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6) 급제자의 초직과 승진
  • (2) 명경과

(2) 명경과

 명경과 급제자의 초직과 승진 문제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이 과업의 전체 급제자수 458인 가운데 성명만이라도 알려진 사람은 10여 인에 불과하며, 다시 그 중에서 관력을 파악할 수 있는 인원은 몇 명에 지나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우리의 목적이 얼마 만큼 달성될 수 있을까 염려되는 바 없지 않으나, 일단은 연대순으로 각자의 관력을 중심으로 한 신상을 먼저 소개하고 문제의 해결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

① 全輔仁(? ∼현종 10:1019)

i) 성종 8년(989) 4월에 羅州牧 經學博士로서 교육에 공로가 많다고 하여 포상을 받음(≪高麗史≫권 3, 世家 3;≪高麗史節要≫권 2).

ii) 明經 출신으로 여러 차례 學官을 제수받은 바 있음(≪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0년 2월).

iii) 현종 4년(1013) 4월에 右常侍(정3품)로 재임하면서 表를 올려 致仕를 청함(≪高麗史≫권 4, 世家 4).

iv) 현종 9년(1018) 11월에 尙書左僕射(정2품)를 제수받음≪高麗史節要≫권 3).

v) 현종 10년(1019) 2월에 右僕射(정2품)로서 卒함(≪高麗史≫권 4, 世家 4:≪高麗史節要≫권 3).

② 朴 某

明經 第一로 급제하여 文林郎(종9품 상)·衛尉注簿同正(종7품)·行平壤府(公?)1041)原文에는 平壤公으로 나오나, 이는 平壤府의 오기로 생각된다. △△錄事로 재임중 隴西李公의 사위가 됨(<隴西李公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83쪽).

③ 金諴(문종 30:1076∼의종 원년:1147)

i) 京兆 金氏로서 贈檢校太子太師인 錫符를 父로, 檢校太子太傅인 殿邦을 祖父로, 尙書右僕射인 吳頲을 外祖로 하여 문종 30년(1076)에 출생함.

ii) 弱冠의 나이로 明經에 擢第되어 秘書校書郎同正(정9품)을 제수받음.

iii) 德州防禦使의 倅를 거쳐 예종 2년(1107)에는 母弟인 中書侍郎平章事 吳延寵의 女眞征伐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典廐令(종7품)이 됨.

iv) 그 후 大府注簿(종7품)→寶城郡刺史→將作注簿(종7품)→順州의 守令→大府注簿(종7품)→尙書都事(종7품)→監察御史(종6품)·西奈分臺→刑部員外郎(정6품)→東京副留守(4품 이상)→秘書丞(종5품)→兵部郎中(정5품)·三司判官→衛尉少卿(종4품)·知刑部事→秘書少監(종4품)·御書檢討官·知戶部事→仁宗朝에 戶部尙書(정3품) 등을 역임.

v) 의종 원년(1147) 11월 8일에 72세의 나이로 卒함(<金諴墓誌>,≪朝鮮金石總覽≫上, 356쪽).

④ 申 淑(?∼의종 14:1160)

i) 高靈郡人으로 인종조에 明經科에 登第함(≪高麗史≫권 99, 列傳 12, 申淑;≪新增東國輿地勝覽≫권 29, 慶尙道 高靈 人物).

ii) 여러 번 옮겨 御史雜端(종5품)이 된 후 言事함(≪高麗史≫권 99, 列傳 12, 申淑;≪高麗史節要≫권 11, 의종 3년 3월).

iii) 의종초에 右諫議大夫(정4품)로서 여러 차례 言事함(≪高麗史≫권 99, 列傳 12, 申淑;≪高麗史節要≫권 11, 의종 6년 3월·6년 4월·6년 7월).

iv) 의종 10년(1156) 10월 현재 知樞密院事(종2품)로 재임함(≪高麗史≫권 18, 世家 18).

v) 의종 12년(1158)에 知門下省事(종2품)가 된 후 鄭諴의 일을 諫함(≪高麗史≫권 99, 列傳 12, 申淑:≪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2년 6월).

vi) 의종 12년 8월에 守司空·尙書右僕射(정2품)로 좌천 당함(≪高麗史≫권 99, 列傳 12, 申淑;≪高麗史節要≫권 11).

vii) 의종 13년 2월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소환됨(≪高麗史≫권 99, 列傳 12, 申淑:≪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3년 2월·13년 5월).

viii) 叅知政事로 致仕함(≪高麗史≫권 99, 列傳 12, 申淑).

ix) 의종 14년(1160) 7월에 죽음. (≪高麗史≫권 99, 列傳 12, 申淑 및 권 18, 世家 18:≪高麗史節要≫권 11).

⑤ 金大齡

위에서 살핀 金諴의 손자로 祖父의 업을 계승하여 明經에 擢第된 후 國學學諭(종9품)가 됨(<金諴墓誌>,≪朝鮮金石總覽≫上, 356쪽).

⑥ 韓 略

i) 처음에는 司憲府 令史(吏屬)였는데, 明經科에 登第한 후 우왕의 외척으로써 관직을 超授함(≪高麗史≫권 111, 列傳 24, 慶復興 및 권 133, 列傳 46, 우왕 2년 윤9월).

ii) 乳媼·宦寺 등에게 부탁하여 持平(정5품)이 되기를 구하므로 우왕이 그를 臺官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慶復興의 반대로 결국은 좌절됨(≪高麗史≫권 111, 列傳 24, 慶復興).

 위에 든 인물들 중 급제 후의 초사직에 대해 시사를 주는 사람은 ② 朴某와 ③ 金諴 ⑤ 金大齡이다. 그 가운데에서 김함이 받은 秘書校書郎同正(정9품)은 기술의 내용으로 보아 급제에 따른 초사직이 분명한데, 그것은 문한직의 하나인 비서성(전교시)의 관직이라는 점과 함께 실직이 아니라 散職인 동정직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다음 朴某의 衛尉注簿同正(종7품)은 초사직인지 아닌지 그 점은 분명치가 않다. 하지만 급제한 그가 당시까지 이 직위를 대유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가령 그것이 초사직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동정직을 제수받았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명경업 급제자에게 주어지던 초직에는 품관 동정직이 많았다고 말할 수 있는게 아닐까. 제술과 급제자에게도 동정직이 초직으로 제수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적은 숫자였다.1042)朴龍雲, 앞의 글(1990a), 287쪽. 그러나 명경과의 경우는, 워낙 사례가 적어서 단정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마는 동정직을 제수하는 비율이 제술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았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할 듯싶다.

 한편 김대령이 급제한 뒤에 받은 國學學諭도 기술의 내용으로 보아 초사직으로 판단된다. 국학학유는 국자감의 종9품 학관직이거니와, 그렇다면 이것은 위의 예들에 비해 매우 큰 혜택을 입은 셈이 된다. 형이 음직을 받을 정도로1043)<金諴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356쪽. 조부인 김함의 지위가 높았던 데다가, 김대령은 바로 그 조부의 업을 이어 계속하여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므로 특별한 대우를 하여 준 게 아닌가 짐작된다. 이처럼 명경과 급제자도 경우에 따라서는 국자감의 학관직과 같은 경직을 초사직으로 제수받기도 했으나 대체적으로는 제술과 급제자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아 동정직에 임명되는 예가 많았던 것 같다.

 이들이 급제 후 초직을 받기까지의 대기 기간에 대해서는 헤아려 볼 만한 구체적인 자료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예종이 왕 2년(1107) 정월에 어머니 柳氏를 왕태후로 책봉하고 다음달에 恩赦를 내리는 가운데, “명경·제술 兩大業의 登科人 및 三韓功臣의 자손으로 4祖 내에 工·商·樂의 이름이 있음으로 해서 미루어져 시행되지 못한 자는 所司에 바라건대 예에 따라 신속히 아뢰고 재가를 받도록 하라”는 조처를1044)≪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3년 2월 신묘. 취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제술업과 명경업 공히 등과를 하고도 초직을 받지 못한 채 적체된 상태의 인원이 왜 많았던 점만은 짐작할 수 있다. 제술과의 경우 고려 전기에는 급제 후 얼마되지 않아 곧바로 초직을 받기도 했으나 2년 또는 4, 5년까지 대기해야 하는 예가 많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추측컨대 명경과 급제자의 경우 역시 비슷한 사정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다음 명경과 급제자의 仕路와 陞進 문제인데, 위에서 김함과 김대령의 경우 각기 초사직부터 문한직의 하나인 비서성의 관직과 국자감 학관직을 제수받은 사실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후의 사로를 보더라도 이들 관직에의 진출은 자유로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역시 김함이 같은 관부의 秘書丞(종5품)과 秘書少監(종4품), 그리고 또 다른 문한직인 御書檢討官을 역임하고 있고, 김대령과 함께 全輔仁도 經學博士를 비롯한 여러 학관직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전보인과 신숙, 특히 김함의 경우 관력이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한직 중에서 가장 중시된 한림원(예문관)과 사관(춘추관)의 관직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때문에 혹자는 이들 관직만큼은 제술과 급제자에게만 허용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명경과 급제자들은 그곳으로 진출할 수 없었고, 아울러 국자감의 國子祭酒(종3품) 같은 중요 직책에도 임명이 되지 않았다는 견해를1045)許興植, 앞의 글(1976), 108쪽. 밝히고 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몇 안 되는 사료에 근거한 결론인 까닭에 마음에 꺼려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현전하는 자료에 입각하는 한 그같은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 이외에 다른 제한은 없었던 것 같다. 보다시피 명경과 급제자들은 諸寺를 비롯하여 6部와 淸要職인 臺諫, 尙書省과 宰樞兩府 등에 두루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직위도 郎舍의 최고직인 常侍(정3품)와 6부의 상서(정3품) 및 재추(2품 이상)까지 승진한 사례가 보여 물론 限品制 같은 제한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고위 관직에 오른 관원수나 승진 속도 등에 있어 제술과 급제자 만큼은 훨씬 못했겠지만 명경과 급제자라 하여 어떤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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