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2. 관직과 관계
  • 3) 무산계와 향직
  • (2) 향직

(2) 향직

 鄕職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국초의 관계가 성종 14년(995)에 이르러 변신 하여 이룩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명칭 등의 외형에 있어서는 앞의<표 5>의 官階와 같았으나 그 기능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종래 향직은 향리의 직 또는 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명칭상으로 보아도 그러하지만, 대광·정광 등의 향직에 관한 내용이 戶長·副戶長 등의 향리직에 대한 내용과 동일하게≪高麗史≫권 75, 선거지 향직조에 수록되어 있는 데서 그같은 해석이 나온 듯하다. 그러나 향직이 곧 향리의 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대광·정광 등의 향직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호장·부호장 등의 향리직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향직이 향리의 계가 아닐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렇게 한마디로 단정하여 말할 수 없는 일면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향리들이 향직을 수여 받고 있는 경우가 많이 눈에 띄는 까닭이다. 그러나 논자 가운데는 이 점에 관해서도 강력하게 부인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향직은 성종 14년에 정비된 데 비해 향리직은 동왕 2년에 정비되고 있어서 제도 정비상 12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과, 전자는 궁예가 摩震時代에 창설했던 관품에서 기원하는 데 비해 후자는 신라의 관직명에서 이끌어 온 것으로서 양자는 그 계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최고의 향리층인 호장이 하급의 향직인 佐尹·正朝·甫尹·中尹 등을 받고 있는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양자간에는 서열상의 상응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등이0286)武田幸男, 앞의 글(1964), 8∼10쪽. 그같은 주장의 논거들이다.

 이어서 향직을 받는 계층은 위에 든 향리(長吏) 뿐 아니라 無官의 노인·무산계를 가진 자·군인·양반·서리 및 여진의 추장 등임을 밝힌 이 논자는, 그것은 이들에게 준 爵과 같은 의미를 지닌 조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 럼 향직은 대체적으로 관인과 구별되는 특정부류에게 수여한 영예적 칭호였 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서열체계를 향직이라고 이름한 그 때의 「鄕」은 京에 대칭되는 「鄕」이 아니라 唐樂에 대한 鄕樂의 예 등에서 보듯이 「唐」에 대비되는 「鄕」으로서, 그것은 국풍 내지는 고려풍을 의미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향직은 관인을 상대로 한 중국식 문산계와는 계통을 달리하는 고려적 질서체계로서 고려 고유의 영역은 말할 것 없고 여진의 추장에게 수여한 사례에서 파악되듯이 영역 밖의 사회까지도 포괄하는 조직의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0287)武田幸男, 위의 글, 12∼15쪽 및 26∼30쪽.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향직은 여전히 「鄕階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것은 지방 위계제로서의 성격이 짙다”는 견해도 표명되어 있다. “이른바 향직체계는 문산계에 대응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중국관계와 고려관계의 대항에서 대치되는 방식으로의 변동이 아니라, 고려 중앙정부 자체 내에서의 어떠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중앙의 위계로서 중국의 문산계 체계를 도입하고 기존의 위계제를 지방화해 버리는 그러한 과정에서” 생겨나게 된 것이라는0288)李純根, 앞의 글, 223쪽. 이해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으로 좀더 깊이 천착되어져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향직의 소지자에게는 토지가 賜給되었다. 거기에는 경제적 혜택까지 부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문종 30년(1076)에 제정된 更定田柴科의 규정에 보이는데, 그것에 의하면 대상·좌승은 武職인 산원과 함께 田 40결·柴 10결을 받는 제12과에, 원보·정보0289)본문에는 正朝로 되어 있으나 이는 正甫의 잘못임이 분명하다.는 교위와 함께 田 35결·柴 8결을 받는 제13과에, 그리고 원윤은 대정과 함께 田 30결·柴 5결을 받는 제14과에 각각 배정되어 있다.029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문종 30년. 전체 18과 등 중 전지와 시지를 아울러 받는 제14과 이상에 모두 배정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향직에 관한 대우 규정이 그보다 앞서 제정된 목종 원년(998)의 改定田柴科에는 보이지 않아 약간의 의아심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문종 30년(1076) 이전에는 이들 향직 소지자에게 경제적 대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던 듯하다. 동일한 식화지 전시과조에 현종 19년(1028) 5월 判으로, “鄕職 大丞 이상과 正職 別將 이상 인원은 身死後에 田丁을 遞立하고, 향직 左丞 이하와 元尹 이상 (및) 정직 散員 이하로 나이가 70세에 찬 사람은 그 자손으로 하여금 체립케 하며, 無後者는 身歿後에 체립케 한다”029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현종 19년 5월.는 기록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관계로 존재하고 있을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경종 원년(976)에 제정된 시정전시과에도 자삼 이상, 곧 원윤 이상에게 전시를 지급한 규정이029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경종 원년 11월. 있는 것으로 미루어, 향직 소지자에게는 처음부터 토지를 사급하였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듯싶다. 그렇다면 개정전시과에 이들에 관한 규정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기사의 누락일 듯 짐작되나, 혹 그 이외에 어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그 점은 분명하지 않다.0293)武田幸男, 앞의 글, 18쪽.
姜晋哲,<田柴科制度의 制定 및 그 內容>, 앞의 책, 41쪽.
하여튼 향직 소지자에게는 제도가 마련된 처음부터 경제적 혜택이 부가되어 있었던 것이 어느 정도 확실한데, 하지만 그와 같은 전시의 사급이 여진의 추장과 같은 외국인에게까지 베풀어졌을까는 의문시되는 점이 많다.

文宗 30년 田柴科 顯宗 19년 田丁遞立
品 階 武 職 鄕 職 正 職 品 階



正 8 品

正 9 品

 



散 員
散 員
校 尉
校 尉
隊 正
大 匡
正 匡
大 丞
(郎 將)
(別 將)
別 將 以 上
散 員 以 下
(散 員)
(校 尉)
(校 尉)
(隊 正)
正 6 品
正 7 品

正 8 品

正 9 品

 
佐 丞
大 相
元 甫
正 甫
元 尹
    佐 尹
正 朝
正 位
甫 尹
軍 尹
中 尹
 

<표 9>鄕職의 구조

 지금 외국인을 제외한 향직의 소지자에게 토지의 사급이 있었다고 했지마는,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보다시피 그것은 원윤 이상층에게 한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위에 든 사료 모두가 공통되고 있다. 따라서 좌윤 이하의 하급 향직자에게는 토지의 지급이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향직이 크게 원윤 이상층과 좌윤 이하층으로 나뉘어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종 30년의 전시과 지급규정에는 다시 향직 중 원윤 이상·左丞(佐丞) 이하층만을 열거하고 대승 이상층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역시 의문이 남고 있다. 하지만 현종 19년의 田丁遞立 규정에서는 대승 이상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게도 토지의 지급이 있었다고 간주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이것은 일면 토지의 수혜자층 내에서도 다시 좌승 이하층과 대승 이상층의 구분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향직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0294)武田幸男, 위의 글, 22∼26쪽. 이제 그와 같은 내용의 향직의 구조를 문종 30년의 전시과 규정과 현종 19년의 전정체립 규정과 함께 비교하여 표로 보이면 위와 같다.0295)위와 같음.

 향직은 충렬왕 24년(1298)을 마지막으로 하여 그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점차 소멸되어 간 것 같다. 향직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대략 300년 동안 존속했던 조직·체계였던 것이다.0296)武田幸男, 위의 글, 30쪽.

<朴龍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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