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2. 가족제도
  • 3) 친족조직
  • (1) 성씨와 계보관념

(1) 성씨와 계보관념

 고려시대에 대한 이른 시기의 연구들에서는 당시의 사회편성을 이해함에 성씨집단과 같은 부계 친족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를 밑받침해 줄 고려시대 친족조직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없으며, 단지 조선 후기에 보이는 門中組織이나 同族村 등을 “신라 이래 천여 년을 경과한 고래의 잔해”라는 식으로 이해하였다.202)藤田亮策,<新羅九州五京考>(≪朝鮮學報≫5, 1953).

 한 예로서 고려시대 촌락의 구성이나 토지소유의 주체 등이 성씨집단 내 지 부계친족집단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고,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고려 전기를 혈연공동체가 존재하는 고대적인 사회로까지 이해하기도 하였다.203)旗田巍,<高麗王朝成立期の‘府’と豪族>(≪朝鮮中世社會の硏究≫, 1960).
武田幸男,<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の硏究>(≪朝鮮學報≫25, 1962).
姜晋哲,<農民과 村落>(≪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앞의 책), 304·433쪽.
이 경우 혈연공동체적인 개념이 고려 전기를 이해하는 토대가 되었으나, 당시의 친족제도나 촌락내의 혈연관계망은 구체적으로 조사·검토된 바 없었다.

 고려말이기는 하나 구체적인 자료에 의한 촌락 사례연구에서는 이성잡거와 상태가 나타나 성씨단위의 혈연공동체의 존재가 부인된 바 있다.204)李佑成,<高麗末期 羅州牧 居平部曲에 對하여>(≪震檀學報≫29·30, 1966). 고려시대의 친족제도가 남아 있었던 17세기 초의 촌락의 혈연관계망이 동성집단, 동족촌과는 전혀 다른 양태임도 참고가 될 것이다.205)盧明鎬,<山陰帳籍을 통해 본 17世紀初 村落의 血緣樣相>(≪韓國史論≫5, 서울大 國史學科, 1979). 이는 조선 후기의 상황을 고려 전기에까지 연결시키는 이해가 오류임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여말 이래 고려시대의 가족과 거주율 및 촌락의 혈연관계망에 대한 직접적인 검토를 한 연구에서도 부계 친족집단에 의한 구성을 부정하고 양측적 친속관계에 의한 구성이 제시된 바 있다.206)盧明鎬, 앞의 글(1988b).

 고려시대의 성씨집단을 가정한 연구의 또 다른 예로는 이른바「姓氏別 貴族家門」연구들을 볼 수 있다. 이 계통의 연구들은 1930년대의 연구에서 고려 전기의 인주 이씨를 대표적인 귀족가문으로 논증하려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207)藤田亮策,<李資淵と其の家系>(上)·(下)(≪靑丘學叢≫13·14, 1933·1934). 그 논증방법은 고려 전기에 활약한 인주 이씨의 인물들을 추적하여, 인주 이씨의 부계적인 계보의 인물들이 대대로 고관이 된 것을 밝히고, 왕실이나 당대의 세도가들과의 통혼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 후 이러한 연구 방법은 거의 아무런 재검토나 비판없이 근래의 연구들에 그대로 수용되었으며, 이러한 방법은 다른 성씨들을 대상으로 적용되기도 하 였다. 이른바 성씨별 귀족가문 연구들이 그러한 계통이고, 토성연구 등에서도 그와 같은 연구·해석 방법이 종종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성씨별 계보를 추적한 연구들은 귀족층에서 누대에 걸쳐 고관을 배출한 현상을 밝혀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부계 친족집단의 존재를 대전제로 하여 그에 해당하는 계보만을 추려 모은 것이므로, 그것이 귀족들의 부계 친족집단을 논증한 것이 될 수는 없었다. 8高祖圖나 조선 전기 족보와 같은 계보관계들 속에서 부계적인 계보선은 한 부분에 불과한 셈이고, 다양한 형태의 계보들이 대등한 비중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에 귀족층에서는 계급내혼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8고조도와 같은 직계의 다양한 계보들에는 대부분 누대에 걸쳐 고관이 나타나는 것이니, 부계적인 계보선만 그러한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계친족집단을 논증하려면 그들이 단위집단으로 기능하였음을 구체적으로 규명해야 하나, 고려시대에는 그러한 현상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는 막연한 가정밖에는 제시된 것이 없다.

 고려시대에 중국식의 성씨제도를 받아들여 성씨가 부계적인 계보로 전승되는 것이 원칙이었다는 점에서 곧 부계적인 성씨집단이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성씨는 고려의 성립 전에도 지배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권위 및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사용되었고, 고려 초기의 이른바「토성 분정」으로 불리는208)李樹健,≪韓國中世史硏究≫(一潮閣, 1984), 13∼23쪽.
蔡雄錫,<高麗前期 社會構造와 本貫制>(≪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朴宗基,<高麗 太祖 23년 郡縣改編에 관한 硏究>(≪韓國史論≫19, 1988).
국가적 정책으로 추진된 성씨 사용도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씨를 사용하지 않은 인명표기들이 상당수 나타나는 것에서도 보듯이 고려 초기에는 지배층에서조차도 성씨를 아직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성씨가 일반 평민층에까지 확산되는 것은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태조대의 성씨 수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초에는 광범한 성씨 수여가 있었고, 고려의 정비된 제도들에서는 공식적인 개인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 반드시 성씨를 표기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국가적 시책은 성씨 사용의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고려의 성씨제도는 실제의 사회적 기반이 친족제도에 뿌리를 두고 성립되어 중앙정부에 의해 정치적으로 수용·정리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라, 친족제도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정치적 필요 내지는 통치질서상의 필요에 의해 도입·확대된 면이 강하였다.

 성씨제도가 갖는 기능은 그를 통해 개략적이나마 출신 혈연을 가장 간략하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초에 확립된 본관제도와 결합된 성씨는 한 두 글자만으로도 그 성씨를 칭하는 어느 개인이 어떤 출신인가를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부계 친족집단이 나타나지 않는 속에서도 성씨가 그러한 기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계급내혼과 결합되어 신분적·계층적 질서가 누대에 걸쳐 지속되는 경향이 강하였던 사회적 상황에 의해서였다. 계층적으로 같은 격을 갖는 것으로 묶어 볼 수 있는 여러 성 사이에서 혼인이 거듭 되었기 때문에, 그 성씨를 갖는 개인들은 계속 같은 출신 계층에 속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성씨만이 개인들의 출신 혈연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은 아니며, 개인의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출신 계보는 四祖戶口式이나 八祖戶口式 등과 같은 공적 파악방식에 의해 나타나고 확인되었다. 부·조·증조·모·외조를 기재하는 4조호구식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8조호구식에 비해서도 성씨는 대단히 간략하게 그러면서도 유용하게 개략적인 출신 혈연을 나타낼 수 있었다.

 성씨보다 상세하게 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8조호구식이나 4조호구식 등과 같이 부계적인 계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다양한 계보들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고려의 친족조직이 중국의 경우처럼 부계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성씨의 전승에서 모(외조)의 성, 조모의 성 등 다양한 경우의 계보를 따른 예외가 적지 않게 나타난 이유도 고려사회의 바탕에 존재한 친족제도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고려의 호적 기재양식은 중국 당·송의 제도를 참고한 것이었으나, 8조호구식은 물론 4조호구식도 중국 역대의 호적 기재양식과도 다른 고려의 독특한 제도였다.

 고려시대에「∼氏의 族」·「∼氏의 宗」으로 지칭되는 실체가 무엇이었는가를 보면, 성씨와 결합된 계보관념이 부계씨족이나 리니지(lineage) 집단과 부합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한 예로 여말선초에 만들어진<海州吳氏族圖>라고 명명된 계보도를 보면, 그에 수록된 212명의 인물들 중에서 해주오씨는 24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다양한 계보들의「외손」인 여러 他姓들이었다.209)<海州吳氏族圖>의 수록 인원의 집계는 鄭在勳,<海州吳氏族圖考>(≪東亞硏究≫17, 1989)에 정리된 것을 참조하였다. 잘 알려진≪安東權氏成化譜≫나≪文化柳氏嘉靖譜≫등을 비롯한 조선 전 기의「∼씨」족보들에서도 절대다수의 수록인물은 성별로 계보를 한정하지 않은 다양한 계보들의「외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에는「∼씨의 족」으로 지칭되는 범위가 남성으로 이어지는 부계적인 계보에 한정되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계보관념을 보여 준다. 이러한「∼씨의 족」으로 지칭되는 계보관념이 성별로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주자학적인 가족규범의 영향이 고조되고 있는 여말 이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것이 여말 이후에 새로이 성립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씨의 족」에 대한 그같은 계보관념은 고려 전기 이래의 전통에서 유래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현종 10년(1019)에 죽은 劉瑨의 열전에서 그 출신을 언급하면서 “后妃의 姓이 劉씨인 사람은 모두 그 宗에서 나온 까닭에 대대로 戚里가 되었다”는 기록에서210)≪高麗史≫권 94, 列傳 7, 劉瑨.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유씨 성의 후비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211)≪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 太祖妃 神明順成王太后(父 忠州人 劉兢達)

㉡ 景宗妃 獻懿王后(父 宗室 貞, 祖母 위 ㉠)

㉢ 成宗妃 文德王后(父 光宗, 祖母 위 ㉠)

㉣ 穆宗妃 宣正王后(父 宗室 圭)

㉤ 德宗妃 劉氏(父 忠州人 劉寵居)

 유진전에서 ‘후비의 성이 유씨인 사람은 모두’라고 한 것이나, ‘대대로 척리가 되었다’고 함은 위와 같은 여러 후비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중 부의 성을 따른 것은 ㉠과 ㉤뿐이며, 유진이 생존했던 현종대 이전에서는 ㉠뿐이다. ㉡과 ㉢은 조모를 통해 연결되는 諱稱姓이고, ㉣의 경우는 구체적인 계보는 전하지 않으나 부의 성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을 포괄하여「忠州劉氏의 宗」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고려시대에는 성별로 한정하지 않은 모든 내외의 계보를 포괄하여「∼씨의 족」·「∼씨의 종」으로 지칭하고 있었고,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조선 전기까지도 뿌리 깊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내외손을 포괄하는 계보형태는 후술하는 바와 같은 고려시대의 공신자손의 음서 사례들에서도(<그림 3>참조) 나타난다. 이같은 어느 한 인물이나 부부로부터의 성별로 한정되지 않은 다양한 계보의 내외후손들이 단위집단을 구성하고 기능을 했다면 그것은 總系的(cognatic) 리니지나 씨족이 되겠지만, 고려시대에는 어떠한 형태로도 씨족이나 리니지 같은 친족집단의 기능이 나타나지 않는 속에 그러한「∼씨의 족」도 단위집단으로 기능하지 않았다.「∼씨의 족」으로 지칭되는 범위는 단위집단으로서의 의미를 갖지 않고 단지 그러한 계보 인식만을 나타냈는데, 이러한 것은 총계적 리니지 등과 구분하여 스톡(stock)이라 불리기도 한다.

 「∼씨의 족」으로 지칭된 계보범위가 단위집단으로서의 기능을 갖기 어려웠던 것은 성씨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해주오씨족도>나≪안동권씨성화보≫등의 속에 들어간 다양한 계보의 인물들은 각기 본래의 성씨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또다른「∼씨의 족」의 기록들 여럿에 겹쳐지게 수록되고 있었다. 실제로<해주오씨족도>·≪안동권씨성화보≫·≪문화유씨가정보≫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족보들에 수록된 인물들은 많은 수가 서로 중복되어 있다. 이는 동일 성씨를 갖는 인물들의 범위 자체도 단위집단으로서의 의미를 갖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또한 당시에「∼씨의 족」으로 지칭된 범위도 그러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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