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3. 지방의 중간 통치기구
  • 4) 양계
  • (3) 양계병마사의 변동

(3) 양계병마사의 변동

 고려후기에는 양계 통치제도에 일대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고종 때부터의 몽고의 침략과 북방지역의 점탈에 따른 결과였다. 고종 18년(1231) 몽고의 침입으로 개경정부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본토는 몽고군에 유린당하고 특히 북계지방은 큰 피해를 입어 주진은 海島로 피난하였으며, 몽고에 굴복한 후에는 또한 몽고가 동북면에 雙城摠管府, 서북면에 東寧府를 설치함으로써 양계제는 붕괴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高麗史≫지리지를 보면 몽고군의 침구로 양계 주진이 해도로 入保하거나 남부지방으로 內徙 假寓하였음이 나타난다. 宣州·雲州·博州 등 여러 방어주가 고종 18년(1231) 해도로 입보하였다가 원종 2년(1261)에 출륙하고 있는데, 출륙 후에도 原邑의 폐허화로 돌아 가지 못하고 다른 고을에 假寓하거나 예속되는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피난은 양계 병마사기구도 마찬가지였는데, 동북면병마사는 처음 猪島로 갔다가 뒤에 竹島로 옮겼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고종 45년(1258)에 高州·和州 등 15주 사람들이 저도로 옮겨 살았는데 동북면병마사 愼執平이 성은 큰 데 사람이 적어 방어키 어렵다 하여 다시 죽도로 옮겼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0626)동북면병마사기구가 竹島로 입보하였음은≪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5년 10월 및 安軸의≪關東瓦注≫竹島詩二首 幷序에도 나타나 있다. 서북면병마사기구는 대동강구의 席島와 椵島에 있었다.≪東文選≫권 14, 金之岱의<贈西海按部王侍御伸宣>에는 고종 말에 김지대가 北邊知兵馬事였는데 “北界營在席島作”이라 하여 이 때 서북면병마사영이 석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종 10년 서북면병마사 記官 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도로 들어가 分司御史와 監倉使를 죽이고 병마사와 분도가 도망한 것을 보면0627)≪高麗史節要≫권 18, 원종 10년 10월. 이 때는 서북면병마사기구가 가도에 있었던 것 같다. 석도는 西海道 豊州에 속하고 가도는 西京 三和縣에 속하였으나 양도는 서로 인접하여 병마사영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이 몽고의 침구는 양계의 주진과 병마사제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양계제의 완전한 해체는 몽고의 북계지역 점탈로 이루어졌다. 고종 45년(1258) 趙暉 등이 화주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고에 投附하자 몽고는 여기에 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11년 후인 원종 10년(1269)에 서북면병마사영 기관인 최탄 등이 북계를 들어 몽고에 내부하여 여기에 東寧府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서북면의 동녕부는 21년 후인 충렬왕 16년(1290)에 고려에 환부되었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5년(1356)까지 거의 100년간이나 몽고의 통치하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이 동안 양계는 근본적인 변형이 불가피하였다.

 양계의 주진은 이미 몽고의 침구로 폐허화되고 邑司가 이웃 주현에 寓居하거나 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의 설치는 더 이상 양계병마사의 존재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원종 11년(1270) 이후 양계병마사는 역사상에서 사라지고 그의 예하기구인 분대어사나 감창사·분도장군도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만 명주지방은 쌍성총관부 밖에 있었으므로 여기에는 東界安集使가 설치되어 전국은 5도안찰사와 동계안집사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충렬왕 16년(1290)에 동녕부가 혁파되어 서북면지방이 회복됨으로써 불완전하나마 양계가 복구된 셈이었다. 즉 충렬왕 16년 서북면의 제성 수령이 다시 설치되고 여기에 西北面都指揮使가 임명됨으로써0628)≪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6년 7월. 동계안집사와 함께 양계의 장관이 된 것이다. 단 격이 낮았던 동계안집사는 충렬왕 24년(1298) 충선왕 즉위 2월에 파하여지고 交州道按廉使가 겸하게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하자 새로운 양계장관제가 형성되었다. 이 때 5道按廉使가 제찰사로 개칭되는 동시에 양계의 장관으로 존무사가 설치되었는데, 서북면에는 平壤道存撫使, 동계에는 江陵道存撫使가 설치되어 전국은 5도안찰사·양도 존무사로 편성되었다. 평양도존무사는 平壤府尹을 겸하여 평양에 置司하였고, 강릉도존무사는 처음에 명주에 그 청사를 두었다가 충숙왕 원년(1314)에 登州(安邊)로 옮겼다. 이리하여 쌍성총관부 치하인 화주 이북의 땅을 제외한 북방지역에 불완전하나마 양계제가 재현되었다.

 공민왕 5년(1656) 쌍성총관부가 수복됨으로써 양계는 다시 정상화되게 되었다. 처음 쌍성총관부가 회복되자 화주 이북도 강릉도존무사의 통할을 받게 하였다. 강릉도존무사가 朔方道採訪使를 겸한 것은 이를 나타낸다.0629)鄭道傳,≪三峯集≫권 4, 行狀, 鄭云敬行狀. 또한 오래되지 않아 양자는 하나의 행정구획으로 합하여 졌으니 공민왕 17년(1368) 郭儀는 삭방·강릉도안렴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0630)≪高麗史節要≫권 28, 공민왕 17년 8월. 그러나 결국 공민왕 후년에 가서는 양자는 분리되어 강릉도에는 안렴사가 설치되고 북계에는 따로이 都巡問使가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역시 삭방도는 순전한 국경지대인데 대하여 강릉도는 민사적인 남도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양계의 지방장관은 도순문사로 격상되어 남도의 안렴사보다 그 직위가 높아졌다. 서북면 도순문사는 평양부윤을 겸하고 동북면 도순문사는 和寧府尹을 겸하여 각각 평양과 화령(和州)에 治司를 두었다.

 그러나 양계는 아직도 민사적인 도관찰출척사가 아니라 군사적인 도순문사가 임명되어 차이가 있었다.0631)이 때의 양계의 장관이 都巡問使였는지에 대하여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節制使條에 공양왕 원년에 都巡問使를 都節制使로 바꾸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京官 口傳을 처음으로 除授로 서전임관화시켰으며 사무관인 經歷·都事를 설치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도순문사의 아래 관직으로 元帥를 節制使로 개정하였다 하여 이것이 남도에도 존재하였던 병마직이 아닌가 추측되고, 실제로 공양왕 2년에 韓尙質이 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라 하여 역시 병마직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에 공양왕 원년(1389) 大司憲 趙浚은 양계에도 5도와 같이 관찰사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마침내 서북면과 동북면에도 관찰사가 파견되어 전국이 똑같은 통치기구로 일원화되었다. 그것은 공양왕 2년(1390)에 韓尙質을 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로 임명된 사실로 알 수 있다.0632)≪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12월. 서북면도관찰출척사는 전과 같이 군사직인 都節制使를 겸하고 또 그의 치소인 평양윤을 겸하였다. 東北面都觀察黜陟使의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그도 역시 도절제사와 화령윤을 겸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고려말에는 양계에도 남도와 같은 민정장관인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되어 전국이 단일적인 행정기구로 통일되었다. 공양왕 2년(1390)에 京畿左右道에도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된 바 있다.

 이와 같이 고려의 군사적인 양계의 통치제도는 고려 말에 이르러 민사적인 남도와 같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양계의 군사적인 방어주·진이 일반적인 주·현으로 전환되었으므로 그의 상부구조도 민정화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처음 동계에 속하였던 춘주도가 먼저 남도화되더니 뒤에 강릉도(명주도)도 남도화되었는데, 고려 말에는 나머지 양계 전부가 경기·5도와 함께 도관찰출척사로 일원화되었다. 이것은 고려 지방제도의 발전을 뜻하는 것으로서 비록 고려 멸망 3개월 전인 공양왕 4년(1392) 4월에 모든 제도가 복구될 때 남도에 안렴사가 다시 설치되고 양계에도 다시 도순문사가 설치되어 조선 太宗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발전의 추세는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보면 고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계의 군사적인 특수지방제도가 일반화되는 발전의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邊太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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