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2. 공전·사전과 민전
  • 2) 민전
  • (4) 민전의 국가경제적 기능과 그 규모

(4) 민전의 국가경제적 기능과 그 규모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민전은 민의 사유지인 동시에 국가 또는 개인의 수조지였으므로 민전의 경제적 기능 또한 이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使人을 뽑아 보내어 민전을 점검케 하고 租賦를 고르게 정하여 예전의 방식을 따르려고 하니, 이것은 대개 첫째 國用을 두루 갖추게 하려는 것이요, 둘째 祿俸을 넉넉히 주고자 함이요, 셋째 民産을 풍족하게 하려는 것이다”고 하는 충선왕의 하교가0447)≪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후 즉위년 11월 신미. 주목된다. 여기에서 민산을 풍족히 하는 것과 국용·녹봉의 마련이 민전의 중요한 두 기능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자는 민전이 민의 사유지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고 후자는 민전이 국가의 수조지였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위의 충선왕의 하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선 민전은 소유자인 민의 생활기반, 다시 말해서 민산의 근본이었다. 민전의 비옥하고 척박함이 균등하지 못한 몇몇 군현에 量田使를 보내 양전을 실시하여 食役을 균평하게 해야 하겠다는 靖宗 7년(1041)의 戶部 奏文과,044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남의 祖業田(民田)을 탈점하여 민이 業을 잃게 되었다고 하는 呂克諲의 사례도 이러한 사실을 시사한다. 이렇게 몇 가지 관계 기사가 찾아지기도 하지만, 사실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백정 농민이 민전을 소유한 주된 계층이며, 그들의 대부분이 자기 또는 타인의 민전 경작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민전이 민산의 근본이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민전은 국가 재정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즉 민전에서 거두는 조세를 재원으로 각종의 재정 지출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먼저 민전의 조세는 왕실 운영에 필요한 供上의 재원이 되었다. 왕실의 수조지였던 이른바 莊·處의 토지, 즉 장·처민의 민전이 이 供上의 재원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0449)“三百六十庄處之田 所以奉供上也”(≪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仁沃 上疏).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최소한 3만 결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0450)“供上不可不豊也 故以十萬而屬右倉 以三萬而屬四庫”(≪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 三次上疏). 이에 의하면 供上用 土地가 약 13만 결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右倉 所屬의 10만 결은 國用의 잘못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姜晋哲, 앞의 책, 222쪽). 당시 왕실에는 360개의 장·처가 소속되어 있었다.0451)“三百六十庄處之田 所以奉供上也”(≪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仁沃 上疏). 물론 이 밖에 왕실 소유의 내장전에서 얻어지는 수입 또한 공상의 재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충선왕의 하교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민전의 조세는 녹봉의 재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事審官들이 널리 점유하고 있는 공전(민전)에서 祿轉(녹봉으로 사용되는 곡물)을 거둔 향리들이 사심관으로부터 심한 보복을 받았다고 하는 충숙왕 5년의 기사에서도0452)≪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확인된다. 이렇게 녹봉의 재원이 되는 민전의 조세는 주로 左倉(廣興倉)에서 수납·관리하였는데, 문종 때를 기준으로 해서 총 녹봉액이 16만 석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었으므로 약 10만 결 내외의 민전이 녹봉용으로 설정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45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 上疏(3차).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것은 姜晋哲, 앞의 책, 223쪽 참조.
한편 祭祀·賓客接待·飢民賑濟 및 국가적 역사와 영선의 비용으로 쓰이는 국용의 재원도 민전의 조세였다. 민전을 점검하는 목적의 하나가 국용을 두루 갖추는 데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충선왕의 하교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국용으로 사용될 민전의 조세는 주로 右倉(豊儲倉)에서 관장하였는데, 좌창과 비슷한 대략 10만 결 내외의 토지가 여기에 배당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공상·녹봉·국용 이외에 민전에서의 조세는 군수에도 사용되었다. 양계 지역의 민전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미 설명한 대로 양계 지역에도 민전이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었는데, 이 지역은 군사상의 요충지였으므로 민전에서 수취한 조세를 중앙으로 이송하지 않고 군수에 충당시켰던 것이다. “북계에는 본래 사전이 없었고 관에서 수조하여 군량에 충당하였다”고0454)≪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하는 우왕 때의 기사와, “西北面의 토지(민전)는 일찍이 수조하지 않고 防戍에 맡겼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045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하는 공민왕 5년(1356)의 下旨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우왕 때의 기사에 나오는 사전의 실체가 사유지로서의 민전이 아니라 개인수조지로서의 사전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공민왕 5년 기사에서 “수조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민전에서 조세를 거두지 않았다’는 내용이라기 보다는「수취한 조세를 중앙으로 이송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양계 지역 뿐 아니라 남도 지역의 민전에서 수취된 조세도 군수에 충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량의 보관을 주된 기능으로 하였던 龍門倉의 존재가 이를 말해 준다.0456)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제Ⅱ편 1장<조세>참조. 이러한 군수용 민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녹봉용이나 국용용에 못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고려의 재정 운영은 민전의 조세를 국고에서 일괄적으로 수취하여 필요한 곳에 배분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용처에 따라 필요한 租稅源을 미리 배분하여 두고 사용처의 주무 관사로 하여금 각자 수취케 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국의 민전은 각각 그 용도가 정해져 있었다. 예컨대 녹봉용이나 국용용의 민전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晋陽 지역의 민전이 녹봉용이었음을 전하는 고종 30년의 사례라든지,0457)≪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원래 녹봉용으로 설정된 鷄林·福州·京山 등의 민전이 왕실의 식읍으로 바뀌면서 녹봉이 부족하게 되었다고 하는 李齊賢의 지적,0458)≪高麗史≫권 110, 列傳 23, 李齊賢. 결손된 密城 稅米를 해당 수령에게서 징수토록 광흥창관에게 지시한 우왕의 조처0459)≪高麗史≫권 135, 列傳 48, 우왕 11년 8월. 등이 이러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장·처의 민전이 공상용으로 설정되어 있었다거나, 앙계 지역의 민전이 모두 군수용으로 지정되었던 사실, 경상도 동해안 지역의 조세가 주로 해변 방위나 동북계의 군수에 충당되었던 것도0460)安秉佑,<高麗의 屯田에 관한 一考察>(≪韓國史論≫10, 1984). 같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민전의 조세는 관리를 비롯한 각종 직역담당자들의 생활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개인수조지로 설정된 민전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전시과 체제 아래에서도 물론 그러하였지만, 전시과가 무너지고 녹과전제가 마련된 고려 후기에 개인수조지로서의 민전은 수조권자의 생활에 있어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국가 재정의 궁핍으로 녹봉이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0461)祿俸의 부족과 祿科田의 설치에 대해서는<녹과전의 설치>(≪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94 간행예정) 참조. 이러한 기능을 지녔던 개인수조지가 전기에는 양계를 제외한 전국에 분포해 있었는데, 그 규모는 10만 결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46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 上疏(3次).문종 때의 갱정전시과 규정을 기준으로 볼 때 양반전만도 약 10만 결이었으며, 그 밖의 역부담자들이 받아야 할 수조지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에 趙浚이 전국 토지를 용도별로 나누면서 朝臣 우대용으로 10만 결을 설정하고 6道의 군사와 향리의 토지가 별도로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도88)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金載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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