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4) 중추원
  • (1) 중추원의 설치

(1) 중추원의 설치

 고려의 中樞院은 왕명의 출납과 숙위, 그리고 軍機之政을 관장하는 중요 기관이다. 중추원의 하부구조인 承宣은 왕명 출납을 담당하였고 상부구조인 樞臣은 군기의 일을 담당하여 고려 정치체제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樞府가 중서문하성과 함께 宰樞兩府로 병칭되고 중요 국사를 의논하였음은 중추원이 권력기구였음을 나타낸다.0074)고려의 中樞院데 대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朴龍雲,<高麗의 中樞院硏究>(≪韓國史硏究≫12, 1976).
邊太燮,<高麗의 中樞院>(≪震檀學報≫41, 1976).

 처음으로 고려에 중추원이 설치된 것은 성종 때의 일이다. 즉 성종 10년(991) 宋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兵部侍郞 韓彦恭이 왕께 “송의 樞密院은 우리나라 直宿員吏의 직입니다”라고 말하여 이 때 처음으로 중추원을 두었다는 것이다.0075)≪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密直司.
≪高麗史節要≫권 2에는 성종 10년 10월에 설치된 것으로 쓰여 있다.
그러므로 중추원은 송의 추밀원제를 본따서 고려 초의 직숙 원리의 직을 개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종은 당제를 채용하여 내외 관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한 군주이다. 원년(982)에 內史門下省과 御事都省·御事 6官을 두어 3성·6부제를 실시하고 2년에 지방에 12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는 10道와 12州節度使制를 편제하여 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힘썼는데, 이들 여러 제도는 주로 당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중추원은 새로운 송제를 본따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성종대에 정비된 다른 관제와 차이가 있지만 그 설치는 성종의 중앙집권화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처음 중추원의 설치 동기가 고려 초의 직숙 원리의 직을 개편하여 국왕 측근기관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추원은 顯宗 즉위 직후에 변동이 일어났다. 즉 현종 즉위(1009)초에 중추원 및 銀臺·南北院을 파하고 3官 機務를 관장하는 中臺省을 설치하였다.0076)≪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密直司.
≪高麗史節要≫권 2, 현종 즉위 2월에는 銀臺·中樞·南北院을 파하고 中臺省을 설치하였다고 씌여 있다.
현종은 康兆 등의 쿠데타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왕인데, 즉위 후 가장 먼저 실행한 것이 중대성의 개편이었다. 이 때 中臺使에는 강조, 副使에는 李鉉雲, 直中臺에는 蔡忠順과 尹餘가 임명되었다.

 중대성으로의 개편은 그 기구를 확대하고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중추원·은대 및 남북원 3관의 기무를 총괄하게 된 것은 이를 나타낸다. 이 때 중추원에 병합된 은대는 역시 송제의 銀臺司를 본딴 것으로 進奏·直宿의 임을 맡는 국왕 측근직으로서 중추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기관이다. 남북원도 바로 송의 安徽院을 채용한 것인데, 그것은 역시 송에서도 안휘원이 南北 2院으로 갈라져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이는 內諸司와 三班內侍의 籍을 총령하는 내직이었다.0077)朴龍雲은 앞의 글에서 南北院을 契丹의 中樞南北院을 가리킨 것이라 하였는데 고려가 거란제도를 채용하였다는 점은 설득력이 약하므로 역시 安徽院의 南北 2院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邊太燮, 앞의 글, 57∼58쪽 참조). 실제로 은대·안휘원은 내직으로 중추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기구로서 강조의 쿠데타 후 병합되어, 그 기구명도 「중대성」이리 하여 중추원과 은대에서 명칭를 취하고 또 「省」으로 승격하였다.

 이 때 중대성에 임명된 사람들을 보아도 중대성이 권력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중대성사에는 강조, 부사에는 이현운, 직중대에는 채충순·윤여가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현종 영립의 공신들이었다. 강조와 이현운은 바로 西北面都巡檢使와 副使로 직접 무력을 사용하여 穆宗을 축출하고 현종을 즉위케 한 주인공들이며 채충순도 역시 중추원 부사로 궁내에서 金致陽 일파를 축출하고 현종 영입에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현종 즉위공신이다. 이러한 인원 구성은 새로 출발한 중대성이 권력기구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 중대성은 곧 폐지하고 말았다. 현종 2년(1011) 정월에 중대성을 파하고 다시 중추원을 설치하였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렇게 중추원이 2년도 못되어 파하여진 것은 그의 중추인물인 강조가 對契丹戰의 과정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현종으로서도 혁명주체 세력들의 권력기관인 중대성의 비대화는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에 현종 2년부터는 다시 중추원이 복구되어 정상적인 체제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이때 은대와 안휘원은 예전과 같이 따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중추원에 병합하면서 그들 기능도 아울러 흡수했던 것 같다.0078)中樞院에 銀臺·安徽院을 그대로 병합하였음은 목종 원년의 改定田柴科에 ‘中樞·宣徽·銀臺別駕’가 文宗 30년의 更定田柴科에서는 그저 ‘中樞院別駕’로 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단 그 후에도 安徽使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안휘원의 설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南班 관직의 하나로서 존재하였고 그것마저 미구에 폐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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