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5) 삼사
  • (4) 삼사의 변질

(4) 삼사의 변질

 삼사는 인종때부터 무신정권기에 걸쳐 뚜렷한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元에 굴복된 충렬왕 때부터는 삼사가 변질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 때는 원의 강요로 모든 관제가 격하되고, 또 都評議使司는 都堂으로서 그 기능을 강화시킨 시기였기 때문에 자연히 삼사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충렬왕 이후에도 삼사의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었지만 그 기구와 기능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기구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고려 후기에는 제도적으로 삼사가 두 번이나 혁파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충렬왕 34년(1308) 충선왕이 民部(호부)를 개정하여 여기에 삼사·軍器監·都鹽院을 병합시켰다가 곧 환원하였으며,0098)≪高麗史≫권 76, 志 33, 百官 1, 戶曹. 또한 공민왕 5년(1356) 3성 복구 때 삼사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상서성에 병합시켰다가 11년(1362)에 다시 삼사를 설치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대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 삼사의 기구편성은 제도적으로 상승 강화되었다.

 첫째 고려 후기에는 삼사의 관직이 단독직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의 삼사직은 모두 겸직으로 判三司事는 대개 樞密院使(中樞院使)가 겸하고 三司使는 6尙書 등 타직이 겸하여 삼사의 전임직이 아니었다. 그러나 충렬왕 이후에는 삼사직이 전임직으로 독립하게 되어 판삼사사나 삼사사 등이 하나의 어엿한 독립직이 되었다.

 둘째는 삼사직의 품질이 승격한 점이다. 지금까지 삼사는 겸직인 동시에 그의 품질도 낮은 편이었다. 종래 판삼사사는 추밀원사가 겸하고 삼사사는 6상서보다 하위에 있었으나 충렬왕 때부터는 판삼사사는 그 서열이 수상과 아상의 사이에 놓이고 삼사사도 재상의 열에 끼게 되었다. 이제현의≪櫟翁稗說≫에 재상의 합좌 때 판삼사사는 亞相의 위에 앉고 左右使는 評理의 상하에 앉는다고 한 것은0099)李齊賢,≪櫟翁稗說≫前集 1, 合坐之禮. 이제 판삼사사와 삼사좌우사가 宰樞와 함께 도당에 합작하고 동시에 그들의 지위가 樞臣(密直)보다 상위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로 백관지에도 판삼사사는 종1품이고 삼사좌우사는 정2품으로 승품되어 재상에 들어 가고 있다.

 셋째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삼사직이 도당에 앉아 국정에 참여케 되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도당에는 재추만 합좌 회의하였는데 충렬왕 이후에는 삼사직이 전임직이 되는 동시에 품질도 승격하여 재추와 함께 도당에서 국사를 회의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고려 말에는 宰·樞·三司의 3府가 도당의 구성원이 되었던 것이다.

 넷째는 삼사관원의 증가이다. 지금까지는 품관이 겸직이면서도 10인이었는 데 이제는 전임직인 동시에 15인으로 증원되었으며 그들의 품질도 역시 승급되고 있다. 특히 禑王 때부터는 삼사에도 門下府와 같이 판사 위에 領事가 설치되고 권신들이 임명되었는데,0100)여말에 領三司事에 임명된 사람으로는 崔瑩·李仁任·朴堅味·邊安烈·李成桂 등 권신들이 있었다. 이는 삼사가 기구상 크게 강화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 후기에는 삼사의 관원 구성이 확대 강화되었다. 삼사의 관원이 겸직에서 독립직으로 바뀌었고 그의 지위와 품질이 높아졌으며 판삼사사와 삼사좌우사도 도당에 합좌하여 국정에 참여케 되고, 또 삼사의 품관의 수가 10인에서 15인으로 증가하는 동시에 특별히 영삼사사가 설치되어 기구 편성면으로 크게 승격되었다. 충렬왕 이후 고려의 삼사는 제도적인 기구면에서 확실히 강화되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구상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의 삼사는 그 기능이 약화되는 역현상이 일어났다. 물론 판삼사사·삼사좌우사, 그리고 영삼사사가 도당에 합좌하여 국사를 의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삼사라는 기구의 직능 자체는 오히려 후퇴한 것이다. 전술한 바 인종 이후 그 활동이 보이지 않던 삼사가 충렬왕 이후 변질되면서도 그 기능은 더욱 보잘 것이 없게 되었다. 고려 말 左常侍 金子粹의 상소에 “삼사관의 수가 15에 이르지만 祿牌를 署하는 외에는 餘事가 없다”라 한 것을 보면0101)≪高麗史≫권 120, 列傳 33, 金子粹. 고려 말의 삼사는 녹패나 서명할 뿐 다른 직사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節要≫를 보면 고려가 멸망하기 1년 전에 삼사의 기능이 환원된 기사가 나온다. 즉 공양왕 3년(1391) 4월에 삼사에 명하여 중외 전곡의 출납을 회계케 하였다는 것이다.0102)≪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4월. 이러한 사무는 본래 삼사의 기본적인 직능이었는데, 이 때 삼사로 하여금 다시 그 직무를 담당케 한 것은 그 이전에는 그렇지 못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고려 후기에 유명무실하였던 삼사의 기능은 이제 고려 멸망 직전에 가서야 회복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동안 삼사에 대신하여 중외 전곡의 출납을 관장한 것은 바로 都評議使 司, 즉 도당이었다. 고려 후기의 최고 정무기관으로 행세하였던 도당이 국가 의 전곡 출납도 담당하였던 것이다.0103)≪高麗史節要≫권 33, 창왕 즉위 8월, 趙浚의 陳時務에 “지금 도평의사사가 중외 官司에 移文하는 것은 모두 出納錢穀·殺生威福·發號施令 등의 일로 관계되는 바가 크다”고 한데서 증명된다. 이러한 도당의 비대화가 삼사의 제도적 기구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 3년의 삼사 기능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도당의 일원적인 최고 정무기관으로서의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삼사로 하여금 그 기능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었다.

 공양왕 3년 이후에도 삼사는 여전히 도당의 지휘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金子粹의 상소문이나 沈德符의 상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전술한 김자수의 상소문에 삼사관원의 曠職을 비판하면서 지금부터는 중외 전곡의 출납을 먼저 도평의사사에 보고하면 도평의사사는 이를 삼사에 이첩하여 정밀히 회계케 하자고 하였다. 또, 공양왕 4년에 시중 심덕부의 상언에 국가의 錢財 출납은 도평의사사에서 각사에 文牒을 직행하면 각사는 그 출납 액수를 월말마다 삼사에 보고케 하자고 하였다.0104)≪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공양왕 4년 4월. 이것은 삼사의 기능이 회복한 후에도 국가의 전곡출납을 어디까지나 도평의사사가 일원적으로 통할하되, 다만 출납의 회계사무만은 삼사에서 맡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의 허설화된 삼사는 공양왕 때 그 기능을 회복하였지만 그것은 도당에 예속된 상태에서였다. 그리고 이러한 삼사의 지위는 큰 변동없이 조선에 계승되었던 것이다.0105)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治典 錢穀條를 보면, “국가는 三司로서 전곡의 수입하는 수를 관장하고 그 지출에 있어서는 도평의사사의 명을 받아 실행케 하였으니 대개 周官의 遺意에서 얻은 바 있다고 하겠다”라 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의 삼사는 방대한 재무기관인 송제의 그것을 채용하여 설치되었으나, 전기나 후기를 막론하고 그 기능과 지위는 보잘 것 없었다. 전기에는 당제에 따른 3성·6부의 정부기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삼사는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후기에는 3성·6부의 공식기구가 허설화되었지만 반면 도당이 최고의 정무기관으로 등장함으로써 역시 삼사는 무력기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명 무실한 삼사는 고려 말에 다시 그 기능을 회복하는 듯하였지만 일원적인 최고 기관인 도당이 존재하는 한 삼사의 기능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고려의 삼사는 송제를 모방하여 설치되었지만 고려 자체의 정치체제에 따라 특수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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