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10) 양수척 (화척·재인)

10) 양수척 (화척·재인)

 楊水尺에 관한 기록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지만, 그 기록을 통하여 고려 전 기 이래로 그것이 실재하여 왔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李至榮이 朔州分道將軍이 되었는데 楊水尺이 興化 雲中道에 많이 살았다. 지영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본래 賦役이 없으니 가히 나의 妓生 紫雲仙에게 소속시 키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그 이름을 編籍하고 貢物을 징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지영이 죽으니 忠獻이 또 자운선을 妾으로 삼고 人口를 계산하여 공물을 징수함이 더욱 심하므로 양수척 등이 크게 원망하였다. 거란병이 침구해 오자 맞아 항복하고 향도하였기 때문에 산천의 요해와 도로의 원근을 모두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백제를 칠 때에 제어하기 어려웠던 遺種으로 본래 貫籍과 부역이 없었다. 즐겨 水草를 따라 옮겨사는 것이 無常하여 오직 사냥을 일삼고 柳器를 엮어 파는 것을 業으로 삼았다. 대개 妓의 種族은 본래 柳器匠의 집에서 나왔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위의 사료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양수척은 태조 때 제어하기 어려웠던 후백제계의 후손이었다. 둘째, 양수척은 定處·貫籍·賦役이 없었다. 셋째, 양수척은 사냥·유기제조 및 기생의 일로써 생업을 삼았다.109)鮎貝房之進,<白丁·水尺·禾尺·楊水尺>(≪雜攷≫5, 1932), 20∼21·28∼29 쪽 참조.

 그런데 양수척의 계보에 관하여 위의 사료에 보이는 설명은 오늘날 거의 인정되고 있지 않다. 관련 기사가 양수척이 고려초에도 있었으리라는 사실은 말하여 주고 있지만, 양수척이 후백제계의 후손이라는 점은 사실과 다르다. 양수척은 반수렵민족인 여진계나 유목민족인 거란계의 자손으로 밝혀졌으며110)李丙燾,≪韓國史≫中世篇(震檀學會, 1961), 346쪽. 이 사실은 그 뒤 재확인되었다.111)姜萬吉,<鮮初白丁考>(≪史學硏究≫18, 1964), 493∼494쪽. 양수척이 본래 여진족이나 거란족의 遺種이었다는 견해가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112)조선초의 기록에서도 양수척에 계보가 닿는 白丁·禾尺·才人 따위를 우리와 다른 인종으로 보거나 胡種으로 이해하고 있거니와 양수척의 기원을 여진족이나 거란족에서 찾는 것이 무리가 없어 보인다(≪世祖實錄≫권 3, 세조 2년 3월 정유 梁誠之上疏;≪成宗實錄≫권 69, 성종 7년 7월 기미 下書 및 권 252, 성종 22년 4월 무진 金永濡上疏 참조).

 양수척은 고려초부터 있어 왔는데 여진족이나 거란족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사냥과 유기제조 및 창우의 일로써 생업을 삼았다. 고려 말기가 되어서는 창우의 일을 전업으로 하는 재인이 떨어져나가 독자적인 계층을 이루었으며, 나머지 양수척은 화척으로 바뀌어 사냥과 유기제조와 도살의 일로써 생업을 삼아가게 되었다.

 그들의 생업 가운데 유기를 제조하여 판매하는 일은 공장이나 상인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또 墨尺에서와 같이 공장도 尺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었고, 雜尺이라고 했을 때 공장과 양수척이 모두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다. 양수척의 사회적 지위를 공장이나 상인과 견주어 보는 일이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수척에게는 공장이나 상인과는 다르게 정처가 없었고, 그에 따라 관적도 없었으며 부역마저 부과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양수척이 정처가 없어서 이주가 자유로우며 부역이 없어서 특권적인 계층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한 사실들은 모두가 나라에서 그들을 국민 외의 존재로 파악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국민으로서의 지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간혹 그들이 공장이나 상인과 비견되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남에게 소유되어 팔리기도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므로 노비와는 구별되었고, 이 점에서 천인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들은 양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양인 가운데 가장 천시된 존재였다.113)≪世宗實錄≫권 22, 세종 5년 10월 기묘 兵曹의 啓에서도 양수척에 계보가 이어지는 才人·禾尺을 언급하면서, “才人과 禾尺은 본시 良人이었지만 하는 일이 賤하여 부르기를 특수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천시된 것은 하는 일이 천하였기 때문이었다. 신분적으로 그들은 본래 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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