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3. 중앙 정치체제의 권력구조와 그 성격
  • 1) 중앙 정치체제의 권력구조
  • (3) 문무양반과 대간

(3) 문무양반과 대간

 고려 때는 전체 관원을 일컬어 「宰樞文武兩班」이라고 불렀다. 이 중 재추는 앞서 설명해 온대로 재신과 추밀, 곧 2품 이상의 재상들을 의미했거니와, 따라서 「文武兩班」은 3품 이하관을 지칭하는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표제어의 문무양반도 그런 의미에서 썼지마는, 대간들도 그 속에 포함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대간은 그들의 특이한 직능 때문에 권력구조상에서 재추 뿐 아니라 문무양반들과도 관련이 깊었던 만큼 여기서는 그 점을 살펴 보려 하지마는, 그 가운데서도 특히 承宣과 尙書6部와의 관계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승선은 중추원의 하층부를 구성하고 있으면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원이다. 따라서 군주를 주대상으로 하여 간쟁과 시정의 논집·서경 등을 맡았던 대간과는 상대적인 입장에 서게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고려 때의 양자간 관계를 알려 주는 자료가 전해 오지 않아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가 없는데, 다만 조선 초기에 대간들의 끈질긴 항쟁이 있자 국왕이 承政院으로 하여금 그들의 章疏를 啓達치 말도록 조처한 기사가 보인다.0312)≪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윤7월 기묘·권 23, 태종 12년 2월 갑술.
≪世宗實錄≫권 39, 세종 10년 춘정월 임인.
국왕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승선이 대간의 언론활동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말에 잠시 시행된 제도이기는 하였으나 대간의 국왕 面啓法이 마련된 사실로0313)≪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춘정월·2월. 미루어 볼 때 고려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있었을 듯 싶으나 사료상으로는 물론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대간의 국왕 면계법보다도 더욱 주목되는 것은 승선이 대간직을 널리 겸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0314)朴龍雲, 앞의 책, 238∼239쪽. 원칙대로 하자면 승선은 국왕의 비서직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와 밀착되게 마련이었고, 반대로 대간은 왕권을 규제하는 기능을 하였으므로 어느 한 관원이 당해 두 관직을 겸임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칙론이 제기되어 聽納된 기사도 찾아지는데,0315)≪高麗史≫권 99, 列傳 12, 文克謙. 하지만 그것은 이론에 그쳤을 뿐 실제로는 승선들의 대간직 兼帶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대간의 기능문제와 함께 승선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비슷한 양상은 상서6부와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본래 대간은 인사 문제에 있어서는 이·병부와, 탄핵·국문은 형부, 그리고 의례상에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예부 등과 밀접히 관련지어져 있었다. 물론 그 관계는 문제의 성격과 당시의 정황에 따라 양자가 대립되는 수도 있고, 또 협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점은 대간의 직능을 감안할 때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대간은 이같은 직능상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스스로 상서 6부의 직관을 겸대하고도 있다.0316)朴龍雲, 앞의 책, 240∼241쪽. 이 역시 제도로서는 좀 어색한 감을 주는 것인데, 그럼에도 그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겸임제가 많이 이용되고 있었다. 이것도 대간의 기능 강화 내지는 정책의 신속하고도 원만한 시행과 관련이 깊을 듯싶은데, 우리는 이런 점에서 또한 당시 권력구조상의 한 성격을 시사받을 수 있을 것 같다.

 臺官과 諫官 자신들 사이의 관계를 보면 직능상으로 후자가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서경 등 낭사와 어사대가 같이 처리해야 할 사안에 대해 먼저 전자가 검토한 뒤 후자에게 이첩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데서 그 같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0317)朴龍雲, 위의 책, 235∼236쪽. 그러니까 고려에서는 이러한 양자간의 권력체계가 비교적 잘 준수되어 서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이 긴밀한 협력 관계를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對王權 규제 기능에 있어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어사대와 낭사는 자신들 성원 가운데에 하자가 있을 경우 자가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숙청이 어떤 때는 상대편 관부의 탄핵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고려시대에 있어서 이와 같은 사건은 痕咎者의 제거에 한하였을 뿐 그로 인하여 대간 상호간에 정치적으로 대립·반목한 사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사료가 상대적으로 적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도 가긴 하지만, 그러나 새로이 朝鮮이 건국되고서는 처음부터 대관과 간관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잦았다는 사실과 크게 비교가 되는 점이다. 이는 역시 제도의 운용과 권력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 면도 없지 않다고 보여 진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대간과 무신간의 관계는 서로 규제 내지는 협력하는 권력구조상의 상대방은 아니었으므로 여기에서 따로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여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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