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2. 군현제도
  • 1) 경·도호부·목과 군현

1) 경·도호부·목과 군현

 ≪高麗史≫권 56 지리지 서문에서 먼저 5도 양계의 이름을 들고 이어서 그들이 ‘京 4, 牧 8, 府 15, 郡 129, 縣 335, 鎭 29’를 총괄한 듯이 서술하고 있다. 다분히 형식적인 조직이긴 하지만 아래에≪高麗史≫지리지에 보이는 각급 행정구역의 숫자를 도표로 풀어 보면 아래<표 1>과 같다.

  大都護府 大都督府 都護府 知事府 領郡 領縣 屬府 屬郡 屬縣
王 京
楊廣道
慶尙道
全羅道
交州道
西海道
東 界
北 界
1
1
1




1





1

1

3
2
2

1

 






1
 

1




1
 

1
2
2


2
2

5
6
5
3
3
13
26

3
3
8

2
8
6





1
16
12


1




 
1
22
24
13
5
3

 
12
75
89
74
20
14
17
4
合 計 4 2 8 1 2 9 61 30 29 1 68 305

<표 1>

 아울러 이들 행정구역의 관원을≪高麗史≫권 77, 백관 2 외직조에 의거하여 품계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의<표 2>와 같다.0417)邊太燮,≪高麗政治制度史硏究≫(一潮閣, 1971), 137쪽의<표 5>高麗 外官의 構成과 朴龍雲,≪高麗時代史≫(上)(一志社, 1985), 128쪽의 도표 참고.

  3품 이상 4품 5품 6품 7품 8품 9품

都護府·牧
留守(知西京留守事)
使
副守事
副 使
  判官
判官
司錄, 掌書記
司錄, 掌書記
法曹
法曹
醫師, 文師
醫師, 文師
防禦(州)鎭
州府郡
    使
(知事)
副使
 
判官    

       

副將
 

<표 2>

 이들 표에서 고려의 지방 통치조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같은 부·군·현이라 하더라도 내용을 달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부의 경우 지리지에 전체 15부로 일괄 기록되어 있으나, 내용상으로는 군사적인 필요성에 의해 설치된 都護府 계열(도호부·도독부)과 조세, 공부, 역역의 수취 등 민사행정적인 知事府 계열 등 두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대개 전자는 국방상의 요지에, 후자는 주로 물산이 풍부하거나 교통의 요지인 대읍에 설치되고 있다.≪高麗史≫지리지 소재 129개 군은 내용상 防禦郡 44, 知事郡 17, 속군 68로 나누어진다. 방어군은 대체로 여진이나 왜구 등과 접촉이 잦던 지역에 군사적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며, 지사군은 조부, 역역의 수취 등 일반 행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현은 앞의 지사부, 지사군과 같이 독립적으로 민사행정을 수행하는 현령관과 그렇지 못한 속현으로 나누어진다. 고려의 군현제는 기능상 京-牧-知事府-知事郡-縣令官 계열의 민정적 군현계통과 都護府-防禦郡-鎭 계열의 군정적 군현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0418)朴宗基,≪高麗時代 部曲制硏究≫(서울大出版部, 1990).

 이렇게 고려의 군현제도는 그 기능상 군정적인 것과 민정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그 지배 운영방식의 차원에서 독립 관부인 진·현령관급 이상의 관부와 속군현 사이에 커다란 계선이 그어지면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배와 통제는 두 계통의 관부(진·현령관급 이상)에 그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 예속된 속읍에는 진, 현령관급 이상의 관부를 통한 간접적 지배와 통제의 형식을 취하한다는 점이 고려 군현제의 커다란 특징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이의 구체적 운용에 관해서는 현재 다양한 견해가 표명되고 있다. 우선 三京·八牧·四都護 등 체제, 이른바 경·목·도호부가 주목인 계수관(중간기구)으로서 主牧과, 그 아래의 지사부, 지사군, 현령관, 방어군을 관할하는 領郡, 즉 주목과 영군 및 屬縣 등의 3층구조로 이해하기도 한다.0419)尹武炳,<高麗時代 州府郡縣의 領屬關係와 界首官>(≪歷史學報≫17·18, 1962), 320∼323쪽. 일면 이를 인정하면서도 경·목·도호부가 수행한 중간기구로서의 역할은 일반행정 전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제한된 몇 가지 사항(上表하여 陳賀하는 일과 鄕貢을 選上하는 일 및 外獄囚 推檢 등의 부문)에 한정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중앙과 지방 간의 일반적인 행정 사무체계를 중간기구의 거침이 없이 중앙정부에서 영군(主郡)·영현(主縣)으로 直牒되는 관계였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였다.0420)邊太燮,<高麗前期의 外官制>(앞의 책, 1971), 130∼131쪽.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목과 영군 사이에는 행정 명령계통상 실제로 상하의 종속관계가 아니라 상호 등질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고 계수관의 범위를 진과 현령관 이상으로 확대하여 해석하기도 하였다.0421)朴宗基, 앞의 책, 75∼82쪽.

 한편 일부에서는 이규보가 전주목 장서기로 활동할 때 지은<南行月日記>등의 분석을 통해 주목의 계수관이 그 속읍 및 영군현에 대해 역역의 동원을 비롯한 군사적 지휘관, 즉 주현군 지휘권을 행사하고, 外獄囚의 監檢, 영군현의 諸神에 대한 제사의 기능까지 수행하는가 하면, 그 밖의 배의 척수·水村·沙戶·漁燈·鹽市 등을 검열하는 임무까지 지니고 있어 조세행정 일부분의 수행까지 담당하였다고 하면서, 무신정권 당시에도 주목과 영현과의 관계는 상하 종속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0422)金皓東,<高麗 武臣政權時代 地方統治의 一斷面-李奎報의 全州牧 司錄兼掌書記의 活動을 中心으로->(≪嶠南史學≫3, 1987).

 이와 같이 고려의 군현제도는 大邑 중심의 군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국가는 다수의 주읍들을 통일적으로 파악 통제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道制와 界首官을 중심으로 한 按察使制度를 시행하였다. 고려왕조의 계수관은 시대에 따라 증감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3경·4도호부·8목 등의 외관이 그 기능을 담당해왔다. 이것은 전국의 영역을 14∼1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흔히 계수관은 “중앙과 지방주현 사이를 연락하는 중개적인 기능 밖에 담당하지 않았고, 이 역시 예종·인종대 이후 5도 안찰사제가 성립되면서 그의 역할은 크게 약화되어 갔다”고 하면서 “그 界內 所領의 주현관에 대한 관할과 감독권 및 호구·조세·공부 등 일반 행정사무에 대하여서는 별로 관계한 바 없었다”0423)邊太燮, 앞의 책(1971), 137∼139쪽.고 이해하기도 하나, 실상 이것은 계수관과 도의 분리로 상호견제를 통한 효과적 지방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도호부·목은 계수관인 동시에 각기 수령의 임무를 지니면서, 그 명칭에 상응하는 독특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0424)金潤坤, 앞의 글(1983·1984·1988) 참조.

 京 가운데 왕경으로서의 開京을 예외로 돌리면 맨 먼저 마련된 것이 태조 때 설치한 西京(平壤)이었다. 이어 성종 때 東京(慶州)이 설치되고 문종조에 이르러 다시 南京(楊州:지금의 서울)을 둠으로써 3京制를 이루었다. 개경은 흔히 上都라 불리워진 데 반해 서경은 西都, 동경은 東都, 혹은 都下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0425)李奎報,<蔚州戒邊城天神祭文>및<山海神合屈祭文>(≪東國李相國集≫권 38). 이 3경 중에서도 가장 중시된 것은 서경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分司制度라 하여 개경의 중앙정부와 유사한 기구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문종 때에 西京畿 4道 설치와 예종이 學土院을 고쳐 分司國子監으로 삼은 것은 그 일단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서경의 기구와 체제는 「妙淸의 亂」 이후 대폭 개편되면서 독립성을 상실하고 점차 土官職으로 변모되어 가지만, 어떻든 이곳은 국초 이래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0426)河炫綱,<高麗西京考>(≪歷史學報≫35·36, 1967). 본래 고려의 3경제는 풍수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0427)李丙燾,<高麗南京建立に就いて>(≪靑丘學叢≫2, 1930;≪高麗時代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改訂版 高麗時代의 硏究≫, 亞細亞文化社, 1980). 무엇보다도 이들은 도호부, 목과 더불어 계수관으로서 중앙 행정기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대읍의 하나로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군현 조직체계상 그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도호부의 수도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어 일정하지는 않았다. 양계에 둔 安北 大都護府(寧州)와 安邊都護府(登州), 그리고 海州에 설치한 安西大都護府만은 그 존재가 분명하지만 安南都護府(全州)는 곧 목이 되는 대신 뒤에는 樹州가 그 명칭을 얻게 되며, 安東都護府(慶州)도 留守使의 경이 됨으로써 없어진다. 바로 이들 3∼4개의 지역과 廣州·忠州·淸州·晋州·尙州·全州·羅州·黃州의 8목 및 3경이 군현의 상급 행정기구로서 지방통치상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高麗史節要≫성종 2년(983) 2월조에, “비로소 牧을 두고 今有와 租藏을 폐 지하였다. 금유와 조장은 모두 外邑 使者의 칭호이다”라고 한 것에서 목이 처음 설치된 사정을 알 수 있다. 여기서 12목의 始置와 ‘금유·조장’의 혁파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그간 「금유·조장」의 직임을 담당해 왔던 세력들은 대체로 태조의 심복 막료들이었던 소위 「王親權勢之家」들로서,0428)≪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7년 5월 을사. 이들은 유민의 안집과 조세·부역의 독촉·감독 및 「里審使」(각 지방 촌락의 田丁·戶口·寺院田 등 심사) 또 이 밖에 鄕豪(堂大等)의 감시 등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종 초에 이르러 향호들이 매양 공무를 가탁하고 백성을 침해·폭압하므로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외관의 설치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던 것도0429)≪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금유·조장」이 그 동안 자기의 직임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 위에 광종대의 소위 「奴婢按檢法」의 시행은 귀족관인층 내부에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금유·조장」의 폐지와 12목 설치 및 외관 파견 등의 요구가 나오게 된 하나의 동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성종 2년에 12목을 설치함과 동시에 주부군현의 吏職 개편을 단행, 동왕 6년(987) 12목에 각각 경학·의학 박사를 파견하고, 諸村의 大監·弟監을 村長·村正으로 삼음으로써 지방의 토착세력(향리세력)을 관인으로 흡수하여 왕조의 세력기반으로 흡수하고, 지방 거점도시의 육성으로 말미암아 대읍 중심의 군현 조직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읍지방의 토착세력(향리)들은 성장기반이 더욱 확고하게 된 반면에 속읍의 토착세력(촌장)들은 역사의 표면에서 자취를 감추어 몰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12목의 외관은 우선 方伯의 임무를 갖고 있었다. 다음 사료는 이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성종 5년 5월에 하교하기를…너희 12牧과 諸州鎭使는 지금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잡무를 다 중지하고 오로지 농사를 장려하는 일에만 종사하도록 하라. 나는 장차 사신을 보내어 검열 조사케 하여 田野의 荒闢과 牧守의 勤怠로써 상과 벌을 결정할 것이다(≪高麗史節要≫권 2, 성종 5년 5월).

 위와 같이 12목의 외관은 각 지방 「州·鎭使」와 동일한 기능을 띠고 있었 던 方伯에 불과하였다. 이 방백(수령)의 考課 기준은 「전야의 황벽」과 「목수의 근태」 등이었다.

 주지하듯이 성종 14년에 10도를 설치하고 이 도들로 하여금 모두 580여에 달하는 주·현을 소관케 하였다. 각 주·현에는 중앙에서 파견한 상주 외관이든 혹은 향리이든 간에 지방행정을 그들로 하여금 각각 수행케 하였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일정한 통제와 행정체계가 필요하였다. 이에 서경·동경 등지에 留守使를, 楊·海·廣·黃·忠·公·全·尙·晋·羅·昇州 등 12주에 節度使를 각각 파견하여 ‘專制方面, 以行黜陟’ 등의 직임을 수행케 했던 것은≪高麗史≫의 백관지에 나타나 있다. 이후의 군현 조직의 변천에 관해서≪高麗史≫지리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현종 초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5都護와 75道 安撫使를 두었다. 얼마 후 안무사를 없애고 4도호와 8목을 두었다. 이후로 전국을 5도 양계로 정하여 楊廣·慶尙·全羅·交州·西海道와 東界·北界라 하였다. 모두 京 4·牧 8·府 15·郡 129·縣 335·鎭 29이다(≪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이에 의하면 현종 3년(1012)에 동경유수사를 비롯한 12주 절도사는 폐지되고 그에 대신해 5도호부사·75도 안무사 제도가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은 도호부사 체제의 시기로서 안찰사제도가 확립되기까지의 과도기였으며, 도호부사와 안무사의 관계는 뒤의 안찰사와 계수관의 관계와 비슷했을 것이다. 예컨대 현종 3년부터 21년까지 안동대도호부사는 경주·상주·진주 등 3주의 관내를, 또 그 막하에서 위 3주의 防禦使·安撫使 등은 그의 각 관내 군현을 관장하였다. 당시 안동대도호부사의 본영이 상주에 설치되어 있을 때 경주에 방어사를, 또 그것이 경주로 옮겨 왔을 때 상주에 안무사를 각각 두었던 것이다. 그 당시 안동대도호부사는 안찰사와 계수관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으며, 방어사와 안무사 등은 계수관 수령의 기능을 띠고 있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 3경·4도호부·8목 등의 조직정비와 도제의 확립은 지방제도발 전 과정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종전까지는 도와 계수관의 분리가 이룩되지 않음으로써 각 지방의 실상이 은폐·조작되기도 하고, 혹은 중앙에 사실을 왜곡하여 보고하기도 했던 병폐가 종종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계수관과 도의 분리로 상호 견제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3경·4도호부·8목」 등의 조직정비는 곧 계수관체계와 道制의 분리를 위한 조치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을 듯하다. 하여튼 그 두 체제가 서로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鄭道傳(? ∼1398)의 논증이 있어 참고된다.

前朝(고려)에 3유수·8목·4도호부를 두었고, 후에 혹 늘여 설치하여 그 주민을 각각 다스리게 하였는데, 또 안찰사·안렴사를 별도로 파견하여 관리를 규찰하고 소송을 다스리게 하였다. 또 고쳐서 도관찰사로 하였으니 이가 감사가 되었고 주목의 임무는 군현과 더불어 같다(鄭道傳,≪三峯集≫권 6, 經濟文鑑 下, 州牧).

 여기서 「州牧之任」은 군현과 더불어 같다고 한 점에 대해서 먼저 주목해 보자. 이것은 3경유수사·8목사·4도호부사의 기능이 군현의 수령과 같이 각각 그 관내 군현민을 통치하였던 목민관이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경·목·도호부의 최고 통치자는 수령의 직임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수령의 직임만을 띠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관내 계수관으로서의 지위까지 겸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그 계수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3경·8목·4도호부 등의 설치와 때를 같이 하여 안찰사의 제도가 성립되었음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이 안찰사는 3경유수·8목사·4도호부사 등과는 별도로 파견되어 관리를 규찰하고 詞訟을 聽斷해 왔으며, 또 그 명칭은 안렴사·도관찰사·감사 등으로 변천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지방행정 조직상의 특징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경·목·도호부의 계수관 보다 5도의 안찰사가 실질적으로 상위직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수령(계수관) 보다 안찰사의 품계가 낮도록 제도화하게 된 사정을 이해하는데 정도전의 아래와 같은 기록은 대단히 유익한 자료가 된다.

전조의 監司는 혹은 按察이라 칭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按廉이라 칭하기도 했는데, 모두 侍從·郎官으로써 이를 삼았다. 그 관질은 낮으나 권한은 무거워, 스스로 능히 激昂하여 할 만함이 있게 하였다. 이 역시 漢의 部刺史, 宋의 轉運使의 남긴 뜻이었다. 말기에 이르자 법이 오래 되어 폐단이 생기므로 때의 손익에 따라 안렴을 고쳐서 道觀察使로 삼았다(鄭道傳,≪三峯集≫권 6, 經濟文鑑 下, 監司).

 여기서 고려시대의 안찰사는 모두 侍從·郎官으로써 삼았다 하고, 그의 관질은 낮으나 권한을 무겁게 한 것은 스스로 능히 激昂하여 할만함이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한의 部刺史와 송의 轉運使 등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의 “부자사는 秩卑의 연고로 激昂되어 스스로 분발한 때문이요, 權重의 연고로 뜻을 행할 수 있었다”하고 또 송이 전운사를 둔 것도 “한의 부자사의 남긴 뜻이다”라고 했다. 특히 宋의 지방행정이 원활할 수 있었던 건 “비록 監司가 어질어서 다 능히 그 직임을 거행했던 까닭이 있긴 하나 또한 在上者가 激昂·勸勵의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0430)鄭道傳,≪三峯集≫권 6, 經濟文鑑 下, 監司.라고 한다.

 요컨대 고려시대 안찰사의 「秩卑權重」은 격앙되어 스스로 분발하여 그 뜻을 실행하도록 하는데 그 뜻이 있었으며, 또 안찰사 보다 오히려 관질이 높은 외관(在上者)을 둔 것은 격앙·권려의 권한이 있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면적인 명분과는 달리 서로 모순·대립케 하여 감독과 감시를 철저히 도모하자는 데 근본적인 저의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다시 말하면, 관질이 낮은 안찰사와 이 보다 관질이 높은 외관을 상하관계로 하여 상호 모순되게 해 놓은 것은, 그들의 사이에서 있을 법한 수평적 야합을 예방하고 서로간의 감독과 감시를 통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는데 근본적인 뜻이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려의 지방제도가 신라의 「州」 중심의 지방제도에서 탈피하여 도제와 3경·4도호부·8목(계수관제)의 두 체제를 창안 시행하게 된 동기를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 안찰사 제도의 특색의 일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안찰사와 계수관의 관계는 어떠하였겠는가. 결국 도제와 계수관제라는 이원적인 지방제도가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그로 인한 폐단 또한 충분히 예상된다. 즉 이 때 파견된 안찰사들이 각 주·목·군·현 등지의 刺史로부터 長吏에 이르는 이들의 ‘政績勤慢淸濁’을 按檢하고 또 이들의 賢否에 대한 염찰·포폄 등을 할 때 어떤 기준에 입각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안찰사들의 객관적인 임무수행 여부와 관련된 것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진다. 그들의 안검·포폄의 기준 문제와 관련하여 현종 9년(1018) 2월에 새로이 정한 諸州 府員의 奉行六條043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凡選用守令.가 있다.

<제주·부원 봉행 6조> ① 民庶의 疾苦를 살필 것. ② 黑綬長吏의 能否를 살필 것. ③ 盜賊·姦猾을 살필 것. ④ 民衆 중에서 法禁을 범한 자를 살필 것. ⑤ 民衆의 孝悌·廉潔을 살필 것. ⑥ 鄕吏들의 錢穀 散失을 살필 것.

 위의 6조 가운데, ②와 ⑥의 조항은 향리들의 행정능력과 부정행위 등을, 그 밖의 나머지 조항은 民庶의 질고·범법·효제·염결 등과 도적·간활 등의 동태를 각각 지방 수령들이 살펴 방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지방통치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과제들이었으므로, 이 과업을 각 지방의 수령들이 잘 봉행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볼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안찰사제도가 창설되었으므로, 안찰사는 각 지방의 수령들이 「봉행 6조」를 잘 실행하고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黜陟을 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출척의 대상자 중에는 그의 품계보다 높은 수령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안찰사는 5·6품의 侍從·郎官에 불과한 데 비해서 그 黜陟의 대상인 수령 중에는 3품 이상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행정조직면에서 볼 때 위계질서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안찰사 제도상의 결함이요, 이 결함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많은 폐단이 일어났다.0432)≪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凡選用監司.

 지방행정의 운영과정에서 목사가 그의 관내 군현에서 수령 혹은 계수관으로서의 직임을 어떻게 수행하였는가, 이는 이규보의<南行月日記>에 잘 나타나 있다.

① 전주는 옛 백제국이다. 인물이 번호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故國風이 남아 있다. 그 인민은 질박하지 않고 향리는 모두 衣冠士人과 같아 행동거지의 상밀함이 볼만하다.

② 11월 을사일에 비로소 屬邑을 돌아 본 즉 馬靈縣·鎭安縣은 산골 사이의 옛 고을이라. 그 민은 질박하고 야만스러워 얼굴이 원숭이와 같고 杯盤과 음식에는 더럽고 누린내가 나서 蠻貊風이 있으며 질책하면 그 형상이 놀란 사슴과 같아 달아나 숨을 것 같았다.

③ 伊城縣에 들어가니 민호는 凋殘·耗損하고 울타리는 蕭條하며 客館은 草家더라. 향리로 와서 뵙는 자 피로하고 여윈 모양의 4·5인에 불과하니 측은할 뿐이다.

④ 12월에 조칙을 받들어 邊山에서 벌목을 하였다. 변산은 우리나라 재목의 府庫이다. 궁실의 수축과 營建을 위하여 매년 벌채하지 않음이 없으나 아름드리 큰 나무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 항상 벌목을 감독하기 때문에 나를 斫木使라고 부른다.

⑤ 윤 12월 정미에, 또 朝旨를 받아 諸郡의 寃獄을 감찰하였다. 먼저 進禮縣으로 향하였다. …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郡舍에 들어가니 縣令과 尉가 모두 부재중이었다. 밤 2更 무렵에 현령과 위가 각기 8,000步 쯤에서 모두 달려왔다. …술자리를 허락하니 기생이 비파를 타는데 자못 들을 만하였다. …진례현으로부터 南原府에 이르렀다.

⑥ 경신년(神宗 3년, 1200) 3월에 또 수로를 따라 선박을 조사할 때 무릇 水村·沙戶·漁燈·鹽市 등지를 遊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萬頃縣·臨陂縣·沃溝縣 등지에 들어가서 며칠을 머물다가 長沙로 향하였다. …長沙로부터 茂松에 이르렀다. 모두 殘敗한 小郡이었으므로 사실을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 단지 강수를 따라 다니면서 船夫들에게 문의하여 배의 수효를 헤아렸을 뿐이다(이상 李奎報,<南行月日記>,≪東國李相國集≫권 23).

 위의 ①에서 ⑥까지 그 지역은 전주목을 비롯하여 직할 속읍과 영지사부·군·현 등지에 이르고 있다. 우선 ①②③을 보면, 전주목과 그 속읍에서 각각 살고 있는 백성들의 생활 모습과 풍속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 있어 퍽 대조적이다. ②의 馬靈·鎭安 두 현과 ③의 伊城縣은 모두 전주목의 직할 속읍이다. 전주는 인물이 번호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故國風이 남아 있으며, 그 인민은 질박하지 않다고 한 데 비해서, 그 속음인 이성현의 민호는 조잔·모손하고 울타리는 소조하다고 하였으며, 마령현과 진안현 등지의 농민들은 질박하고 야만스러워 얼굴이 원숭이 같고 더러운 냄새도 나서 蠻貊風이 있다는 것이다. 司錄 이규보는 같은 속읍들인 雲梯縣·高山縣·禮(礪?)陽縣·金馬郡 등지를 차례로 돌았다고 했으나, 이 지방민의 생활 모습에 관해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지방민의 생활 형편도 위의 이성·마령·진안 등지의 농민들과 비슷하였기 때문에 되풀이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위 ④의 邊山은 古阜郡의 속읍인 保安縣에 있으며, ⑥의 萬頃縣·沃購縣 등지는 모두 臨陂縣의 속읍이다. 이 임피현과 앞의 고부군은 모두 전주목의 영군현이며, ⑤의 進禮縣도 역시 같은 영현이다. 다시 말하면, ④⑤⑥의 지역 은 모두 전주목의 영군현과 이 영군현의 속읍들이다. 이 지역에서 전주목의 사록 이규보는 朝勅·朝旨를 받들어 벌목과 면옥을 감독하였으며, 수촌·사호·어등·염시를 遊閱하고 선박의 실태를 조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사록의 직임인 동시에 계수관과 영군의 관계인 것이다.

 3경·4도호·8목, 즉 계수관의 사록과 영현의 현령은 다같이 품계가 7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⑤를 보면, 현령은 사록을 만나기 위해서 8천 보나 떨어진 곳에서 달려왔으며, 또 그를 위하여 주연을 베풀어 주기도 하였던 것 이다. 여기서 그 두 관원은 평등의 관계가 아니라 상하의 위치에 있었던 계수관과 영주부군현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다음 사례에서도 살필 수 있다.

 고려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삼별초 정부가 수립되었을때 이 정부가 親蒙 반동적인 관리들을 숙청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 때 金州(金海)의 수령으로 있던 李柱가 두려워 도망가자 동경의 判官 嚴守安이 權知金州事가 되어 민심을 수습했다고 한다. 또 그 다음해인 원종 12년(1271) 1월에 密城郡人들이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기 위해서 같은 군의 副使인 李頣와 淸道監務 林宗(혹은 崔良梓) 등을 살해하고 진주·상주 등지에 통첩을 보내어 호응해 줄 것을 요청하는 등 그 움직임이 점점 격렬해져 그 통첩을 받은 군현들이 모두 바람을 따라 쓰러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한편 金州防禦使 金晅은 保勝兵을 출동시켜 먼저 적로를 차단하고 동경의 판관 엄수안에게 연락을 취하였으며, 그가 이르자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안렴사 李淑眞에게 고하여 토적할 계책을 세웠다고 한다.0433)≪高麗史≫권 106, 列傳 19, 嚴守安·金晅. 금주와 밀성군은 모두 東京留守官의 영군이었다. 동경유수관, 즉 계수관의 판관 엄수안은 금주 수령이 도망가자 권지주사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였고 또 밀성군의 사람들이 반기를 들자 金州守와 함께 진압하기도 했던 점 등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계수관은 관내 영군지역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그것을 수습하였으며, 보승병 즉 주현군을 동원하여 반군을 진압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 경우도 계수관은 안렴사에게 고하고 그의 지휘 감독을 받았던 사실을 우리는 위에서 볼 수 있었다.

 중앙정부는 대읍 중심의 군현제 하에서 향리의 숫적 증가와 재량권의 확대를 방지하고 나아가 속읍의 효과적 지배를 위해 대읍에 수평을 보좌하는 판관·사록·장서기 등의 외관을 파견하고, 이들로 하여금 관내 속읍 및 영군·현에 이르기까지 순찰토록 통제·감독하였던 것이다.

 한편 전국 각지에 파견된 수령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들에 게 租賦와 貢役을 부과·징수하는 문제일 것이다. 중앙정부는 군현조직을 통 하여 전국적으로 양전을 실시하여 군현별로 조세의 수취량을 할당하였다. 그 리고 조세의 수취권을 수령에게 주고 그 실질적 임무를 향리가 수행케 하였으나 그 감독권은 안찰사에게 주었다. 아울러≪高麗史≫食貨志 踏驗損實의 문종 4년(1050) 11월조에 의하면, 작황에 따른 보고체계는 村典→守令→戶部→三司로 된데 반해, 답험은 三司→按察使→別員으로 된 것으로 보아 양전은 대읍 중심의 군현제 하에서 안찰사가 별원을 통하여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군현 지배는 결국 주읍에 의한 속읍 수탈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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