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9) 한림원과 문한관
  • (3) 한림원의 지위

(3) 한림원의 지위

 한림원은 사명을 제찬하는 문한기관이다. 국왕 측근에서 왕명을 받들어 조 칙을 기초 작성하는 중요 기관인 것이다. 한림원은 玉堂이라 칭하고 그 학사 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래 고려에는 문한직으로 궁중 안에 禁內 6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翰林院·史館·秘書省·寶文閣·同文院·留院이었으며 그 가운데 앞의 한림원과 사관을 으뜸으로 삼았다 한다.0176)李穀,≪稼亭集≫권 2, 禁內廳事重興記. 이들 금내 6관을 문한직이라 하였지만 직접 왕명에 따라 조칙을 작성하는 것은 한림원이었다. 한림원이 사관과 함께 6관 가운데 으뜸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림원의 문한직으로서의 직능은 그들의 지위를 높이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한림원을 「玉堂」이라 불렀으며, 한림학사를 「內翰」이니 「內相」 등으로 높이 표현한 것은 이런 까닭에서였다.0177)崔濟淑, 앞의 글 참조. 따라서 한림학사에 임명되는 것은 그의 문필 능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커다란 영광일 뿐 아니라 장래의 출세를 기약케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직한림의 자격이 과거의 합격자에게만 주어졌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직한림원은 한림원의 초급직이지만 「翰林」이란 곧 직한림원직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한림학사가 타직으로 겸하고 지제고가 되어 문한을 담당한데 대하여 직한림은 한림원의 본직으로 직접 制草도 하고 본원 사무와 지제고의 일반행정도 담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직한림은 과거에 급제할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대개 장원으로 합격되어 문필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야 했으며 특히 청요직인 까닭에 가문에 흠이 없어야 했다. 대개 재상들의 천거로 임명되었는데 그만큼 그 자리는 중요하고 장래의 승진이 기약되는 동경의 대상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직한림 중심의 한림원의 운영은 표면적인 우대에도 불구하고 그 지위의 하락을 가져오게 하였다. 조선시대 사람인 李詹의<代藝文館上政府書>0178)≪東文選≫권 63, 書, 代藝文官上政府書.에서 고려의 예문관(翰林院)은 위에 體統의 權이 없고 아래로 長久의 計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 관직이 모두 실직이 아니고 大提學 이하 提學·直提學 등이 모두 타관으로 겸직이었으며, 문과 출신의 史翰職이 승진하여 참상관이 되더라도 결국 여기서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고려 말에 文行者 8인이 史翰의 일을 분담하였으나 이러한 연관성과 장구성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비록 대우는 좋았으나 겨우 그 직을 다스릴 뿐 오직 詩酒로 自娛하였다 하니, 고려 말의 한림원이 희망도 없는 비권력직이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 한림원의 지위는 전술한 바 성랑이 내제로서 문한관의 중추를 이룬 데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성랑은 중서문하성의 낭사로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간관이었는데, 그들은 또 국왕 측근에서 詞臣으로 문한을 담당하여 그 지위가 높았으니 고려 한림원이 여기서 밀려나게 된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더욱이 전술한 바와 같이 한림원의 학사가 모두 타직으로 겸하여 최하위직인 직한림원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또 이들이 참상관으로 승진하려면 부득이 한림원과 관계없는 타관으로 전직되는 제도는 그들의 희망을 없애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려 문한기관의 중추기관인 한림원의 지위가 그렇게 중요성을 갖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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