 내음을 확인하여 상신하는 것은 당에서는 중서성의 장관·차관·판관인 중서령·중서시랑·중서사인이 각각 宣·奉·行하였다. 그러나 김부고서에서는 내의령·겸총한림인 融이 혼자 宣 奉行하여 차이가 있다. 융은 당시의 유신으로 유명한 王融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0012)경종 6년에 제찬한 智谷寺 眞觀禪師碑文에 “大匡·內議令·判摠翰林 王融”이라 하여 왕융임이 증명된다. 이것은 당시 당의 중서성에 해당하는 기능을 내의성이 수행하였 고, 또 중서령·중서시랑·중서사인의 宣·奉·行도 내의령 1인에 의해 수행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정부고서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있어서 당의 중서성의 기능을 내의성이 담당하였다고 보아야 하겠다.

 제2단계인 고신의 심사절차는 고려의 특수성이 보다 잘 나타나 있다. 당제에서는 중서성에서 회부된 고신을 문하성에서 심의하는데, 여기에는 역시 장관·차관·판관인 문하시중·시랑·급사중이 각각 서명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김부고서에서는 광평성·내봉성·군부·병부의 장관과 차관이 서명에 참여하여 그 형식이 전혀 다르다. 실제로≪三國遺事≫에 기록된 김부고서의 서명 내용을 보면 다음<표 2>와 같다.

官 傅 長 官 次 官
廣 評 省 侍 中 署
侍 中 署
侍 郞  署
侍 郞 無署
內 奉 省 令   署 侍 郞 無署
侍 郞  署
軍 部 令   署
令  無署
卿   無署
卿    署
兵 部 令  無署
令   署
卿   無署
卿    署

<표 2>金傅誥書의 署名內容

 여기 보이는 서명자는 광평성·내봉성·근부·병부 등 네 관부의 장관·차관 15명이다. 이들 네 관부는 태조 즉위 직후에 단행된 관직 임명에서 상위관서를 차지한 바로 그 기구들이다. 군부는 처음의 순군부를 개정한 것이다. 이것은 건국 직후의 정치체제가 이 때까지 그대로 계속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들 네 관부의 장관과 차관이 고신을 서명하는 재신의 지위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이 고신을 심사·서명하는 문하성의 기능을 고려 초기에는 광평성·내봉성·군부·병부의 장·차관이 행사하였다는 것은 가장 특이한 점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제3단계인 고신의 집행절차도 당제와 차이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 다. 당제의 고신은 문하성의 서명을 받아 국왕의 「制可」가 내리면 이를 집행 기관인 상서성에 보내서 인사를 관장하는 이부상서·이부시랑·상서좌승의 서명을 받고 그 밑의 실제 문서를 취급하는 이부의 낭중과 주사·영사·서령사 등 하급 서기가 서명함으로써 고신은 완결된다. 그러나 김부고서에서는 집행 과정에서 그저 낭중·주사·서령사·공목 등의 이름만 나와 당제와 차이가 있다. 이 때 고려에는 아직 상서성과 이부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들 실무자들이 어느 기구에 속한 관리였는지 알 길이 없지만, 고려 초기에는 내봉성이 실무집행기관으로 인사도 담당하였다고 생각되므로 이들 낭중과 이속은 내봉성 소속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김부고서의 절차는 당제의 고신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내용이 판이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고신 절차는 당제를 모방하면서도 아직 정치체제는 당의 3성·6부제를 채용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고신 형식에 의하면 중서성의 기능은 내의성에서 관장하였고, 문하성의 서명권은 광평성·내봉성·군부·병부의 장·차관이 소유하였으며, 상서성의 집행과정은 내봉성의 낭중과 이속이 담당하였다. 고려 초기의 권력기구는 이들 광평성·내봉성·군부(전 순군부)·병부의 네 관부와 내의성에 집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0013)광종 23년(972) 宋에 파견된 사행에 正使 內議侍郎, 副使 內奉卿, 判官 廣評侍郎이었고, 광종 초에 세워진<覺淵寺通一大師塔碑 陰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에도 “內議令 匡謙, 內奉省令 俊弘, 侍中 仁奉”이라 하여 광종대에는 오히려 내의성-내봉성-광평성의 서열로 표기되어 있어 광평성의 격하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경종 즉위년 김부고서로 보아 이들 관부의 서열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보여진다(李泰鎭, 앞의 글 참조).

 경종 즉위년 김부고서에 보이는 정치기구의 구성과 권력관계는 기본적으로 태조대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으나 그 사이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태조 즉위 직후의 인사 때 각각 1명씩이었던 광평성과 군부·병부의 장관이 복수화되어 2명씩이 되었는데 이것은 정부기구의 확대 강화를 모색한 것이었다. 이 때 내봉령만은 여전히 1명이었는데, 내봉성은 내의성과 함께 국왕 측근직이었기 때문에 일반 관부와 달리 모두 장관이 1명씩이었던 것 같다. 둘째는 광종 11년(960)에 순군부를 군부로 개정하였는데, 이는 혁명기에 필요하였던 병권의 집중기관을 축소시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0014)李基白,<高麗京軍考>(≪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61쪽에서 지금까지 호족들 병권의 협의체였던 순군부가 군부로 개편됨으로써 그 권한이 축소되었다고 논하였다. 셋째는 내봉성의 지위 상승이었으니 지금까지 광평성·내의성의 차관만 시랑이라 하고 다른 관부는 경이라 칭하였는데, 여기서는 내봉성 시랑으로 격상되고 군부·병부는 여전히 경으로 호칭되고 있다. 이와같이 김부고서에서는 태조 이래의 정치제도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광종의 강력한 왕권강화 정책을 겪으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고려 초기 정치제도의 커다란 변화는 경종 즉위 이후에 나타났는데, 執政과 內史令職의 출현이 그것이다. 즉, 경종 원년(976)에 荀質·申質을 左右執政으로 삼으면서 모두 內史令을 겸하게 하였다는 기사로 미루어 보아, 이 때 집정과 내사령의 관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순질과 신질이 가진 관직은 집정이 主職이고 내사령은 겸직으로 되어 있다. 아마 집정이란 정식 관직명이 아닌 까닭에 내사령직을 겸하게 한 것 같다.

 집정은 순질·신질에 앞서 이미 존재했는데 그것은 집정 王詵이었다. 경종 은 처음 광종조에 피참된 사람의 자손에게 복수를 허용하였는데, 이 때 왕선 도 복수를 핑계삼아 태조의 아들 天安府院君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에 마침내 경종 원년 11월에 그를 내쫓고 그 자리에 순질과 신질을 좌우집정으로 앉게 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경종은 광종의 과격한 개혁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執政」이란 비상대권을 가진 사람을 두어 개혁 주체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왕선을 내쫓은 직후에 순질과 신질을 좌우집정·겸내사령으로 삼은 것은 집정제를 존속시키되 좌우 복수로 삼아 그 권한을 서로 견제케 한 것이고, 또 임시적인 집정에게 새로운 당제의 내사령을 겸하게 함으로써 정식 관직의 뒷받침으로 삼은 것이다.

 다음 내사령은 광종 16년(965)에 왕자 伷를 王太子로 삼고 內史·諸軍事·內議令을 가하였다는 데서 처음으로 보인다.0015)≪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16년 2월. 그러나 이 해 왕태자는 만 10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이들 관직은 모두 형식적인 것으로 실직이 아니었다. 또한 광종 16년에 죽은 내의령 徐弼에게 三重大匡·太師·內史令을 증여하였는데,0016)≪高麗史≫권 93, 列傳 6, 徐弼. 이 내사령은 추증직이었으므로 실직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직으로서의 내사령의 출현은 역시 경종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집정과 내사령직은 경종 때 정식으로 성립하여 그 후 계속 실시되었다. 경종이 서거하자 성종은 원년(982)에 내의령 崔知夢에게 左執政·守內史令을 가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 우집정이 있었으며 전례에 따라 함께 내사령을 겸하였다고 짐작된다. 최지몽은 성종 3년(984)에 나이가 78세에 이르기 때문에 네 번이나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여 마침내 왕명으로 朝參을 제하고 內史房에서 예전과 같이 視事하게 되었는데 3년 후에 죽었다.0017)≪高麗史≫권 92, 列傳 5, 崔知夢.

 최지몽이 성종 6년 죽을 때까지 내사령이었던 것은 內史房에서 시무한 것 으로 알 수 있으나 언제까지 집정직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 러나 성종 2년에 李夢游가 좌집정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보다 서열이 높았던 내사령 최지몽이나 門下侍郎平章事 崔承老는 집정직을 겸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좌집정은 우집정보다 상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 때 비상 대권으로 설치된 집정제는 성종 원년 최지몽이 좌집정이 될 때까지 그 지위와 권력이 컸지만 이제 이몽유에 와서는 점차 그 지위가 낮아지고 마침내 3성·6부의 정식 관제가 성립함으로써 소멸되었던 것 같다.

 한편 경종 때 성립한 내사령직은 정식 3성의 하나로 계승 정착되었다. 경종 때에 집정이 내사령을 점하였다 하여 이 때 정식 내사성 기구가 존재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이 시기에는 엄연히 종래부터의 내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 원년에 내의령 최지몽이 守內史令이 되고 내사방에서 시무한 것을 보면 내의성은 새로 발족된 3성제의 내사성에 흡수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경종 때 출현한 집정과 내사령직은 성종 초에 3성제가 성립함으로써 집정제는 자연히 소멸되고 내사성은 정식기구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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