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1) 건국 직후의 토지지배관계와 역분전의 설치
  • (1) 토지지배의 내용

(1) 토지지배의 내용

이 장에서 논의하게 될 전시과 체제의 역사적 위치와 성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에서 고려 말에 이르는 시기의 토지지배 관계가 지닌 내용을 살펴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개인의 토지 사유는 인정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地目·土地所在地·面積·四標·所有主 등이 명시된 채 매매나 기진의 사실을 밝히고 있는 각종의 田券과 量案을 통해 확인된다.0001)旗田巍,<新羅·高麗の田券>(≪史學雜誌≫79-3, 1970).
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誌≫16, 延世大 國學硏究院, 1975).
그러나 토지 사유의 흔적, 다시 말해 사유지의 존재는 무엇보다도「民田」이라 불리는 토지에서 찾아진다. 즉 당시의 민전은 일반 백성이 주로 선조로부터 물려 받은 것으로 매매·상속·증여 등이 자유로운 사유지였는데, 고려 전시기에 걸쳐 존재하고, 경기와 5도는 물론 양계 지역에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었으며, 일반 농민인 백정을 비롯하여 양반·노비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계층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0002)民田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 책 제Ⅰ편 제 2장 2절<민전>참조.

그런데 이와 같은 개인의 토지 사유가 고려에 이르러 비로소 이룩된 것은 아니다.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관례 내지는 제도였던 것이다. 元聖王의 陵址 조성에 필요한 능 주변 토지의 매입 사실을 전하는<崇福寺碑>와0003)<慶州 崇福寺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121쪽. 入雲이 京租 100石으로 烏乎比所里의 公書·俊休 등으로부터 14결의 토지를 사들였다는 내용의<開仙寺石燈記>를0004)<開仙寺石燈記>(≪朝鮮金石總覽≫上), 87∼88쪽.
黃壽永 編,≪續金石遺文≫, 95쪽.
통해 토지 매매의 관행을 알 수 있다. 또 12區 500결에 달하는 田莊을 安樂寺에 기증한 신라 말의 승려 智證의 사례와0005)<聞慶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朝鮮金石總覽≫上), 936쪽.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해서 얻은 자그마한 傭田을 법회에 시주한 大城의 예에서0006)≪三國遺事≫권 5, 孝善 9, 大城孝二世父母. 토지의 증여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매매와 증여는 개인의 토지 사유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신라시대에도 고려의 경우와 같이 민의 사유지는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고 생각되며,<新羅村落文書>에 보이는 ‘烟受有田·畓’이 이러한 성격의 토지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 두 시기에 민전으로 대표되는 사유지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나 공공기관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국·공유지도 있었다. 內庄田·公廨田·屯田·學田·籍田 등으로 불리우는 고려 때의 토지와<신라촌락문서>에 나타나는 官謨田·畓 및 麻田 등은 다름아닌 국·공유지였다. 그러나 연수유전·답의 전체 규모와 마전과 관모전·답을 훨씬 능가하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전국 토지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민전이었으며, 국·공유지의 규모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신라·고려시기의 토지제도는 일단 토지사유제를 기반으로 운영되었고, 아울러 토지지배의 일차적인 본질은 매매·상속·증여 등의 소유권 행사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토지사유제에 바탕을 둔 이와 같은 소유권적 지배만을 이 시기 토지 지배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민전을 비롯한 사유지에는 소유주의 소유권 외에도 국가권력에 의해 설정된 收租權이라는 또 하나의 권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수조권은 “넓은 하늘 아래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다”는 동양적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당 토지에서 소정의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권리였다. 국가가 量田을 행하고 양안을 만든 것도 사실은 이러한 수조권을 정확히 확보하고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즉 양안에 해당 토지(사유지)의 소유주를 명기하여 그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보호해 주면서 동시에 그를 조세부담자로 지정함으로써 수조권 행사의 대상을 정확히 파악해 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수조권은 두 가지 형태로 운용되었다. 국가가 직접 수조권을 행사하여 사유지(주로 민전)를 국가 수조지로 편성·확보하는 것이 그 하나인데, 대부분의 사유지가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이 수조권을 양반관료 및 각종의 職役 부담자에게 위임함으로써 개인 수조지로 만드는 것인데, 전시과 규정에 따라 분급된 각종 지목의 대부분의 토지, 예컨대 양반과전·군인전·향리전 등으로 불리는 토지의 실체는 다름 아닌 이러한 개인 수조지로서의 사유지(민전)였다. 다시 말해서 전시과 규정에 따른「土地分給」의 실체는 토지 자체(소유권)의 지급이 아니라 수조권의 지급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유지에 설정된 수조권을 행사하여 국가재정을 운영하고 관료 및 직역 부담자들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었으므로 국가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수조권을 개인의 소유권보다 중시하였다. 본질이 사유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수조지인 민전을「公田」으로 간주한 것은0007)이른바 義倉米收租規定(≪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현종 14년 判)에서 國家收租地로서의 民田을 ‘三科公田’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旗田巍,<高麗の公田>,≪史學雜誌≫77-4, 1968). 바로 이러한 관념의 한 반영이었다. 즉 민전에서의 개인의 소유권을 보고하고는 있었지만, 수조권을 국가가 가지고 있는 한 그 민전은 국가의 지배 하에 있는「공적인 토지」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수조권의 지급」에 불과하면서도「토지를 분급」한 것처럼 기술한 전시과 규정도 사실은 이러한 인식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비록 科田法 규정이기는 하지만 개인 수조지인 민전의 소유주를 ‘佃客’이라 하고 그 수조권자를 오히려 ‘田主’라 표기한 것이라든지, 전객의 사망이나 移徙·惰農 등으로 인해 수조를 실현할 수 없을 때에는 수조권자인 전주가 임으로 처분할 수 있게 한 조치 등에서000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국가가 수조권을 통한 토지지배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가를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토지지배관계를 고찰함에 있어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의 내용은 소유권에 의한 그것에 못지 않게 중시되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전시과 규정에 따른 토지분급의 실상이 해당 토지에서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수조권의 지급이었다고 파악되는 이상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 시기 토지지배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소유권적 지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국가의 수조권이 아무리 강력하고, 과전법에서와 같이 수조의 실현을 위해 소유권의 일부가 제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세납부의 의무를 이행하는 한 개인의 소유권 행사가 어떤 제한을 받을 리 없기 때문이다. 토지사유제에 입각한 소유권적인 지배를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수조권을 매개로 한 또 하나의 지배관계를 설정한 토지지배, 이것이 바로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가 지닌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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