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3. 중앙 정치체제의 권력구조와 그 성격
  • 2) 중앙 정치체제의 성격
  • (1) 귀족적 성격

(1) 귀족적 성격

 고려 정치체제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는 성종은 왕위에 오른 원년(982)에 京官 5품 이상의 고위 신료들로 하여금 封事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논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응답하여 올린 상소 가운데 하나가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책인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을 주장한 것이었다.0318)李基白,<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大東文化硏究≫6·7, 1969·1970, 157쪽;≪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 그는 현실적인 정치의 이념을 유교에 두면서 귀족들이 그 중심을 이루는 귀족정치의 구현을 건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그의 건의는 널리 알려진대로 성종이 대부분 採納하여 직접 국가의 정책에 반영하였다. 그런 점에서 최승로의 시무책 28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거니와, 그 가장 큰 요소의 하나가 귀족정치였다는 데서 우리는 고려왕조 정치체제의 성격을 대략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치체제의 기본방향이 이러하였던 만큼 각각의 정치조직에 그같은 요소가 반영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실제로 그들 조직에서 귀족적 성격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선 통치의 근간이 된 內史門下省(中書門下省)부터 그의 설치 자체가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儒臣세력이 그 중심기구로 내놓았다는0319)李泰鎭,<高麗 宰府의 成立-그 制度史的 考察->(≪歷史學報≫56, 1972), 40쪽. 사실에서 시사받는 바 크거니와, 그것이 행정기관이 아니라 의정기관이었다는 점은 역시 그같은 면모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안건이 상정되었을 때 국왕은 내사문하성의 재신들에게 의견을 물어 처리하였지마는, 그에 따라 이들은 합좌해 정책을 의논·결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구는 흔히 신라의 和白이나 태조 때의 廣評省에 비유되기도 하거니와,0320)李基白,<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42쪽. 이것은 그의 성격이 관료적이기보다는 귀족적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아 좋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議政의 과정은 비단 내사문하성의 재신간에서 뿐 아니라 중추원 추밀과의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가의 중대사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추가 합좌하여 의논·처리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같은 과정이 議合이라 하여 재추 전원의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정치체제상의 귀족적 성격을 다시 보게 된다.

 臺諫制度도 유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대간은 서경·간쟁이나 시정의 득실을 논하는 기능 등을 통해 감히 왕권을 제약하는 귀족세력의 한 대표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귀족적 성격을 강하게 풍기는 제도의 하나였다.

 다음 관직상으로는 檢校職과 같은 勳職制度에서 귀족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검교직은 문반 5품·무반 4품 이상에 해당하는 관직에 설치된 관직으 로,0321)金光洙,<高麗時代의 同正職>(≪歷史敎育≫11·12, 1969), 132∼133쪽. 이렇게 고위 관직에 직사가 없는 산직을 설정해 놓고 그것의 소지자에게 일정한 경제적 대우와 함께 영예를 부여하던 훈직제는0322)韓㳓劤,<勳官 「檢校」考-그 淵源에서 起論하여 鮮初 整備過程에 미침->(≪震檀學報≫29·30, 1966), 90쪽. 역시 귀족적 성격을 보여주는 한 제도로 이해되는 것이다.0323)李基白, 앞의 책(1975), 46∼47쪽.

 이처럼 고려시대 중앙의 정치체제에서 귀족적 요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고려가 귀족제사회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지만,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렇기 때문에 고려사회의 성격을 그와 같이 규정하는 것이라 말해지고 있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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