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1) 고려 초기의 정치제도
  • (4) 새 정치기구의 성립

(4) 새 정치기구의 성립

 태조 때부터 성종 초에 이르는 고려 초기의 정치체제는 태봉의 옛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광평성 중심의 관제였다. 광평성·내봉성·순군부(군부)·병부를 재부로 하고 내의성을 文翰의 고문기관으로 삼은 고려 초기의 독특한 정치체제는 이제 성종 때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고 왕조의 기반이 확립됨에 따라 그에 적합한 새 정치기구로의 개편이 요구되었다. 이에 새로 성립된 것이 당제에 따른 3성·6부제였다.

 고려 왕조는 이미 광종 16년에 王太子를 內史에 임명하고 경종 때 순질 등을 내사령직에 겸임케 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제를 채용하려는 움직 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정식으로 3성·6부제를 실시한 것 은 역시 성종 초였다.≪高麗史節要≫에 성종 원년 백관의 호를 개정하여 내의 성을 內史門下省, 광평성을 御事都省으로 삼았다는 것이 그것이다.0018)≪高麗史節要≫권 2, 성종 원년 3월.≪高麗史≫백관지에서도 역시 성종 원년에 똑같은 개정이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3성·6부제의 출발은 성종 원년이라 할 수 있다. 성종 원년 6월에 최승로가 行選官御事였던 것은 이 때 이미 御事 6官(뒤에 尙書 6部)이 존재하 였으며, 2년(983) 정월에는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으니 내사문하성과 어사도성 및 어사 6관의 3성·6부제의 골격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드러낸다.≪高麗史≫세가와≪高麗史節要≫에는 똑같이 성종 2년 5월에 처음으로 3省·6曹·7寺가 정해졌다는 기사가 나와 우리를 혼동케 하지만 이 때는 실제 6曹 대신 6官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6관의 착오임이 확실하다.0019)여기서 3省·6曹·7寺란 물론 고려의 기본관제인 3성·6부·7시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엄연히 御事 6官으로 6曹가 아니었으며, 7寺도 이 때 한번에 설치되지도 않았다. 성종 원년 어사 6관의 속사 9개 가운데 庫曹 등 6개 曹名이 보이지만 이는 6부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종 원년에 내사문하성·어사도성 및 어사 6관의 제도가 성립하였다 하여 이 때 모든 관원이 임명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이 때는 엄연히 최고직으로 崔知夢이 左執政·守內史令에 있었고, 서열 제2의 崔承老는 行選官御事로 있다가 2년 정월에 門下侍郎平章事를 거쳐 성종 6년에 최지몽이 죽자 비로소 이듬해 門下守侍中에 올랐기 때문에 3성·6관의 모든 관리가 일시에 충당된 것 같지 않다.

 어사성은 성종 14년(995)에 상서성으로 개칭되어 어사도성은 상서도성, 어사 6관은 상서 6부로 바뀜에 따라 명실공히 3성·6부제가 완결되었다. 이 3성·6부제는 당제를 채용한 것으로 고려가 새로운 정치기구를 마련하는데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당의 9寺를 본따서 만든 뒤의 7寺와 함께 고려의 정부기구가 전적으로 당제를 이용하였음을 뜻한다. 그러나 고려는 이들 당제 외에 또한 송제도 일부 받아 들여 권력기구로 삼았는데 그것은 中樞院과 三司였다.

 원래 고려의 중추원은 송의 樞密院을 본딴 것인데 성종 10년 병관시랑 韓 彦恭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설치되었다.0020)≪高麗史≫권 96, 志 30, 百官 1, 密直司.
≪高麗史節要≫권 2, 성종 10년 10월.
이 때 한언공은 ‘송의 추밀원 은 곧 우리나라 直宿員吏의 직’이라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는 국초부터의 직숙원리의 직을 개편하여 송 추밀원과 같은 국왕 측근의 강력기구인 중추원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중추원은 出納·宿衛·軍機의 일을 담당한 기관인데, 경종은 집권체제의 확립과정에서 이 기구를 설립함으로써 왕권의 바탕을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0021)邊太燮,<高麗의 中樞院>(≪震檀學報≫41, 1976).
朴龍雲,<高麗의 中樞院 硏究>(≪韓麗史硏究≫12, 1976).

 三司도 또한 송제를 모방하여 성종 때에 설치한 中外錢穀 出納會計의 기능을 가진 중요 기구이다.≪高麗史≫백관지에는 태조가 태봉의 調位府를 삼사로 고쳤다고 하였는데,0022)≪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三司. 태조 건국 후의 인사발령에는 삼사직이 보이지 않으며 그 후에도 여전히 삼사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태조 때 삼사가 설치되었다는 기사는 어떤 착오임이 확실하다.0023)邊太燮,<高麗의 三司>(≪歷史敎育≫17, 1975). 실제로는 孝肅仁惠王太后(獻貞王后)가 성종 12년(993) 서거하였을 때 三司廳 안으로 殯을 옮겼다는 기사로 보아0024)<玄化寺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역시 성종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고려는 당제를 채용하여 기본적인 3성·6부의 정부기구를 만들면서도 또 한편으로 송제를 본따서 중추원과 삼사의 권력기구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이중적인 정치기구의 병설은 이들 정치기구 사이의 기능과 권력관계에 비정상적인 현상을 초래하지만 성종으로서는 집권체제의 확립상 필요한 조치였다.

 그러나 고려의 권력기구는 이들 당제를 본딴 3성·6부와 송제를 모방한 중추원·삼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고려의 독자적인 중요 기구가 설치되어 고려의 정치기구를 3원화시켰는데, 그것은 都兵馬使와 式目都監의 설치였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宰樞兩府의 합작기관으로 전자가 대외적인 국방·군사관계를 의론하였음에 대하여 후자는 대내적인 법제·격식문제를 결정한 중요 기구였다. 백관지에는 도병마사가 국초에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성종 8년(989)에 兩界兵馬使를 중앙에서 통령하는 兵馬判事制가 모체가 된 듯하며, 사료에는 현종 2년(1011)에 都兵馬錄事가 보이고 있어 적어도 성종대에서 현종 초 사이에 성립되었다고 보여진다.0025)邊太燮,<高麗都堂考>(≪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85쪽. 또한 식목도감은 명확히 언제 설치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사료에는 현종 14년(1023)에 식목도감이 詹事府의 公廨田을 의론 결정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전술한 바 도병마사가 식목도감과 유사한 합좌기구였으니 만큼 역시 식목도감도 고려의 기본적인 중앙관제가 성립한 후인 성종 후년부터 현종 초 사이에 설치되었다고 생각된다.0026)邊太燮,<高麗의 式目都監>(≪歷史敎育≫15, 1973).

 위의 중요 권력기구 외에 또한 諸寺(文宗 때는 7寺)와 諸監 및 署·局·庫 등 잡사가 있었으나 이들은 그 설치 시기도 각각 다를 뿐 아니라 관서명도 자주 바뀌어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고려의 전성기인 문종 관제는 고려의 정치기구조직의 완성을 표시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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