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1. 수공업
  • 3) 민간 수공업
  • (2) 농촌의 가내 수공업

(2) 농촌의 가내 수공업

농촌지역에도 전업적인 공장이 일부 존재하고 있었지만, 민간수공업의 중심은 역시 농민의 가내수공업이었다.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은 대체로 자가수요를 위한 의료생산과 관부에 납부하기 위한 포물류의 생산이었다.

고려의 직조수공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모시 직조업과 마직업이었다. 베는 고려시대 농민들의 기본적인 옷감으로서 사회적 수요가 많았으므로 민간수공업으로 광범하게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모시 직조업도 비교적 광범위한 소비대상을 가진 생산부문이었다. 당시에 모시와 베는 그 대부분이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었는데 그들은 자체의 수요 뿐만 아니라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공물로서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으로 직조수공업이 발전한 것과 함께 참대제품과 자리수공업 및 제지수공업이 또한 민간수공업으로서 발전하였다. 경상도 양산은 일찍부터 참대산지로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하여 양산주민들은 참대제품 수공업을 중요한 생업의 하나로 발전시켜 왔다. 그러므로 양산 주민들은 집집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대로 각종 용구들을 만들어 딴 물건과 교환하였으며 의식, 조세 그리고 공물도 전적으로 참대수공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1337)≪新增東國輿地勝覽≫慶尙道 梁山郡 風俗. 이것은 양산지방이 참대제품 생산의 명산지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양산지방민들이 생활자료들을 참대가공품들과 교환하여 해결하고 조세와 공물까지 그에 의존하였다는 사실은 주민들이 수공업을 중요한 생업으로 삼고 있었으며 양산이 참대제품 수공업의 중심지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에는 민간수공업으로서 왕골을 원료로 하여 돗자리를 엮으며 방석이나 그 밖의 제품들을 생산하는 자리수공업이 발전하였다. 당시에 왕골돗자리와 방석들은 만화석, 만화방석 등의 이름으로 외국에 수출되어 호평을 받았다. 돗자리·방석 등을 만드는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경상도의 일부 지역들은 자리수공업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 안동지방은 대표적인 자리수공업산지였다.

제지업도 한층 발전하여 질적으로도 새로운 진전이 있었다. 전주는 종이의 명산지로 알려졌으며, 특히 명표지는 그 질이 우수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1338)≪高麗史≫권 105, 列傳 18, 鄭可臣. 고려시기에는 전주의 명표지 뿐만 아니라 백추지·견지·청지·아청지 등 다양한 종이들이 생산되었다. 특히 견지는 마치 누에 고치실로 만든 것같이 희고 질기며 고상한 품위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까지 호평을 받았다.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민간수공업으로서 베·모시·비단을 짜는 직조수공업과 참대가공업, 자리수공업, 제지업 등이 광범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생산부문들은 원료·기술·생산조건으로 인해 주로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으로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民들의 광범한 수요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지역들이 해당수공업의 명산지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의 직조품들은 상품으로서 널리 유통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베는 현물화폐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리하여 직조업과 시장과의 관련이 강화되었고, 그것이 직조수공업의 발전을 자극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수공업 중심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폐쇄적인 자연경제가 지배하는 조건 아래에서도, 수공업 상품생산이 일정한 정도로 발전하였음을 말해 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