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8) 향·소·부곡인
  • (3) 신분상 제약의 의미

(3) 신분상 제약의 의미

 부곡인의 신분상 지위는 군현인보다 낮았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지위까지 그러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신분상으로 더 제약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들도 경제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들은 대체로 정치적인 것에 관계가 있었다. 국자감에의 입학, 과거에의 응시, 관직상의 승진 따위에 보이는 제약들이 모두 부곡인의 정치적 진출을 불리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었다. 형사처벌에서의 불리함도 크게 보면 정치적인 성격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사실은 부곡인이 안고 있던 신분상의 불이익이 경제적인 고려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배려의 소산이었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다음 사료들을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① 永州의 利旨銀所는 옛날에 縣이었는데 중간에 邑人이 나라의 명령을 어겨서 縣이 폐하여지고 籍民되어 白金을 稅로 물면서 銀所라고 칭하여진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그 지방 사람 那壽也先不花가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宦寺가 되어 수고로운 일을 많이 하여 그 공으로 鄕貫을 승격시켜 다시 縣으로 삼았다(崔瀣,≪拙藁千百≫권 2, 永州利旨銀所陞爲縣).

② 縣人 子和 등이 鄭叙의 처를 무고하고 縣吏 仁梁과 더불어 임금과 大臣을 저주하매 子和를 강에 던지고 縣을 내려 部曲으로 삼았다(≪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陜州 感陰縣 의종 15년).

 利旨銀所는 본래 현이었는데 현인 가운데 누군가가 나라의 명령을 어기는 바람에 所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感陰縣은 縣人 子和 등이 국왕과 대신을 저주한 죄로 부곡이 되었다고 한다. 이지은소는 그 뒤 소민 가운데 환관으로서 수고로운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있어서 그 공으로 다시 현이 되었다. 한두 사람의 범죄나 공훈이 계기가 되어 현이 소나 부곡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소나 부곡이 현이 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주·부·군·현 내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찾아진다. 예를 들면, 長湍縣은 단지 侍中 韓彦恭의 內鄕이라고 해서 목종 때 湍州가 되었다.103)≪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長湍縣. 또 豊山縣은 태조 6년(923)에 縣人 元逢이 귀순한 공으로 順州가 되었다가 태조 13년에 견훤의 군대에 패배하였다고 해서 下枝縣이 되었다.104)≪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豊山縣.

 일부 주민이나 그 지역 출신 사람들이 국가에 대하여 죄를 짓거나 공을 세우면 연대책임이나 집단포상으로 이어지면서 지방행정단위의 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죄를 짓거나 공을 세우거나 하는 것들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가령 나라의 명령을 어겼다던가 국왕과 대신을 저주하였다던가 적군에 패배하였다던가 하는 범죄행위가 모두 그러하다. 또한 환관으로서 공이 있었다거나 侍中의 공훈을 인정하였다거나 귀순하였다거나 하는 것들도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문제의 범죄는 국가나 국왕에 대한 불충으로, 그리고 문제의 立功은 그에 대한 충성으로 간주되었다. 처벌 또는 포상으로 관련자의 연고지를 昇降시켰다는 점에서 국가나 국왕에 대한 범죄자의 불충이나 입공자의 충성은 다시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민의 불충이나 충성으로 간주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승강조치가 범죄의 연대책임과 입공의 집단포상을 전제로 하였다는 점에서 지방민의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중앙정부의 지방민 통제가 절실히 요구되었지만 실제는 그 요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려는 지방관을 파견하기는 했지만 고을마다 그러하지는 못하였다. 향·소·부곡은 말할 것도 없고 당당한 현이라고 해도 지방관이 없는 屬縣이 전국에 광범위하게 널려 있었던 것이 당시 고려의 실정이었다. 이 점은 조선의 경우와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한두 지방민의 충성이나 불충의 결과를 전 지역민에게 나누어 지역의 격을 올리거나 떨어뜨린 조치는 고려의 지방민 지배에 보이는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주·부·군·현 내부에서 일어나는 승강의 조치는 사실상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격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주민들의 국가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에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사회적으로 그들의 지위에 이렇다할 변화가 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승강의 조치가 실질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은 향·소 부곡과 그 위에 있는 행정단위 사이에서였다. 이 경우 승강의 기준이 된 것은 향·소·부곡이었다. 이 점에서 중앙정부의 지방민지배와 관련하여 부곡제의 운용이 주목되어야 하는 것이다. 향·소·부곡과 일반 군현 사이에서 행정단위의 지위의 변화는 보아온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신분상의 변화를 의미하였다. 한두 사람이 중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죄에 대한 처벌을 전 주민이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점만으로도 가혹한 처사일 것이다. 그런데 그 처벌은 전 주민에 끝나지 않고 대대로 그 자손들 모두에게까지도 미쳤던 것이다. 게다가 처벌의 일환으로 그들은 대대로 정치적·사회적 제약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감수해야만 하였다. 또한 주민 한두 사람의 공훈으로 빚어지는 결과에 대하여는 반대의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건 납득이 잘 안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로서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부곡제를 운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민의 충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또 이 제도가 실제로 운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중앙의 지방민지배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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