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3) 목종 원년의 전시과-개정전시과-
  • (2) 개정전시과의 내용과 특징

(2) 개정전시과의 내용과 특징

시정전시과의 경우와 같이 개정전시과의 지급 내역 또한≪高麗史≫권 78, 食貨志 1, 田制 田柴科條에 자세히 보이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

支給額 受 給 者
田地 柴地
1 100 70 內史令 侍中
2 95 65 內史侍郞平章事 門下侍郞平章事 致仕侍中
3 90 60 參知政事 左右僕射 檢校太師
4 85 55 六尙書 御史大夫 左右散騎常侍 大常卿 致仕左右僕射 致仕太子太保
5 80 50 秘書監 殿中監 少府監 將作監 開城尹 上將軍 散左右僕射
6 75 45 左右丞 諸侍郞 諫議大夫 大將軍 散六尙書
7 70 40 軍器少卿 大常少卿 給舍中丞 太子賓客 太子詹事 散卿 散監 散侍郞
8 65 35 諸少卿 諸少監 國子司業 諸衛將軍 太卜監 散軍器監 散上將軍 散太子庶子
9 60 33 諸郎中 軍器少監 秘書丞 殿中丞 內常侍 國子博士 中郎將 折衝都尉 太醫監 閣門使 宣徽諸使判事 散少卿 散少監
10 55 30 諸員外郞 侍御史 起居郞 起居舍人 諸局奉御 內給事 諸陵令 郎將 果毅太卜少監 太史令 閣門副使 散郎中 散大將軍 散閣門使 散太醫監 散太子 諭德散太子家令 散太子率更令 散太子僕
11 50 25 殿中侍御史 左右補闕 寺丞 監丞 秘書郞 國子助敎 太學博士 太醫少監 尙藥奉御 通事舍人 宣徽諸使使 太子中允 中舍人 散員外郞 散太卜少監 散太史令 散諸奉御 散閣門副使
12 45 22 大常博士 左右拾遺 監察御史 內謁者監 六衛長史 六局直長 軍器丞 太子洗馬 四官正 散諸衛將軍 散寺丞 散監丞 散太醫少監 散尙藥奉御 散宣徽諸使使
13 40 20 主書 錄事 都事 內侍伯 寺注簿 監注簿 四門博士 太學助敎 中尙令 京市令武庫令 大官令 大倉令 典廐令 供御令 典客令 大樂令 諸陵丞 別將太卜丞 太史丞 侍御醫 尙藥直長 內殿崇班 大理評事 閣門祗候 宣徽諸使副使 散直長 散中郎將 散折衝都衛 散四官正 散藥藏郞 散典膳郞 散內直郞 散宮門郞 散典設郞
14 35 15 六衛錄事 正八品丞 正八品令 內謁者 東西頭供奉官 散員 指揮使 協律郎 太子監丞 散寺注簿 散監注簿 散郎將 散果毅 散內殿崇班 散閣門祗候 散太卜丞 散太史丞 散侍御醫 散尙藥直長 散宣徽諸使副使
15 30 10 (從)八品丞 (從)八品令 秘書校書郞 四門助敎 諸衛校尉 靈臺郞 保障正 挈壼正 太醫丞 太醫博士 律學博士 左右侍禁 左右班殿直 散正八品 散別將 散指揮 散供奉官
16 27   大祝 司廩 司庫 九品丞 九品主事 九品錄事 秘書正字 製述登科將仕郞 明經登科將仕郞 書學博士 算學博士 司辰 司曆 卜博士 卜正 監候 食醫 醫正醫佐 律學助敎 篆書博士 宣徽諸使判官 諸衛隊正 殿前承旨 中樞別駕 宣徽別駕 銀臺別駕 散校尉 散左右班殿直 散侍禁
17 23   諸業將仕郞 令史 書史 監事 監作 書令史 楷書內承旨 客省承旨 閣門承旨 借殿前承旨 親事 內給事 馬軍 散殿前承旨 散隊正
18 20   散殿前副承旨 散大常司儀 散大常齋郞 散國子典學 知班 注藥 藥童 軍將官 通引 廳頭 直省 殿驅官 堂引 追杖 監膳 引謁(等 流外雜職) 諸步軍
科外 17   不及此限者 皆給田十七結 以爲常式

<표 1>始定田柴科 (단위:결)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개정전시과의 지급대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대체로 官人層·吏屬層·軍人層의 세 계층으로 나누어진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관인층에는 실직에 종사하는 관원은 물론이고, 檢校·同正職만을 가진 관인과, 관직은 없고 散階만을 소유한 관인까지 섞여 있어 주목된다. 제3과의 檢校太師와 제5과의 散左右僕射 이하로 앞에「散」字가 붙은 관직의 실체는 이른바 검교직·동정직으로 불리는 산직이고,0066)金光洙,<高麗時代의 同正職>(≪歷史敎育≫11·12, 1969) 및 李成茂,≪朝鮮初期 兩班硏究≫(一潮閣, 1980), 137∼138쪽.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의 실체를 法官 이전의 前職官이거나 轉補待期 중에 있는 待遇官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 1980, 43쪽). 제2과와 제5과의 致仕侍中·致仕左右僕射·致仕太子太保는 현직에서 떠나 산계만을 소유하고 있는 致仕職이었으며, 또 제16과와 제17과에 보이는 製述·明經·諸業의 將仕郞은 登科는 했지만 아직 실직에 나가지 못하고 산계만을 보유하고 있는 관인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 제16과 이하에 나오는 이속·군인층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실직에 종사하는 관원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처럼 산직이나 치사직만을 가진 관인이 실직을 소유한 관원과 함께 개정전시과의 지급대상에 포함되기는 하였지만 양자가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산직과 치사직은 같은 관품의 실직에 비해 대체로 1∼4단계 낮은 과등을 받게 되어 있었으며, 특히 치사직의 경우는 전시의 지급이 고위 관품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개정전시과는 관직, 그 중에서도 실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제16과부터 제18과에 걸쳐 고루 배치되어 있는 이속층은 시정전시과에서「雜吏」로 분류되어 있던 존재들인데, 크게 胥吏職과 流外雜職으로 나누어진다. 즉 16과의 主事·錄事·別駕와 17과의 令史·書史·監事·書令史·承旨 등은 서리직이며, 18과를 받은 知班·注藥·藥童·通引·殿驅官·堂引·監膳·引謁 등은 유외잡직이었다.0067)이들 胥吏職과 流外雜職에 대해서는 金光洙,<高麗時代의 胥吏職>(≪韓國史硏究≫4, 1969) 및 洪承基,<高麗時代의 雜類>(≪歷史學報≫57, 1973) 참조. 제16과에 속한 주사·녹사·별가 등이 문종 이후와는 달리 목종 당시에는 9品의 品官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기존의 연구에 입각하여 일단 서리직으로 파악해 둔다. 그리고 군인층은 馬軍과 步軍으로 구분되어 제17과와 제18과에 각각 배속되어 있는 바, 이렇게 군인이 전시과의 정식 대상자로 편입되어 있는 것 자체가 개정전시과의 뚜렷한 특징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왜냐하면 시정전시과에서는 군인의 존재를 찾아 볼 수 없으며, 비록 15결의 전지를 일률적으로 받는 ‘其未及此年科等者’의 범주에 군인이 포함되었다고 하는 견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限外科일 뿐 정식 대상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0068)이에 대해서는 앞의<경종 원년의 전시과>항 참조. 이처럼 이 때에 이르러 군인층이 전시과의 정식 수급 대상자로 포함된 것은 아마도 성종 연간에 거란과의 항쟁을 겪으면서 군인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는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그 14년에 성립된 6위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군인층은 관인이나 이속층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집단이었으므로 그들이 전시과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매우 큰 것이었다. 따라서 군인은 관인과 더불어 개정전시과의 핵심을 이루는 계층이었다고 하겠다. 개정전시과의 전문에 문무양반과 함께 군인이 언급되어 있는 것도 바로 군인층이 지닌 이러한 비중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군인층이 어떠한 성격을 지닌 존재였는가에 대해서는 현재 서로 다른 두 견해가 대립되어 있어 무엇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즉 이를 농민이 아니라 국가적 관료체계의 말단에 위치하는 계층으로 간주하는 견해가0069)李基白,≪高麗兵制史硏究≫(一潮閣, 1968). 있는가 하면, 兵農一致를 특색으로 하는 府兵制 하의 府兵과 같은 성격의 농민이었다고 보는 주장도0070)姜晋哲,<高麗初期의 軍人田>(≪淑明女子大學校論文集≫3, 1963).
―――, 앞의 책, 109∼134쪽.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개정전시과에서는 관직을 중심으로 전시가 분급되었으므로 당시 관직, 특히 실직을 가진 관원은 모두 여기에 망라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표 1>을 잘 분석해 보면 마땅히 포함되었어야 할 관직(관원)이 누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중추원과 三司 소속의 관직이 완전히 빠져 있다. 성종 10년에 설립된 중추원에는 설립 당시부터 使·副使와 左·右承宣 등의 관원이 두어졌으며,0071)朴龍雲,<高麗의 中樞院 硏究>(≪韓國史硏究≫12, 1976). 삼사 역시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므로0072)邊太燮,<高麗의 三司>(≪歷史敎育≫17, 1975). 개정전시과에 이들 관사의 관원이 당연히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 밖에 지방관도 누락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방관은 이미 성종 초년부터 파견되었던 만큼 이들 또한 당연히 포함되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산직은 들어 있으나 정작 실직이 빠져 있는 경우도 있다. 군기감의 경우가 그 일례이다. 즉 제8과에 散軍器監이 있는데 정작 군기감은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실직은 포함되었으나 산직이 누락된 경우도 적지 않다. 제3과의 左右散騎常侍와 제8과의 太卜監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이 같은 누락의 이유가 무엇인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기록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일부의 양반직만이 아니라 향직도 앞의 표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일견 향직에 대한 전시과 지급이 개정전시과에서는 배제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鄕職의 大丞 이상은 죽은 뒤에, 左丞 이하 元尹 이상은 70세 이후에야 田丁을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다”는 현종 19년 판문을007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주목할 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현종 19년이라 하면 개정전시과가 시행되고 있던 시기이며, 전정은 전시과의 전시와 그 실체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므로0074)武田幸男, 앞의 글.
―――,<高麗田丁の再檢討>(≪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결국 개정전시과 체제 하에서도 향직을 가진 자에게 전시가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향직이 시정전시과와 갱정전시과의 지급 대상에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0075)엄밀히 말한다면 시정전시과에는 鄕職의 전신인 국초 이래의「官階」, 즉 文散階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쓰여 온 고려 고유의 관계를 소유한 자에게 지급되었다. 개정전시과에서도 이들에게 전시가 지급되었을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정전시과 규정에 이것이 빠져 있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데, 역시 기록의 탈루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은가 한다. 이렇게 볼 때 개정전시과의 지급대상은 앞의 표에 제시되어 있는 것보다 광범위하며 많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개정전시과 규정은 시정전시과와는 달리 분급기준이 단일화됨으로써 매우 체계적인 분급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전의 전시 지급에 있어 중요한 지급기준이었던 공복과 재래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품이라는 막연한 요소도 제거하고, 오직 관직과 위계의 고하만을 기준으로 전시과의 모든 수급자를 18개의 科로 나눈 뒤, 각 科等의 전시액과 수급자를 구체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18개의 과등은 정·종 9품의 18등급과 일정한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주목된다. 반드시 그리고 정확하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반의 실직을 중심으로 하여 제1과에는 종1품, 제2과에는 정2품, 제3과에는 종2품이 배치되고0076)이렇게 제1과에 정1품이 아닌 종1품부터 배치된 것은 고려에는 실제로 정1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하 이러한 순차로 내려가는 원칙을 좇아서 과등과 관품이 대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종1품인 內史令·侍中이 제1과를 받고, 정2품인 內史·門下省의 侍郎平章事가 뒤를 이어 제2과를 받았으며, 종2품인 參知政事와 정3품인 6尙書·御史大夫가 각각 제3과와 제4과를 받게 되었다.0077)李佑成,<閑人·白丁의 新解釋>(≪歷史學報≫19, 1962). 그러므로 18과등은 당시에 이미 확립되어 있던 문산계의 관품 구분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이러한 원칙에 어긋나는 예외도 적지 않다. 예컨대 문종대의 관품을 기준으로 종3품인 左丞·右丞이 제6과를 받는 반면에 정4품인 少府·將作 監은 오히려 제5과를 받고 있으며, 종4품인 少卿·少監·國子司業 등이 정5품의 과등인 제8과를 받고 있다. 또 종5품인 諸陵令과 太史令이 정6품의 과등인 제10과에 배정되어 있고, 정7품직인 國子博士는 종5품의 과등인 세 단계 위의 제9과에 배치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현상은 무반직에서도 나타난다. 즉 정3품인 上將軍과 종3품인 大將軍, 정4품인 諸衛將軍, 정5품인 中郎將이 각각 1∼2단계 아래인 제5과·제6과·제8과·제9과에 들어 있다. 이 밖에도 1∼3단계 위 혹은 아래의 과등에 배치된 관직은 꽤 많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개정전시과의 각 과등에는 관품이 다른 관직이 다양하게 배열되어 있다. 일례로 정5품의 과등인 제8과에는 산직을 제외하고도 종4품의 소경·소감·국자사업과 정4품의 제위장군 및 종3품의 태복감이 섞여 있는데, 정작 정5품의 관직은 빠져 있다. 그러므로 18과등의 구분을 관품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0078)官品과 科等이 일치하지 않는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강조하여 改定田柴科의 18科 區分은 관품이 아니라 班의 차이와 職種·職分 등 직능의 개별 특수성을 고려하여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朴菖熙,<高麗의 兩班功蔭田柴去의 解釋에 再檢討>,≪韓國文化硏究院論叢≫22, 1973). 그러나 정8품의 丞·令이 제14과를, 종8품의 丞·令이 제15과를, 정9품의 丞이 제16과를 받도록 규정한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관품과 과등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등의 배정에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목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사이에 적지 않은 관품의 변동이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일치하지 않는 현상은 문종대의 관품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高麗史≫百官志에는 문종 이후에 정해진 관품만이 소개되어 있어 그 이전의 실정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0079)이제까지 열거한 각 관직의 관품도 거의 모두 문종대의 품계이고, 丞·令의 정8품·종8품·정9품만이 목종 원년의 관품이었다. 그런데≪高麗史≫刑法志 避馬式條를 통해 몇몇 관직의 목종 때 관품이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즉 덕종 2년에 정한 피마 규정은0080)≪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避馬式. 소경·소감·사업 등이 문반의 정5품이었으며, 제릉령·태사령은 정6품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상장군은 종3품, 대장군은 정4품, 장군은 정5품, 중랑장은 종5품의 무반직이었음도 보여준다.0081)상장군·대장군과 장군은 각각 문반의 종3품·정4품·정5품에 비견되어 있으며, 중랑장은 문반의 常參 6품에 비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종5품직이었다고 판단된다. 물론 위 피마 규정이 덕종 때 제정되었던 만큼,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 때의 관품이 개정전시과가 마련된 목종 원년의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종에서 덕종에 이르는 시기에 중앙 관제에 대한 뚜렷한 개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덕종 2년은 아직 전시과의 재개정(덕종 3년)도 이루어지기 이전이었으므로0082)물론 현종 5년에 약간의 손질이 가해졌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加給」에 불과한 것이고 전시과의 큰 개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개정전시과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시행되고 있던 시기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개정전시과에 있어서 관직 및 관품과 피마식조의 그것은 아마도 거의 같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문종대에는 찾아 볼 수 없는 南班職 宣徽諸使使가 개정전시과와 이 덕종 때의 피마식 규정에 함께 보이는 것은 이러한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결국 목종 원년 당시 상장군·대장군의 관품은 각각 종3품·정4품이었고, 제위장군과 소경·소감·사업은 모두 정5품, 중랑장은 종5품, 제릉령·태사령은 정6품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므로 개정전시과의 제5과에 상장군, 제6과에 대장군, 제8과에 제위장군과 소경·소감·국자사업, 제9과에 중랑장, 제10과에 제릉령과 태사령이 들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례를 미루어 보면 문종대의 품계로 종3품인 좌·우승이 제6과를 받는 반면 정4품의 소부·장작감이 제5과를 받도록 된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개정전시과가 마련될 당시에는 오히려 전자가 정4품이었고 후자는 종3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문종대에 이르러 관품이 서로 뒤바뀌면서 전시과의 과등 또한 재조정되어 更定田柴科에서는 좌·우승이 제5과에 속하게 된 데 반해 소부·장작감은 제6과에 배정되었다. 이렇게 볼 때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나 개정전시과에서 과등과 1∼2단계의 차이를 보이는 듯한 다른 관직(실직)의 관품도 실제로는 대부분 과등과 일치하지 않았을까 한다.0083)따라서 개정전시과 규정을 토대로 목종 원년 당시 혹은 성종 14년에 개편된 관제, 특히 관품의 실상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관품과 과등이 일치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가 개정전시과에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자기의 관품보다 3단계 위의 과등에 배치된 국자박사가 그러한 예일 것이다. 국자박사는 갱정전시과에서도 관품보다 4단계 위의 과등에 배정되어 있는 바, 이는 관품의 변동을 가정해도 이해할 수 없는 아주 특수한 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에서 논의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의<표 2>와 같다.

과 등 해당 관품 관 직 문종대 관품 목종대 관품
5과 종3품 소부감
장작감
상장군
정4품
정4품
정3품
종3품
종3품
종3품
6과 정4품 좌·우승
대장군
종3품
종3품
정4품
정4품
8과 정5품 제소경·소감
국자사업
제위장군
종4품
종4품
정4품
정5품
정5품
정5품
9과 종5품 중랑장
국자박사
정5품
정7품
종5품
정7품(?)
10과 정6품 제릉령
태사령
종5품
종5품
정6품
정6품

<표 2>

<표 2>에서 비록 몇몇의 예외는 인정된다 하더라도 개정전시과의 18과등은 관직(실직)의 관품을 기준으로 설정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제16과 이하로는 문무양반의 관인 뿐 아니라 이속 및 군인층이 배치됨으로써 관품을 기준으로 하는 과등 배분의 원칙이 문란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0084)李佑成, 앞의 글.
姜晋哲, 앞의 책, 40쪽.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속은 각 관아의 사무 또는 잡역에 종사하는 준관료적 성격을 띠고 있고, 군인 또한 군역을 부담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에게 給田을 계획하는 한 이러한 현상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18과는 이에 해당하는 양반 관원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이들 이속 및 군인층이 차지할 과등이었다고 여겨지며, 실제로 이속의 하층을 이루는 유외잡직과 군인의 대종인 보군이 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속의 상층인 서리들과 마군이 제16과 또는 제17과에 배치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지급대상과 기준에 관련된 이상의 특징 외에도 개정전시과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우선 시정전시과에 비하여 각 과등의 지급액이 전체적으로 감소하였다. 전지를 기준으로 限外科만이 2결 증가하였을 뿐 최고액과 최하액은 물론이고 전 과등의 평균액도 시정전시과의 자삼층의 68.5결에서 58결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柴地의 경우에 더욱 두드러진다. 최고·최하액은 물론 그 평균액 또한 67.5결에서 32결로 대폭 축소되었다. 제16과 아래로 시지가 지급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시지의 대폭적인 감축과 흐름을 같이한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시지의 지급액이 절반 이하로 감소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 간 개간에 의한 시지의 경작지화가 상당히 진척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0085)洪淳權,<高麗時代의 柴地에 관한 고찰>(≪震檀學報≫64, 1987).
李景植,<高麗時期의 兩班口分田과 柴地>(≪歷史敎育≫44, 1988).
다음으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외과가 설정되어 18과등에 끼지 못하는 자에게도 전지 17결이 주어졌다는 특징을 들 수 있는데, 후일의 갱정전시과에 보이는 잡류가 이에 해당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데 개정전시과의 특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무반에 비해 문반의 대우가 현저하게 우세했다고 이해하여 왔다는 점이다. 즉 문종 때의 관품으로 정3품인 상장군이 같은 품계의 문관인 6상서나 어사대부와는 달리 제4과가 아닌 제5과에 배치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문·무반의 차대를 의미한다고 설명해 왔던 것이다.0086)姜晋哲, 앞의 책, 42쪽.
末松保和,<高麗初期の兩班について>(≪東洋學報≫36-2, 1953).
그러나 앞에서 논의하였듯이 목종 당시 상장군의 관품은 정3품이 아니라 종3품이었던 것으로 판단되므로 이 같은 설명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물론 문반의 산직이 실직보다 1∼2단계 낮은 과등을 받았음에 반해 무반의 경우는 3∼4단계까지 감등된 점을 고려하면 그러한 설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말한 대로 개정전시과 규정은 실직의 관품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의 무반이 문반에 비해 실질적(사회적)인 면에서 큰 차별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법제적(공직)인 면에서는 문반과 전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았다”고 하는 연구가0087)邊太燮,<高麗朝의 文班과 武班>(≪史學硏究≫11, 1961). 참고된다. 한편 각 과등의 관직들이 배열되어 있는 순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관품이 같은 관직들 간에도 일정한 서열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맨 처음에는 문반을, 이어 무반을, 다음에는 잡업 및 남반의 관직을, 그 뒤에 산직을 열거하였던 것이다. 일례로 제9과의 경우 무반직인 中郞將·折衝都尉 앞에는 諸郎中에서 國子博士에 이르는 일련의 문반직이, 그리고 그 뒤에는 잡업의 太醫監과 남반직인 宣徽諸使判事가 차례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어 산직인 散少卿·散少監이 열거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던 개정전시과는 이후 현종 5년에 약간 수정되고, 덕종 3년에 재개정되었다가, 문종 30년의 갱정전시과로 이어져 갔다.

<金載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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