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2. 상업과 화폐
  • 2) 대외무역
  • (1) 송과의 무역

(1) 송과의 무역

양국간의 국교는 광종 13년(962)에 처음 시작되었다. 송과의 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이에 따라 교역이 행하여져 성종 때에는 꽤 번성하였다.1410)丸龜金作,<高麗と宋との通交問題>二 (≪朝鮮學報≫18, 1961), 59쪽. 민간무역은 현종 때부터 성행하였다. 송은 신종 때부터 고려와 결탁하여 동북의 강적인 요를 견제하려고 親麗策을 실시하였다. 친려책은 상인의 알선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관계에 따라 상인의 활동은 활발하게 되었다.1411)金庠基,<麗宋貿易小考>(≪震檀學報≫7, 1937), 5∼6쪽. 宋商의 내항은 현종 3년(1012)에서 충렬왕 4년(1278)까지 126회에 이르며,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아 약 150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매회 내왕 인원은 50명 내외였다. 그런데 현종 3년 이전이라고 해서 송상의 내항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1412)全海宗,<高麗와 宋과의 交流>(≪國史館論叢≫8, 1989), 13∼16쪽.

송상의 내항은 7∼8월에 가장 많았다. 7월에 약 22회, 8월에 약 38회로 전체의 약 반 정도였다. 이것은 서남계절풍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0월에 10회, 11월에 8회 내항하였다. 11월에 역풍으로 내항하는 것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횟수가 많은 것은 11월에 거행되는 팔관회를 기회로 일종의 入貢貿易을 했기 때문이다. 송상은 대개 7∼8월에 와서 팔관회를 거친 후 북풍을 이용하여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1413)金庠基, 앞의 글(1937), 21∼22쪽.
―――, 앞의 글(1959), 52∼53쪽.

항로는 남북항로가 그 주된 간선이었다. 북선항로는 산동 등주 방면에서 동북 직선로에 의해 대동강 어구 椒島를 거쳐 옹진항 또는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로, 문종 28년 무렵까지의 주항로였다. 거란족의 강성에 의해 북선항로가 위험해지고 중국 남부의 국제무역이 번성하면서 문종 28년 무렵 이후에는 남선항로가 발달하였다. 남선항로는 明州에서 동북으로 黑山島에 이르고 다시 동북행하여 蝟島·古群山島 등 서해안 도서를 거쳐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다. 당시의 항정 일수는 계절풍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1414)金庠基, 위의 글(1937), 34∼39쪽.
金渭顯,<麗宋關係와 그 航路考>(≪關大論文集≫6, 1978), 250∼259쪽.
姜吉仲,<南宋과 高麗의 政治外交와 貿易關係에 대한 考察>(≪慶熙史學≫16·17, 1991), 184쪽.

송상의 출신지역을 보면 泉州·廣東·明州·福州·台州 등 남쪽 지역, 특히 천주·명주 상인들이 많았다.1415)金庠基, 앞의 글(1937), 23쪽.
森克己,<日本·高麗來航の宋商人>(≪朝鮮學報≫9, 1956).
宋 晞,<明州在宋麗貿易史上的地位>(≪古代中韓日關係硏究≫, Centre of Asian Studies Univ. of HONG KONG, 1987).
陳高華,<北宋時期前往高麗貿易的泉州舶商>(≪海交史硏究≫2, 中國海外交通史硏究會, 1980).
명주는 고려나 일본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내외상선의 발착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고려에 오는 송상은 명주 市舶司에서 발급하는 公憑을 가져야 하며, 귀국 때에도 시박사에서 귀환수속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다.1416)森克己, 위의 글, 224∼226쪽.
宋 晞, 위의 글, 156쪽.

무역 방식은 조공무역과 상인에 의한 무역인 互市로 대별되었다. 양국 사절의 왕래에는 國信物이 贈答의 형식으로 교환되었으며, 사행을 중심으로 일반 무역이 성행하였다. 상인들의 무역은 합법적인 것과 밀무역으로 나뉘어진다. 고려에서는 외국 상선을 禮賓省에서 접제하고, 무역품은 監檢御使가 禁物 유무를 조사하였다. 중국에서는 고려 상선이 등주·명주에 입항하면 입항세를 내야 했고, 특수물종에 한하여 博買(官買)를 행하고 난 다음에 일반 교역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밀무역에 관한 엄격한 금지조처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밀무역이 매우 성행하였다.1417)金庠基, 앞의 글(1937), 25∼30쪽.

남송 말경 명주에서는 외국 상선에 대해 1/15의 入口稅를 징수하였다. 그런데 고려 상선에 대해서는 1/19을 징수하였다. 이것은 출입이 빈번한 고려 상선에 대한 특혜였다. 이로 보아 고려 상인의 활동은 상당히 활발하였던 것 같다.1418)金庠基, 앞의 책, 200∼201쪽.

무역품을 보면 수출품은 금·은·구리·인삼·송자·문피·황칠 등 원료품, 각색 능라·세저포·세마포·백지·향유·금은동기·나전기구·완초석·부채·금은장도·낭미필·송연묵 등 가공품이 중심이고, 유황·도검·청서피 등 일본·여진산 물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입품은 능견금라·자기·금박·약재·차·서적·악기·금은전 등이며, 특히 서남아시아산 향약·서각·상아·산호·호박·珠琲·빈철·수정·소목 등도 송의 중계무역에 의해 수입되었다.1419)金庠基, 앞의 글(1937), 33∼34쪽.

수출품 중에는 종이를 비롯하여 부채나 문방 4보를 이루는 필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고려 종이는 아름답고 질겨서 필기에 쓰이는 외에도 장정이나 背貼에도 많이 쓰였으며, 송의 溫州産보다도 상품적 가치가 높았다. 고려 종이는 사신이나 상인이 잘 다니는 수도나 항구만이 아니라, 長江 유역 안쪽에까지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문방구는 송인에 의해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上品의 종이 뿐만 아니라 송인이 讚賞한 문방 4보 모두를 다 만들었다는 것은 고려의 공예수준이 높았음을 시사해 준다.1420)池田溫,<新羅·高麗時代 東亞地域紙張의 國際流通에 관하여>(≪大東文化硏究≫23, 1989), 195∼196쪽.

무역품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음이 주목된다.

첫째, 교역품 중에는 사치품과 무기류가 많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교역권의 내용이 우수한 문화의 전파라는 면과 아울러 각국 지배층의 사치적 수요와 군사적 수요에 크게 규정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고려의 수출품목은 국가의 수취체제와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교역품목과 거의 일치한다. 고려 전기 수취체제나 지배층의 강제적 상행위가 대외무역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배층의 사치와 군사적 목적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외무역은 선진적인 직조기술, 농업기술, 의술 등을 부수적으로 도입해 주었으나, 그 국내기반은 피지배층의 경제적 희생 위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셋째, 금·은·동 특히 금속화폐의 재료로 쓰이는 은·동이 대외무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송에서는 국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대외적으로 동이슬람권과의 교역에서 중국 은의 서방유출 현상과 주변국에 대한 막대한 歲幣·賜與로 인하여 은 수출량이 크게 증대하였다. 이러한 은 수요의 증가는 11세기 이후 은값 폭등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북송의 화폐정책은 元豊(1078∼1085) 이후 주목되는 변화를 보였다. 동전·철전 주조가 감소하고 대신 은전이 새로운 화폐로 상정되었다. 송의 은 수요변동은 동아시아 교역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은 수출도 그 영향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1421)이상은 蔡雄錫, 앞의 글(1988), 109∼113쪽을 요약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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