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9) 한림원과 문한관
  • (1) 한림원의 설치와 조직

(1) 한림원의 설치와 조직

 翰林院은 詞命을 제찬하는 기구이다. 따라서 한림원은 국왕측근의 文翰官으로 문필에 능한 유신이 임명되고 청요직으로 중시되었다. 이와 같이 한림원은 왕명을 기초하는 측근직에 있었으므로 그 정치적 위치가 자못 높았으며, 반대로 국왕은 이들 측근의 문한관을 통하여 왕권을 신장시킬 수 있었다.0169)高麗時代 翰林院·文翰官에 대한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李基東,<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歷史學報≫77, 1978).
崔濟淑,<高麗翰林院考>(≪韓國學論叢≫4, 誠信女大, 1981).
邊太燮, 앞의 글.

 ≪高麗史≫백관지에 의하면 태조가 태봉의 제도에 따라 元鳳省을 설치하고 그 후 學士院으로 고쳤다가 현종 때 한림원으로 개정하였다 한다. 이것을 보면 고려의 한림원이 정식으로 설치된 것은 현종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한림원이 출범한 것은 그 이전의 광종대였다.

 고려 건국 후의 文翰機構는 백관지에 있는 바와 같이 태봉의 옛 제도를 답습한 원봉성이었다.≪三國史記≫는 궁예의 관제로서 “元鳳省 今翰林院”이라 하였으므로 원봉성이 고려 한림원의 전신으로 문한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원봉성에는 元鳳省令·元鳳省大學士·學士·知元鳳省事·元鳳省待詔·元鳳省學生 등이 있어 制誥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원봉성의 이름은 광종 원년에 孫紹가 守元鳳令·兼知制誥였다는 기록을0170)<大安寺廣慈大師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끝으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광종대부터는 翰林學士의 기록이 자주 보이기 시작하여0171)光宗 이전에도 翰林官이 보인다. 太祖 23년에 세운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에서 知元鳳省事 崔彦撝를 「知翰林院事」로 표기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 때의 한림관명은 옛 신라제도에 따른 혼용으로 생각되며 정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元鳳省이었다고 하겠다. 이미 광종 초년에 金岳이 翰林學士·大相·兵部令이었고, 이어서 金廷彦·雙冀·趙翼·李夢游·王融·崔行歸 등 많은 문인이 한림학사였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를 보면0172)≪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한림학사 이몽유가 奉勅撰하고 翰林院書博士 張端說이 奉勅書하고 있어, 이 때 한림원이 존재하고 여기 학사와 서박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종 14년(995) 교서에도 한림원으로 출제하여 문관들의 詩賦를 제술케 하고 이를 다시 한림원에서 品題하여 上聞케 하였으니,0173)≪高麗史節要≫권 2, 성종 14년 2월. 이 때 한림원이 있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종조에 한림원이 성립하였다는 백관지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며 실제로는 이미 광종 때 원봉성에서 한림원으로 개칭된 듯하다. 아마 현종대에는 한림원의 실질적인 장관이라 할 수 있는 翰林學士承旨를 비롯하여 모든 관원의 정원이 완성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림원의 관원 구성은 백관지에 나타나는데 이는<표 14>와 같다. 여기서는 문종 관제를 보다 정비한 예종 때의 내용을 취하였다. 여기서 한림원의 관원은 재신이 겸하는 判院事를 비롯하여 모두 12인이고 이속이 8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종 11년(1116)에 員吏를 刪定할 때 侍講學士 이상은 모두 本院官을 겸하고 아울러 本品의 行頭를 삼았다 한다. 이것은 한림원의 학사들이 비록 본품의 행두지만 따로 본직이 있고 모두 겸직이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고려의 한림원이 문한의 중심기관이면서도 그 기능에 제약이 생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判 院 事 (1인) 宰臣 兼
學 士 承 旨 1인 正3品
學 士 2인 正3品
侍 讀 學 士 1인 正4品
侍 講 學 士 1인 正4品
直 院 4인 (2인은 權務)
醫 官 2인  
  吏 屬   錄事 등 8인

<표 14>翰林院의 官員構成(睿宗朝)

 고려의 문한관에는 내외의 兩制가 있었는데 한림원은 바로 內制로 중요시되었다. 백관지에는 翰林院·寶文閣으로 知制誥를 겸한 사람은 內知制誥라 하고 그 밖의 관으로 겸한 사람을 外知制誥라 하였다 한다. 지제고란 바로 문한관을 가리킨 관직이었는데 내제와 외제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양제 제도는 당송의 제도를 채용한 것이다. 당대에는 천자 측근에 있는 한림원이 내제로서 천자 직접의 중요한 조칙을 작성하였는데 대하여 中書舍人과 지제고는 외제로서 그 밖의 조칙을 기초하였으며, 송대에도 계속하여 역시 한림학사가 내제이고 중서사인·지제고가 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한림원은 국왕의 직접 조칙을 작성하는 내제로서 그 지위가 높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의 한림원은 이러한 백관지의 서술과는 달리 내제가 아니라 외제였다. 崔滋의≪補閑集≫에서는 “唐制 內翰林 外中書 本朝 內省郞 外誥院”씨라 하여 당제는 내제가 한림(한림학사)이고 외제가 중서(중서사인)이지만 고려는 내제가 성낭이고 외제는 고원이라는 것이다. 최자는 고종조에 正言(知制誥), 寶文閣待制, 國子大司成·知御史臺事, 尙書右僕射·翰林學士承旨, 樞密副使를 거쳐 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致仕한 사람이다. 그는 유교에 능하고 직접 성랑·지제고와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고 수상직으로 치사한 재신이므로 고려의 내외제를 잘못 알 리가 만무하여 성랑이 내제이고 고원은 외제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내제인 성랑이란 중서문하성의 낭사(간관)를 말한 데 대하여 외제인 고원이란 타관으로 지제고를 겸한 사람을 말하였다. 이 외제에 한림원관으로 지제고가 된 사람이 포함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성랑으로 한림원학사를 겸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들은 물론 내제가 되었다. 조선 초에도 承政院·司諫院(고려의 성랑)이 모두 內知製敎(고려의 內知制誥)를 띠고 타관 10인이 外知製敎를 겸하였는데, 세종 11년(1429)에 이르러 集賢殿의 전원과 修文殿·寶文閣의 일부가 외지제교를 겸하게 하였다는 사실은 바로 고려의 내외제가 이때까지 계속되었음을 표시한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는 성랑이 내제로 중요시 되었는데 대하여 한림원은 외제로 그 지위가 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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