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3) 고시과목과 고시방법
  • (1) 제술과

(1) 제술과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고려시대에 문반관료와 기술직을 선발하기 위한 과업은 제술과와 명경과, 그리고 잡과였다. 그러면 이들 각 과업의 고시과목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부터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살피기로 하겠는데, 그중 가장 중시되었던 製述科의 과목부터 알아보면 우선 鄕貢試 등의 초시에서는 5言6韻詩 1수가 부과되었음이 확인된다.0952)≪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그리고 이어서 치른 製述業監試에 대해서는≪高麗史≫권 74, 선거지 2, 과목 2, 國子監試條와 國子試之額條에 보이듯이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대체적으로 6운시와 賦나, 아니면 10운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응시하는 제도였다고 이해된다.0953)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
許興植,<高麗 禮部試의 諸業別 出題와 及第者의 進出>(≪白山學報≫20, 1976;≪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95∼96쪽).
朴龍雲,<高麗時代의 科擧-製述科의 運營>(≪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1990), 248∼250쪽.

 이러한 예비고시를 통과한 擧子들이 치르는 본고시인 禮部試製述業(東堂試製述業)의 과목에 관해서는≪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등에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즉 그것에 의하면 과거제가 처음으로 도입되는 광종 9년(958)에는 詩·賦·頌·時務策이 고시과목이었던 것을 알 수 있거니와, 그 2년 뒤인 왕 11년에는 그 중 시무책이 제외되었다가 다시 왕 15년에 추가되며, 성종 6년(987)에는 송이 제외되고 있다.

 그러다가 고시과목을 포함한 과거제에 큰 폭의 개정이 있는 것은 목종 7년(1004)이었다. 즉, “(목종) 7년 춘3월에 科擧法을 개정하였다. 이전에는 늘 春月에 試取하였으나 혹 가을 (또는)겨울에 이르러서야 放牓하였었는데, 이 때 와서 비로소 3월에 科場을 개설하여 (10일간) 문을 폐쇄하고는, 1일에 禮經 10조를 貼試하고, 다음날에는 시·부를 시험하며, 하루를 지나 시무책을 시험하고, (10일이 되어서) 科等을 결정하여 아뢰고 문을 열도록 정하였으며, 明經 이하의 諸業은 전년 11월에 시취한 뒤 진사와 같은 날에 방방하도록 정하고, 그를 恒式으로 삼았다”고0954)≪高麗史節要≫권 2.≪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목종 7년 3월조에도 같은 기사가 실려 있는데, 다만 이곳에는 인용문에 표시해 두었듯이 ( )부분인 “10일이 되어서”가 뒤에 나오고, 끝의 “그를 恒式으로 삼았다”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했듯이 과거의 설행·방방 기일과 함께 과목도 첫 날에 예경 10조, 둘째 날에 시·부, 그리고 하루를 지나 넷째 날에 시무책을 고시하도록 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각 과목을 3場으로 나누어 고시하도록 정한 것은 새로운 제도로서 주목되거니와, 아마 이 이전에도 여러 과목을 한꺼번에 치르게 할 수 없었던 이상 비슷한 조처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나 3장제로 규정화되어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가 않다.

 그 뒤에도 고시과목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하지만 그 하나 하나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위에서 소개한 부분까지를 일괄하여 고시과목의 변천사항을<표 2>로 제시하여 두도록 하겠다.

 이들 고시과목에 대해서는 脚註를 통해 설명하였듯이 논자들 간에 이견을나타내고 있을 뿐더러 시기에 따라서도 一起一伏이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크게 볼 때 禮經·6經義·4書疑 등의 경학과 시·부·송 등의 문예, 그리고 시무책·책문·대책 등의 시무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이 세 분야를 초장·중장·종장의 3장으로 구분하여 고시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제술과 응시자들은 경학에 대한 이해 정도와 문학적 창작력 및 정치적 식견에 걸치는 종합적인 심사를 받았던 것이라 하겠다.

年 代 \ 三 場 初 場 中 場 終 場
光 宗 9년(958)
  〃  11년(960)
  〃  15년(964)
成 宗 6년(987)
詩·賦·頌 및 時務策
詩·賦·頌
詩·賦·頌 및 時務策
詩·賦 및 時務策
穆 宗 7년(1004)
顯 宗 원년(1010)
  〃  10년(1019)
睿 宗 5년(1110)
  〃  14년(1119)
仁 宗 5년(1127)
  〃  14년(1136)
  〃  17년(1139)
毅 宗 8년(1154)
忠肅王 7년(1320)
忠穆王 즉위년(1344)
恭愍王 11년(1362)
 〃  18년(1369)
禑 王 2년(1376)
 〃  12년(1386)
禮經 10條(貼經)
〃  〃  〃
〃  〃  〃
 〃  〃  〃0955)許興植은 앞의 글(1976), 94쪽에서 「詩」만을 들고 있는데 비해 趙東元은<麗代 科擧의 豫備考試와 本考試에 對한 考察>(≪圓光大論文集≫8, 1974), 234쪽에서 「詩·賦」를 함께 들고 있는데, 후자가 옳다고 생각된다.
經 義0956)趙東元은 위의 글에서 詩·賦를 각기 初場·中場의 과목으로 보았으나, 그 보다는 許興植의 위의 글에서처럼 이들은 모두 中場의 과목이고 初場은 역시 禮經 10條가 부과되었다고 이해하는 게 옳을 것 같다.
〃 
〃 
〃 
論·策중 하나
〃 〃 〃
6經義·4書疑
〃  〃
 〃  〃0960)공민왕 18년 이후에 계속하여 初場에 ‘6經義·4書疑’가 부과되었는지도 분명치가 않다. 이 부분 역시 許興植과는 달리 파악하고 있는데, 앞으로 더 검토하여야 할 과제로 생각된다.
〃  〃
〃  〃
詩·賦

詩·賦0957)許興植은 위의 글에서 經義를 곧 6經의 經義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되나 기록상으로 그 점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論·策 중 하나
經 義

古 賦
0959)許興植은 위의 글에서 ‘古賦’를 中場, ‘詩·賦’를 終場의 과목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그렇게 되면 賦를 두번이나 고시했다는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古賦를 제외시키고 詩·賦를 분리하여 보았으나 물론 확실치는 않다. 이같은 不安은 그 이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더구나 그것은 許興植의 이해와 사뭇 달라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時務策





 〃0958)趙東元은 앞의 글(1974)에서 ‘論·策中의 하나’로 기술하고 있으나, 그러나 역시 許興植의 위의 글에서처럼 ‘論’으로만 이해하는 게 옳을 듯하다.
詩·賦

策 問


對 策

策 問

<표 2>禮部試製述業의 考試科目 變遷表

 한데 이같은 과정에서 응시자들은 三場連卷法이라 하여 초장 및 중장·종장 모두를 차례로 합격해야 급제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인종 14년)에 判하여 무릇 제술업은 經義·詩·賦를 連卷 試取토록 하였다”든지0961)≪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의종 8년 5월에) 국학생은 6行을 고사하여 14分 이상을 쌓은 사람에게는 종장에의 直赴를 허락하여 그 액수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였으며, 인하여 3장연권법에서 제외시켰다”고0962)≪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및≪高麗史節要≫권 11. 한 것과,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高麗史≫鄭夢周傳에 우왕 11년(1385)의 기사로 “故事에 매번 一場을 시험할 때마다 문득 심사하여 出榜하는데 초장의 불합격자는 중장에 들어 갈 수 없었으며 종장 역시 같았다”고0963)≪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 한 사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장연권법이 철저히 시행되는 한 응시자들에게는 초장·중장·종장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과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최종적인 과정일 뿐 아니라 科次가 정해지는 제3장이 가장 중요하였으며, 따라서 여기에서 어느 과목을 부과하느냐 하는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특히 여말에 성리학이 도입되고 새 정치세력이 태동함에 따라 詞章 중심·詩賦 존중에서 經學 중심·時務 존중으로 학풍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심하였지마는, 이처럼 과거의 고시과목은 학풍과는 말할 것 없고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퍽 컸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들 각 과목의 고시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는데, 거기에는 구술시험과 필기시험의 두 가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부·송·시무책·책문 등은 필기시험으로 치러졌으며, 예경·6경의·4서의 등 경학은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학의 경우 구술시험에는 다시 경서의 의리를 구두로 묻고 답하게 한 口義(口問口對·講經)와 경서의 본문 또는 註疏를 1행만 남겨 놓고 앞뒤를 덜은 위에 또 그 1행 중의 몇 자를 덮고 알아 맞추게 한 貼經(帖經)의 두 방법이 있었으며, 필기시험에 있어서도 경서의 의리를 필기로 답하게 한 단답 형식의 墨義와 경서의 본문을 내어 놓고 그에 대한 해석을 가하면서 論을 세우게 한 논문식인 經義(義疑·製述)의 두 방식이 있었다.0964)이에 대해서는 曺佐鎬,<科擧 講經考-近朝鮮 初期의 士風에 對하여->(≪趙明基華甲紀念 佛敎史學論叢≫, 1965), 621∼622쪽 및<李朝 經學振興策의 一面-특히 科擧의 講經을 中心으로->(≪成大 人文科學≫3·4, 1973·1974), 98쪽 참조. 이 가운데에서 고려 때 채택한 방법은 앞서 제시한 예부시제술업의 고시과목 변천표에서 보였듯이 貼經과 經義였다. 즉 목종 7년부터 예종 13년까지 부과한 예경 10조는 첩경으로, 예종 14년 이후는 줄곧 경의의 방식으로 고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구술시험과 필기시험은 각기 단점을 안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 私情이 개입되기 쉽고 채점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 등의 문제가 제기된 반면 후자로 할 경우 유생들이 경서는 익지 않고 모범 답안집인 抄集만을 보는 등 갖가지 폐단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초에는 경학의 시험을 講經으로 할 것인가 製述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廷臣들 간에 심한 논란이 있었으며, 그에 따라 여러 차례 변경이 되었다 한다.0965)曺佐鎬, 위의 글. 비슷한 문제는 고려조에서도 있었을 듯싶은데, 그러나 이 점을 알아 볼 수 있는 기록은 별로 눈에 띄지 앉는다.

 시험의 채점방식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는 기록도 고려 때의 것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부문 역시 조선 초의 사료를 참고로 할 수밖에 없는데, 구술시험인 강경의 경우, 몇 번의 변경을 거쳐≪經國大典≫에 실린 내용을 보면 通·略·粗·不의 4등급으로 나누어 通은 2分, 略은 1分, 粗는 0.5分으로 계산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응시자가 4서 3경에서 모두 통을 받으면 14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通은 ‘句讀·訓釋이 모두 精熟하고 旨趣에 融貫하여 辨說에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 경우이며, 略은 ‘句讀·訓釋이 모두 분명하고 비록 大旨에는 통하나 融貫에 이르지 못했을 때’, 그리고 粗는 ‘旬讀·訓釋에 모두 差誤가 없고 講論은 비록 該通하지는 못하나 一章의 大旨를 잃지 않았을 때’ 얻는 성적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수험생에 대한 질의·응답이 끝날 때마다 시관들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상기한 통·략·조·불을 쓴 木牌[講籤]를 내밀면, 그것을 수합해 다시 등급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 원칙은 강첨의 수가 많은 쪽의 등급을 취하고, 강첨의 수가 같을 경우에는 낮은 쪽의 등급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0966)≪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이에 관한 연구로는 曺佐鎬,<李朝式年文科考(上)>(≪大東文化硏究≫10, 1975)가 있다.

 필기시험의 경우, 역시 몇 번의 변경을 거쳐≪經國大典≫에 실린 내용에 의할 것 같으면, 매장마다 上上부터 下下까지의 9등급으로 구분하고 上上은 9분, 上中은 8분, 上下는 7분, 이하 차례로 내려가 下下는 1분으로 계산하는 제도였다. 그러니까 중장 또는 종장에서 두 과목을 보거나, 한 과목을 부과했다 하더라도 그의 중요성·난이도 등에 따라 배수로 채점하면 上上은 18분, 上中은 16분, 上下는 14분, 이하 차례로 내려가 下下는 2분을 얻게 된다.0967)위와 같음. 이와 같은 채점방식이 고려조에서도 적용되었는지의 여부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잘 알 수가 없으나, 유사한 제도가 시행되었을 가능성은 많다고 생각된다.

 구술시험 보다는 덜했겠지만 필기시험에서도 채점시에 부정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이 강구되었는데, 糊名法(封彌法)과 易書法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이 중 전자는 답안지가 어느 수험생의 것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성명을 비롯한 인적 사항 위를 풀로 붙여 봉하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필적 등으로 인해 시관에게 수험생이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試卷을 복사시켜 그 사본을 가지고 채점하게 한 제도를 일컫는다 고려 조정 나름으로 과거를 공정하게 치르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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