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Ⅳ. 관리 등용제도
  • 2. 과거제
  • 6) 급제자의 초직과 승진
  • (3) 잡과

(3) 잡과

 雜科는 주로 해당 분야의 기술직을 선발하기 위한 과업이었으므로 급제 후에는 당연히 해당 부서의 관직에 취임해 일을 보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점에서 尙書刑部 소속-뒤에는 成均館 소속-의 律學博士(종8품)와 律學助敎 (종9품) 등은 명법업 급제자의 진출로였으리라 생각되며, 또 국자감 소속의 算學博士(종9품)와 중앙 각 관서의 吏屬인 算士 등은 명산업 급제자의 진출로였다고 추측된다. 서업과 관련하여서는 역시 국자감 소속의 書學博士(종9품)나 목종 원년 전시과의 제16과에 보이는 篆書博士 등이 그런 직위로 지목될 수 있을 듯하며, 또 중서문하성과 춘추관·전교시의 이속인 書藝나 예부의 이속인 篆書書者, 중서문하성·예문관 등의 이속인 書手 등도 명서업 급제자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싶다.1046)이 점에 대해서는 許興植, 위의 글, 111∼112쪽 및 趙東元, 앞의 글(1974), 236쪽 참조. 아울러 典醫寺(太醫監)와 奉醫署(尙藥局)의 각종 직위 및 각 州牧에 파견되었던 醫學博士 등은 의업 급제자로 보임되었다고 생각되거니와, 다른 과업 역시 이와 사정이 비슷했으리라 짐작되는 것이다.

 잡업 각과의 급제자들이 취임하는 직위는 이와 같이 대략 하급 관료나 이속직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혹 급제자들이 과연 이속직에도 진출했을까 하는 의문이 없지 않을 듯싶은데, 비록 여말인 공양왕 2년의 일이긴 하나 都評議使司에 經歷司를 설치하고 그곳의 7·8품에 해당하는 典吏를 잡업 급제자중에서 不仕者를 뽑아 충당시켜 書寫를 맡도록 한 조처를1047)≪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都評議使司. 보면 그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되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잡업 각과 모두가 일률적으로 그러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당수 과업의 급제자들은 이속직에도 활발히 진출하였다고 추측되는 것이다.1048)朴龍雲, 앞의 글(1990a), 622쪽.

 명서업 급제자 가운데 관력을 비교적 자세하게 남기고 있는 한 사람이 있어 주목된다. 이자수가 바로 그 장본인인데, 그의 신상·관력 등에 대해서는 홍패와 함께 공민왕 15년 당시의 政案과 우왕 2년 및 8년에 발급된 告身이 전해 올 뿐 아니라1049)李基白 編著,≪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一志社, 1987), 149·220·234·240쪽.≪高麗史≫권 40, 세가 40, 공민왕 12년 윤3월조에는 寢園令(정5품)에 재임하면서 ‘收復京城 二等功臣’으로 봉함을 받은 사실이 실려 있는 등 여러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에 입각하여 초직부터 얼마간의 관력을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i) 충숙왕 17년(충혜왕 즉위년:1330) 11월(?)에 鄕貢擧人으로 明書業 ‘二科第 四人’으로 급제함(紅牌). ii) 충혜왕 즉위년(1330) 9월 4일에 通仕郎(9품)·都染令同正(정8품)·明書業 급제를 받음(政案). iii) 충혜왕 후5년(1344) 6월 22일 有備倉注簿(종8품). iv) 충목왕 2년(1346) 5월 10일 司僕直長(종7품). v)   〃  4년(1348) 5월 15일 奉車直長(정7품). vi) 충정왕 원년(1349) 8월 27일 承奉郞(정6품)·試監察糾正(종6품). vii) 공민왕 11년(1362) 3월 10일 承奉郎(정6품)·典工佐郎(정6품). viii)  〃  〃 〃  3월 25일 朝奉郎(종5품)·豊儲倉使(事?)(종5품). ix)   〃  〃 〃  12월 25일 朝奉郎(종5품)·寢園署令(정5품). x) 공민왕 12년(1363) 윤3월 寢園令(정5품)에 재임하면서 ‘收復京城 二等功臣’에 봉함을 받음.

 이를 검토컨대 우선 그가 급제 후 초직으로 받은 관직이 都染令同正(정8품)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가 급제한 날짜에 대해 정안에는 1330년의 9월로,≪高麗史≫권 73, 선거지 1, 과목 1, 선장에는 10월로, 그리고 다시 홍패에는 11월로 되어 있어 초직을 파악하는 데도 약간의 혼란이 없지 않으나 鄕貢擧人의 자격으로 급제한 사실을 감안할 때 바로 그 해에 받은 도염령동정이 초직이었을 가능성은 많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그것이 산직인 품관 동정일 뿐 아니라 염색 업무를 관장하여 서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都染署의 관직이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만, 그 이후 승진하면서 거친 관직 역시 서업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직위들이다. 물론 초직을 받은 뒤에 다시 有備倉注簿로 취임하기까지에는 14년의 간격이 있으므로 정안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나 그간에 서업 관계의 관직에서 일을 보았으리라 추측되기는 한다. 그러나 서업 급제자라 하여 그 계통의 관직에만 복무한 게 아니라 일반직으로도 널리 진출할 수 있었다는 그 점만은 유의해야 하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다만 당시는 여러 모로 관제가 문란해 있던 때라 그같은 현상이 이런 관제 문란의 소산이었는지, 아니면 일반적인 것이었는지 그 점은 잘 알 수가 없다.

 고려왕조는 공민왕 10년에 이르러 紅巾賊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개경이 함락당하는 국난을 맞는다. 그러나 조정 상하가 단결하여 저들을 물리치고 개경을 되찾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이때 이자수도 공로를 세워 왕 12년 윤3월에 ‘수복경성 2등공신’에 봉함을 받았다. 이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立身에 좋은 영향를 미쳐 그후 빠른 속도로 승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관계로는 종2품의 通憲大夫, 관직으로는 정3품의 判典儀寺事까지 오르고 있다. 이와 함께 충렬왕조에 주자 성리학을 도입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安珦의 父인 安孚가 의업 급제자로서 정3품직인 密直副使까지 지낸 사실도 알려져 있다.1050)≪高麗史≫권 105, 列傳 18, 安珦. 하지만 이 두 예가 일반적인 현상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역시 잡업 각과의 급제자는 대체적으로 자기의 전문분야에 해당하는 관직에 보임되었고, 그 지위도 그렇게 높지 않은 품계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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