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8) 어사대와 낭사
  • (4) 대간의 정치적 지위

(4) 대간의 정치적 지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간은 간쟁·봉박이나 시정의 논집, 백관의 감찰, 그리고 관리 임명의 서경 등 중요한 직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고려에 있어서 대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관으로서의 대간은 국왕의 이목과 같은 近侍職이었던 까닭에 자연히 여러 가지 특권이 부여되고 있었다.

 대간은 不逮捕의 특권이 주어져 있었다. 대간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재직시에는 왕명이라 해도 붙잡아 갈 수 없으며 또 어사대 안에 직접 들어올 수도 없었다. 또한 간관도 마찬가지로 不可罪의 원칙이 있었는데, 이것은 대간이 언론에 관한 한 처벌할 수도 없거니와 그 밖의 죄에 대하여도 관부 안에서는 체포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백관을 감찰하는 어사대는 공경·재상도 움츠리는 위세와 명망있는 관부로 여겨졌다.

 또한 대간은 언관으로서 근시직인 까닭에 국왕의 측근에 있으며 幸行에 수행할 뿐 아니라 직접 국왕 앞에서 面啓를 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대간이 언사를 할 때는 「글」로서 하는 경우와 「말」로서 하는 경우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전자가 「上疏」이며 후자가 「奏」였다. 이들 대간은 언론을 위하여 직접 국왕께 접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정치적 비중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중대한 직능과 정치적 비중을 가진 대간직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중요한 자리일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대간직은 우선 淸要職으로 간주되어 특별시되었다. 고려에서는 대간·政曹·學士와 知制誥를 청요직으로 여겼는데0164)이 밖에 中樞院의 承宣도 淸要職에 들었다고 생각된다. 정조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한 吏·兵部이고, 학사·지제고는 국왕의 조칙을 제술하는 文翰官이었다. 대간이 이들 청요직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그의 지위가 중대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간이 청요직인 까닭에 그들은 가문이 좋은 자제가 임명되었다. 귀족사회 인 고려에서 문벌이 좋은 집안에서 대간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고려에서는 신분과 가문이 좋은 사람들만 대간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간의 신분」에 대해 세밀히 검토하여 귀족가문과 대간직 임명을 일일이 분석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대간직에 올랐던 사람들 대부분이 명문 귀족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0165)朴龍雲, 앞의 책, 112∼169쪽. 비록 무신란 이후에는 무신이나 천계도 대간직에 오르는 변화가 있었지만 무신집권기가 끝난 후에는 다시 재정비되어 대간의 대부분이 여전히 權門世族에서 나오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대간제가 귀족사회 구조 내의 한 제도로서 존재하였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고려 대간의 정치적 기능과 지위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고찰할 단계에 이르렀다. 이것은 고려의 대간 연구에 중요한 문제, 어떻게 보면 그의 실체를 밝히는 결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간관은 국왕에 대한 간쟁기능으로 국왕 견제의 위치에 있었고, 어사대는 백관에 대한 감찰기능으로 백관 견제의 위치에 있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국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사대는 국왕편에 서고 간관은 그 반대편에 놓여 균형을 이룬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간이 같은 직능을 함께 행사하였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도식적인 해석은 무리를 일으킨다.

 고려시대 대간의 정치적 기능에 주목하여 왕권의 규제를 강조한 연구에서는,0166)朴龍雲, 위의 책 참조. 대간에게 부여된 시정의 논집, 서경, 간쟁·봉박 등의 직임 자체가 그 러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직임을 수행하는 과정에도 왕권 견제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유교정치 이념 위에 설치되고 귀족가문 출신으로 충당된 고려시대 대간들은 과감한 직언과 불요불굴의 감투정신으로 국왕의 실정을 시정케 하여 대간제도 설치의 기본정신이 잘 실현되었으며, 간혹 국왕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도 일치 단결된 대간의 집요한 투쟁으로 왕권도 어쩔 수 없이 굴복되었다는 것이다. 무신집권기에는 대간제도도 일시 타격을 받았지만 그 후 다시 그 기능이 회복됨으로써 왕권의 전제가 견제되고 왕권과 신권의 세력싸움은 결국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는 것이었다.

 대간이 국왕에 대한 견제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견해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실제로 대간의 언관으로서의 직능은 국왕으로 하여금 탈법적인 횡포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유교적인 王道에 어긋나는 실정을 시정케 하는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왕권을 보좌하는 정치적 기능이 강하였다는 점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오히려 필자는 대간이 왕권 견제보다도 그 강화에 보다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싶다.

 앞에서 우리는 대간이 간쟁·봉박, 그리고 시정의 논집이나 백관의 규찰·탄핵, 또는 서경 등의 기능을 가졌고 이것이 왕권 견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을 들은 바 있다. 위의 기능 가운데 백관을 감찰하는 직능은 확실히 국왕편에 유리한 점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다. 신하들의 비리와 과오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것은 신권에 대한 견제가 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재상이나 문무양반 등 모든 관리는 대간의 감찰을 통하여 그 행동이 규제되었으며 이는 왕권 강화의 직접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즉, 어사대가 왕권을 견제하는 면보다는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면이 더 강하였다고 주장한 것은 이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0167)宋春永,<高麗 御史臺에 관한 一硏究>(≪大邱史學≫3, 1971).

 간쟁·봉박이나 시정의 논집이 국왕에 대한 간언이나 반박을 뜻한다는 면에서 왕권의 견제적 기능이란 점은 이해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국왕의 개인적인 행동이 아닌 국가적 정책에 대한 간쟁이나 봉박은 시정의 논집과 함께 이미 재상 등 관련된 관리와의 협의 끝에 내려진 시책에 대한 논박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국왕에 대한 반박과 함께 시정에 참여한 고관들도 포함된 국가정무에 대한 시비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간쟁·봉박이나 시정의 논집 자체도 반드시 국왕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서경이 국왕의 방자한 관직 제수를 거부하는 기능도 있었지만 이것 또한 재상이나 政曹(이·병부)의 인사관리를 바로 잡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도 이와 똑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대간의 직능을 왕권 견제의 측면으로만 본 시각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대간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王道政治를 요구하였고 이는 국왕의 전제정치를 방지하는 기능을 가졌다. 그러나 유교적 정치이념은 반대로 국왕에 대한 신하의 충성을 요구하고 있다. 유교는 이른바 「帝王의 學」으로서 부모에 대한 孝와 함께 국왕에 대한 忠을 강조하는 학문이며 사상이다. 오히려 유교는 왕도정치의 구현과 더불어 국왕권의 안정을 뒷받침해 주는 유리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본시 대간은 언제나 국왕 측근에 시종하는 侍臣이다. 시신이란 국왕 행행에 수행할 뿐 아니라 직접 국왕과 면접하는 특권이 부여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시신은 국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는데 그 직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측근정치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시신이 국왕편에 서서 왕권 강화에 이바지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낭사는 고려에서 詞臣으로 文翰官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국왕의 조칙을 작성하는 문한관이란 국왕의 직접적인 보좌역인데, 이들이 바로 간관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간쟁·봉박의 직임을 넘어 국왕권에 서 있는 존재임을 확인해 준다.0168)邊太燮,<高麗의 文翰官>(≪金哲埈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이상에서 우리는 고려시대 대간의 정치적 기능상 왕권을 규제하는 면과 반대로 왕권을 강화하는 양면이 있었음을 일별하였다. 이러한 양면은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동일한 것이 아니라 왕권의 消長에 따라 시기적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유교의 정치이념이 군주에 대한 충성을 요구한 데서 왕권에 유리하게 작용한 동시에, 또한 聖君의 德政을 요구하는 왕도정치의 면에서는 재상정치를 요구하는 양면이 있었다는 점을 든 바 있다. 고려의 대간은 이를테면 이러한 유교적 정치이념의 양면과 비슷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대간의 근시직과 문한관으로서 조칙을 작성하는 직능으로 미루어 보아 왕권 강화에 보다 비중을 두었던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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