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3. 지방의 중간 통치기구
  • 3) 5 도
  • (2) 5도안찰사의 통치제도

(2) 5도안찰사의 통치제도

 5도안찰사는 양계병마사와 함께 중앙정부와 주현 사이의 중간기구로 정착되었다. 예종 때의 5도는 楊廣忠淸州道·慶尙晋州道·全羅州道·西海道·春州道(交州道)로 편성되었다. 이 5도의 구성은 그 후 부분적인 변동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원형은 대체로 고려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명종 원년(1171)에 양광충청주도가 楊廣州道와 忠淸州道로, 그리고 경상진주도가 慶尙州道와 晋陜州道로 양분되어 7도로 증가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5도안찰사로 복구되었으며, 충렬왕 2년(1276)에 按察使가 按廉使로 바뀌고 충선왕 즉위 후 提察使로 불리웠다가 충숙왕 후년에 다시 안렴사로 환원되었다.

 그러면 고려 중기에 성립한 5도안찰사는 과연 행정적인 지방 중간기구였을까. 학자에 따라서는 5도안찰사제를 부정하고 고려의 道가 행정기구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0600)河炫綱, 앞의 책.
우선 5道制에 대한 반론으로, 5도 이외에 6도·7도·8도 등 그 숫자가 고정되지 않고 또 도명도 楊廣忠淸州道가 아닌 忠淸州道로 불리기도 하며, 交州道도 春州道·江陵道 등으로 혼칭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에 따른 5도제의 변동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이다. 7도란 전술한 바 명종 원년의 분화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고, 6도는 공민왕 5년 江陵道가 存撫使道에서 按廉使道로 바뀌면서 6도안렴사의 칭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군사적인 도의 숫자는 다른 문제다. 도명도 역시 시대에 따라 변경되었으니, 楊廣忠淸州道는 명종 원년에 楊廣州道와 따로이 忠淸州道가 생긴 바 있고, 고종 때에는 아예 양광충청주도를 정식으로 충청주도로 개칭하였으며, 처음의 春州道는 고종 때 交州道로 바뀌었으며 江陵道는 처음 東界에 속한 存撫使道에서 공민왕 때 按廉使道로 된 곳으로 혼동해서는 안될 것 같다. 제도사 연구는 평면적으로 고찰해서는 안되고 시간적인 변화과정을 통해 그 실체를 구명해야 할 것이다(邊太燮, 앞의 글, 1968;앞의 책, 一潮閣, 1971 참조).
그러나 의외로 일찍부터 5도안찰사가 수령과 같은 행정관의 기능을 행사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것은 의종 때 양계병마사와 5도안찰사가 동시에 임지에 출발하여 方物을 貢奉하였으며, 다음 왕인 명종 때에는 구체적으로 그들의 牧民官으로서의 임무가 명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명종 18년(1188) 制에는 양계병마사와 5도안찰사의 직능으로서 ① 民間利病의 咨訪, ② 守令賢否의 黜陟, ③ 寃滯의 審治, ④ 農桑의 勸課, ⑤ 軍士의 撫恤, ⑥ 豪强의 摧抑, ⑦ 歲貢의 징수 등을 들고 있어0601)≪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8년 3월. 이 때 이미 지방행정관의 역할을 담당하였음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명종 18년의 기사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목민관의 기능을 가졌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은 5도안찰사의 기능은 바로 고려 말 우왕 때 憲司의 상언에 표시된 제도안렴사의 직능과 같은 것이었다. 즉 우왕 4년(1378) 헌사의 상언에는 각도 안렴사의 직능으로 ① 軍國重事, ② 民生疾苦, ③ 守令得失, ④ 刑獄爭訟 등을 統察한다고 하였으니,0602)≪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選用監司 신우 4년 12월. 이것은 명종 때의 그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결국 5도안찰사의 직능은 첫째 守令의 賢否를 출척하는 것이고, 둘째 民生의 疾苦를 물어 민간의 利病을 咨訪하는 것이며, 셋째 수령의 寃滯를 심치하여 형옥을 다스리는 것이고, 넷째는 貢賦와 方物을 수납하여 개경으로 수송하는 일이며, 다섯째는 軍士를 통솔하여 군사권도 가진 점이었다. 이것은 안찰사가 수령과 같은 지방행정의 담당자로 ‘按察·守令 臨民之任’0603)≪高麗史節要≫권 19, 충렬왕 원년 6월.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다. 이제 5도안찰사는 같은 지방 행정기구이지만 주현의 수령을 통할하여 중앙정부와 연결하는 중간기구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안찰사와 수령은 같은 臨民之任으로 지방행정관이란 점에서 동일하였다. 원래 안찰사는 수령을 출척하는 직임이었으나 충숙왕 5년(1318) 敎에서는 존무사·제찰사(안찰사)·수령에 대하여 憲臣 金千鎰 등을 파견하여 민간의 질고를 묻고 출척을 엄히 행하라 하여 오히려 안찰사도 수령과 함께 감찰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화하였다. 다만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5도안찰사는 주현 수령의 상부기구로 중간 통치기관이 된 데 있다.

 고려 전기에는 중앙과 주현이 직결되고 있었는데 대하여 후기에는 안찰사를 중간기구로 하여 연결되었으니 그 좋은 예가 戶籍 작성법이다. 즉 국초에는 州郡이 매년 호구와 인민의 수를 조사하여 호부에 올려 호적을 작성하였는데 대하여0604)≪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후기에는 수령이 안렴사에 보고하면 안렴사가 版圖司(호부)에 보고하게끔 바뀌었던 것이다.0605)≪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신우 14년 8월 大司憲 趙浚 등 상소. 또한 鄕貢의 選上도 전기에는 주현의 鄕貢이 계수관에 都會하여 뽑아 올렸는데0606)≪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현종 15년 12월 등 諸條. 후기에는 역시 각 도에서 會試하여 선상케 변하였던 것이다.0607)≪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공민왕 23년 3월 敎. 이와 같이 고려 중기 이후 5도안찰사는 중간 행정기구로 되어 중앙정부와 주현 수령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로 되었던 것이다.

 안찰사가 수령과 같은 「臨民之任」을 가진 행정관리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행정사무를 보는 治所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곧 按察使營이었다. 안찰사는6개월 임기의 「使命之任」이었으나 그가 본도에 부임하면 일단 안찰사영에 도착한 후 도내를 순행하고 다시 환영하여 6개월 동안 본영에 머물면서 행정사무를 보았다. 이것은 안찰사가 하나의 使行이면서 부과된 임무를 마치면 곧 귀경하는 다른 사신과 다른 점이었다. 비록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임기가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 행정관서의 설치를 필요케 한 것이다. 안찰사영은 대체로 도내의 가장 큰 고을인 계수관에 존치되었으며 여기에는 營吏가 있어 사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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