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1. 지방 통치조직의 정비와 그 구조
  • 1) 지방 통치조직의 정비
  • (2) 성종대의 지방제도 정비

(2) 성종대의 지방제도 정비

 성종이 지방제도 정비에 착수한 것은 성종 2년 2월이었다. 성종은 원년(982) 6월에 京官 5품 이상에게 각각 封事를 올려, 時務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는데0346)≪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하 6월 갑신. 이때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 중 지방제도에 관한 건의를 받아 들여 지방제도 정비에 착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최승로는 지방제도에 대해서 크게 두가지를 지적하였다. 하나는 정비의 범위에 대한 것으로, 고려 국초 외관을 두고자 하였으나 초창으로 인하여 겨를이 없었는데, 그 결과 향호의 침학이 심하므로 일시에 외관을 보내지 못할지라도 10여 주현에 一官을 두고 그 관에 각각 2∼3員을 두어 愛民하자는 것이었고,0347)문종때 정비된 지방관제에 의하면, 牧에는 使·副使·判官·司錄兼掌書記·醫師·文師가 배치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성종 2년 당시 牧에는 使·副使·判官級의 외관만 배치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른 하나는 정비의 정도를 정하는 것으로, 지방 호족의 家舍까지 법적 제재를 가하자는 것이었다. 성종이 이 건의를 받아 들여,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는 한편 금유·조장을 혁파한 것으로 생각된다.

 12목이 설치된 지역0348)12목 설치 지역은 楊州·廣州·忠州·淸州·公州·晋州·尙州·全州·羅州·昇州·海州·黃州이다.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지방행정상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몇몇 차이가 나는 것을 들면, 통일신라 때에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이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입되고, 황해도 지역이 빠져 있는 반면, 12목 설치 때에는 황해도 지역이 편입되어 있고, 강원도 지역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행정력은 황해도 지역에 浿江鎭을 설치하여 별도로 편제하였던 데 반하여, 고려에서는 국초부터 북방이 중요시되었던 결과였다. 한편 강원도 지역이 빠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성종 2년에 12목을 설치하였으나 전국을 체계적으로 파악·통할하지는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12목 설치 이후 고려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보완 조치를 취하였다. 보완내용은 주로 지방관의 업무를 안정적이고 현실성있게 추진할 수 있는 조치들이었는데, 연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2목 설치 당시에는 외관만을 부임케 하였으나 성종 5년(986)에는 12목에 대하여 처자들을 거느리고 부임케 하여,0349)≪高麗史節要≫권 2, 성종 6년 8월. 지방관이 안정된 생활기반 위에서 지방행정에 전념토록 하였다. 또한 경제적 기반조성에도 힘써 성종 2년 州·府·郡·縣·館·驛에 田地를 지급하였다.0350)이에 더하여 12년에 州·府·郡·縣·驛路에 公廨田柴를 지급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성종 6년(987) 8월에는 12목마다 經學博士와 醫學博士 각 1인씩을 뽑아 보내어 지방 교육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0351)≪高麗史節要≫권 2, 성종 6년 8월. 성종 12년(993)에는 兩京·12목에 常平倉을 설치하여 물가 조절의 기능을 맡게 하였다.0352)≪高麗史節要≫권 2, 성종 12년 춘 2월.

 성종 2년 지방제도 개혁의 다른 한 측면은 향리제 정비에서 볼 수 있다. 국초 호족세력이 강했던 지역에서는 堂大等을 수반으로 하여 실무 하위 기구로서 兵部와 倉部를 두어 자기세력 하의 여러 지역을 지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된 사료가≪高麗史≫권 75, 銓注 鄕職條이다.0353)≪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성종 2년. 이 기사를 도표화하면,<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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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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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도표 중 (?)부분에 해당하는 기사는 없다. 이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부분이 개정이전에는 戶部, 개정이후에는 司戶일 것으로 추정하여 堂大等·大等 아래에 戶部·兵部·倉部가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 기도 하며,0354)李基白,<新羅私兵考>(≪歷史學報≫9, 1955). 堂大等-大等-郎中-員外郎-執事가 상위의 부서이고, 그 아래 兵部와 倉部가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0355)河炫網,<高麗初期의 地方統治>(≪高麗地方制度의 硏究≫, 韓國硏究院, 1977), 11∼18쪽. 그러나 이 기사에 한하는 한, 고려 국초 호족의 향직은 당대등-대등 계열이라는 것은 공통된 이해였다. 그 뒤 금석문을 이용하여 고려 국초 호족직제가 매우 다양하였다는 견해가 속출하였다.0356)金光洙,<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韓國史硏究≫7, 1972).
―――,<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韓國史硏究≫23, 1979).
蔡尙植,<淨土寺址 法境大師碑 陰記分析>(≪韓國史硏究≫36, 1982).
그 결과 고려 국초에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직제가 혼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국초 지방세력들의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성종대 鄕吏職 개편은 바로 이런 다양한 지방세력들을 당대등-대등체제로 묶어서 이해하고, 이를 호장-부호장체제로 바꾸려 한 조치였다.

 성종 2년부터 추진된 지방제도 정비 작업을 바탕으로 성종 14년(995)의 지 방제도 개편이 이루어진다. 성종 14년에 단행된 지방제도 개편의 특징은 지 방행정조직을 節度使制로 바꾼데 있다. 성종 2년부터 실시된 12목에 절도사를 두어 12절도사제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명칭변경이 아니었다. 이 때에 와서 군사적인 면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14년에 이런 조치가 취해진 배경은 확실치 않지만,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군사적인 조직으로 지방 호족세력을 통제하여 중앙집권을 꾀한 조치일 것이라는 설0357)千寬宇,<閑人考-高麗初期 地方統制에 관한 一考察->(≪社會科學≫2, 1958).과 다른 하나는 당시 외관이 파견된 지역에 고려에 호의적인 호족이 지배하였던 곳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들 지방세력을 대소 지방제도의 조정과정에 반영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는 설이 그것이다.0358)李純根,<高麗初 鄕吏制의 成立과 實施>(≪金哲埈博士華甲紀念論叢≫, 知識産業社, 1983), 228∼229쪽. 이 조치와 더불어 성종 14년에 중앙 官階가 文散階로 전환함으로써 지방 향호의 位階를 中央位階와 실질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초기 향리신분의 지위하락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제 행정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10년 후인 목종 8년(1005)에 12節度使와 4都護府, 東西 北界 防禦鎭使·縣令·鎭將만을 두고, 나머지 觀察使·都團練使·團練使·刺史 등이 모두 혁파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그만큼 중앙행정력이 지방에 침투하기 어려운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2절도사제와 더불어 주목되는 성종 14년의 지방제도 개편으로는 10道制를 들 수 있다.≪高麗史≫세가와 지리지에 10도를 정하고 나아가 12주를 취하여 각각 절도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고,≪高麗史節要≫해당 연월조를 보면 각 도에 속하는 주현수를 명기하고 있다. 성종이 12절도사제를 근간으로 하면서 다시 10도제를 실시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10도 제정도 고려의 집권화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성종은 군사적 체제인 절도사제를 바탕으로 하여 지방 호족세력을 통제하며, 동시에 이런 절도사체제를 순찰함으로써 집권화를 굳히기 위한 정책적 배려에서 10도를 제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10도제가 행정구역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 그리하여 그 장관으로서 관찰사를 비정하기도 하고, 전운사를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10도의 장관이 관찰사나0359)李基白, 앞의 글(1966). 전운사였다는 것은0360)邊太燮, 앞의 글(1968).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납득하기 어렵다. 먼저 관찰사설에 대해서는 절도사체제 하에서의 관찰사 기능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唐末의 관찰사는 절도사와 단련사 사이의 외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0361)邊太燮, 앞의 글(1968). “團練使·都團練使·刺史·觀察使 成宗爲州府之職 穆宗罷之”(≪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에서 보이듯이 고려시대의 觀察使도 團練使·都團練使와 병칭되고 있다. 실제 고려 초 관찰사의 구체적인 용례를 보면, 古阜郡이 태조 19년(936)에 瀛州觀察使로 청해진 적이 있었다.0362)≪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全羅道 古阜郡.

 그렇다고 전운사로 보기에도 어려운 몇 가지 점이 있다. 첫째 전운사는 국초에 설치되었다. 국초라는 것은 10도가 제정된 성종 14년 이전일 것이다. 또한 전운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의 세공을 교통로를 통하여 중앙에 전운하는 것이 주임무였다고 생각된다. 둘째 기록에 의하면 전운사는 현종 20년(1029)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10도는 그 뒤에도 소멸되지 않고 잔존하였다. 만약 전운사가 10도의 장관이었다면, 현종 20년 이후에는 장관없는 10도가 존속된 셈이 된다.

 결국 10도제는 일찍부터 성종이 당 태종의 행적에 심취하여, 그 치적을 본받아 실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려에서 10도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고려와 당의 사회적 여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려의 10도제는 실시 직후부터 유명무실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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