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6) 양인농민
  • (1) 공과·공역의 부담

(1) 공과·공역의 부담

 농민은 토지를 갈아먹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가운데에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가진 이도 있었고, 그러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대체로 말하면 전자는 自營農이었고 후자는 佃作農이었다. 자영농은 국가에 國稅를 물었지만, 전작농은 그러하지 않았다. 전작농은 그가 빌려서 농사짓는 토지의 소유주에게 田租를 냈을 뿐이다. 자영농이 전세를 문 것은 그가 농민이어서가 아니고 경작 토지의 소유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신분층의 사람들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 국가에 전세를 물어야 했으므로 자영농이 부담하는 전세는 그만의 것일 수가 없었다.072)洪承基,<高麗時代의 農民과 國家>(≪韓國史市民講座≫6, 一潮閣, 1990), 33∼35쪽.

 자영농이든 전작농이든 그가 양인신분이었다면 모두 국가에 대하여 貢賦와 徭役·軍役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공부는 공물을 바치는 것이었는데, 공물은 특정한 지역에서 나는 토산물이었다. 그 종류는 여러 가지였다. 그 가운데에는 광산물·직물류·동식물 및 그 가공품 그리고 해산물이나 약재 따위가 포함되어 있었다.073)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 出版部, 1980), 269쪽. 공물은 모두 현물이었다. 때로는 현물 대신 그 값을 따져서 平布로써 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현물로 바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현물은 농민들이 직접 노동력을 투입하여 채취·제조·운송하였다. 따라서 공물을 바친다는 것은 결국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을 뜻하였다. 여기서의 노동력을 특히 貢役이라고도 불렀다.074)洪承基, 앞의 글(1990), 35∼36쪽.

 공역이 특정한 공물을 채취·제조·운송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력의 수취를 뜻하는 데 비하여, 요역은 궁궐·사찰·관아의 축조, 성곽·도로의 구축, 하천·제방의 수축 등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조달하기 위하여 설정된 세의 한 항목이었다.075)姜晋哲, 앞의 책, 284쪽.
洪承基, 위의 글, 36쪽.
용도는 다르지만, 노동력의 수취였다는 점에서 요역과 공역 사이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요역과 공역 이외에도 양인농민들은 군역의 부담을 피할 수 없었다. 중앙 군은 전문적 군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일반 양인농민들과는 무관하였다. 양인농민들이 지는 군역은 주로 州縣軍과 같은 지방군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주현군은 保勝·精勇·一品의 3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076)주현군에 관한 설명은 李基白, 앞의 책(1968), 202∼229쪽 참조. 二品·三品軍도 그 체제 아래 있었다. 이 가운데 보승군과 정용군은 중앙군과 직결되어 있는 전투부대였다. 반면에 일품·이품·삼품의 3군은 노동부대였다.077)李基白, 위의 책, 204∼205쪽. 보승군·정용군·일품군은 중앙에서 파악하여 그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그 수는 약 5만 명 가량 되었다.078)洪承基, 앞의 글(1990), 37쪽. 일반 농민 가운데에서도 자영농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그런데 약 5만 명의 숫자는 농민의 전체 수에서 보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농민의 압도적인 다수는 이품군·삼품군에 편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군사적인 일에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군역의 의무를 이행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공역·요역·군역이 모두 본질에 있어서 농민들의 노동력 수취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국가에서는 공역·요역·군역의 행태로 농민들로부터 노동력을 거두어 들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부담을 대략 公役으로 이해하여도 좋겠는데, 관리들로 대표되는 귀족들은 공역의 부담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귀족들도 원칙은 공역을 부담해야 하였지만 실제로 그러한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공노비를 제외하고 노비를 대표하는 사노비들은 아예 그러한 부담의 원칙도 없었다. 결국 공역을 현실적으로 거의 전담하고 있던 것은 일반 양인농민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공역은 경제적으로 국가의 존립 여부를 가늠해 줄 정도로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양인 농민들은 국가의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계층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양인농민이 무는 전세가 국가의 재정에 기초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전세는 田主가 국가에 무는 세금이었다. 전주 가운데에는 다른 계층도 해당이 되었다. 특히 귀족층이 그러하였다. 따라서 양인농민의 전주만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영세한 대로나마 전주의 수에 있어서나 그 소유 면적에 있어서나 양인농민의 비중은 큰 것이었다. 따라서 양인농민들이 ― 주로 자영농 중심이었지만―전세의 부담을 통하여 국가의 재정에 기여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였다. 여러 세목 가운데에서도 전세가 국가 재정에서 가장 중요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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