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1) 나말려초의 교종과 선종
  • (2) 왕건과 승려의 결합

(2) 왕건과 승려의 결합

 후삼국 성립 이후가 되면 선사들은 물론 교종 승려들도 지방의 대호족과 결합해 가는 추세가 되었다. 왕건과 연결된 승려 중에는 화엄종 승려인 坦文과 법상종 승려로 추측되는 釋冲이 있었다. 또한 왕건과 연결된 선사들은 신라왕실과 연결된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때가 되면 선사들은 신라 중앙왕실과 연결됨으로 해서 사실상 아무런 이익도 권위도 보장받지 못했다. 고려 건국 이전에 왕건과 연결된 승려는 迴微·麗嚴·慶猷·利嚴 등의 四無畏士와 行寂·忠湛 등이다. 坦文·璨幽·玄暉·兢讓·慶甫·開淸 등은 고려 건국 이후에 왕건과 결합하였다.

 왕건은 개성지방의 호족으로 예성강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弓裔의 부하로 있으면서 왕건은 궁예 3년(903, 효공왕 7) 羅州를 정벌하고, 이후 서해안 지역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태조 3년(920)에 康州將軍 閠雄이 그 아들 一康을 보내어 왕건에게 귀부해 왔다. 이로써 康州를 중심으로 한 남해의 해상권이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은 왕건의 도움없이 본국으로 돌아오기 어려웠다.010)후삼국시대의 중국 유학승 중 慶甫는 甄萱의 도움으로 귀국하였으며, 그 외의 모든 승려는 王建의 도움으로 귀국하였다. 물론 고려의 통일 이후 견훤과 연결된 승려들이 기록에 남겨질 수 없으며, 경보의 경우는 결국 왕건 쪽으로 귀부해왔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의 도움없이 중국 유학승들이 본국으로 귀국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유학했던 지식인들의 향배가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통일이 가까워지면서 중국 유학승뿐 아니라 국내의 승려들까지도 왕건과 결합되어 갔다.

 고려 건국 이전의 승려들은 왕건과 직접 결합되기에 앞서 다른 지방호족세력과 연결된 흔적이 보인다. 行寂·麗嚴·利嚴·審希 등이 蘇律熙·康萱 등과 연결된 예가 그것이다. 이에 비해 고려 건국 이후가 되면 慶甫가 甄萱과 연결되었고 開淸이 王順式과 연결된 외에,011)慶甫와 開淸은 王建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들이 왕건과 직결될 수는 없었다. 왕건 이외의 인물과 연결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승려가 달리 없다. 탄문·찬유·현휘 등은 모두 왕건과 직접 결합되었다.

 이것은 왕건이 한 나라의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것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실질적인 지배자가 아니었을 때에는 왕건과 연결된 승려들도 이미 연고관계를 가진 지방호족과의 결합을 중요시하였다. 왕건이 승려들과 열심히 결합하려는 배경에는 그들과 연고된 지방호족 세력과 연합하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곧 왕건은 승려뿐 아니라 이들과 연고된 지방호족 세력과의 연결까지를 의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승려와의 결연은 오히려 왕건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政開 2년(915, 신덕왕 4) 왕건은 實際寺에 거주하는 行寂을 두 번씩이나 찾아갔다.012)崔仁滾,<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184∼185쪽. 왕건은 승려와 인연을 맺기 위해 몸소 찾아갔으며, 한 승려를 두 번씩이나 찾아가 결연을 돈독히 하였다. 이것은 왕건이 승려와 결연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관심은 왕건이 그들과 연고된 지방호족과의 결속을 위해 나타났다.

 왕건이 즉위한 918년 이후 지방호족과 결합하는 데에는 왕건의 정치적 힘이 보다 크게 작용했다. 왕건이 승려들과의 결연을 매개로 그들과 연고되었던 지방호족들과의 결합을 유지시킬 필요는 없어졌다. 승려와 인연을 맺는 것에 대한 왕건의 정치적 관심은 훨씬 줄어들었고 오히려 그것은 민심을 교화하려는 의미에서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고려 건국 이전 왕건과 연결된 승려는 모두 중국에 유학하였는데, 그 이후에는 중국 유학승뿐 아니라 국내에서 수행한 승려에 대해서도 인연을 맺어 갔다.013)金杜珍,<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韓國學論叢≫4, 1981), 139∼140쪽.

 고려 건국 이후 국내의 승려에 대해 인연을 맺고자 할 때, 몸소 찾아간 것과는 달리 왕건은 鵠版을 내려 부르는 형식을 취하였다. 마땅히 조정에 나아가 왕정의 고문으로 부촉되기를 바랐기 때문에,014)王建의 부름을 받은 승려들은 “居於率土者 敢拒綸音 儻遂朝天者 湏霑顧問 付囑之故 吾將赴都”(<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朝鮮金石總覽≫上, 127쪽)라 하였다. 승려들은 대개 왕건의 부름에 응하였다. 왕정에 참여시키기 위해 특별한 승려를 부른 경우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 왕건은 조서를 내려 전국의 승려들을 불러 모으게 하기도 했다. 이 당시 왕건이 승려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다음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승려를 중히 여겨 불교에 귀의한 것은 梁帝의 遺風을 존중한 것이다. 五天의 像을 만들어 더욱 숭배하고 四門을 열어 英賢을 불러들였다. 이에 道人이 輻湊하고 禪侶가 雲瑧하여 上德의 宗旨를 爭論하고 太平의 業蹟을 높이 찬양했다(李夢游,<鳳岩寺靜眞大師圓悟塔碑>,≪朝鮮金石總覽≫上, 201쪽).

 왕건은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불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왕건은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전국의 승려를 불러 모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이 때가 되면 승려들도 鵠版을 기다리지 않고 왕건에게 나아갔다. 즉위 이후 왕건이 승려와 결합하는 대도는 그 이전에 비해 극진하지 못한 듯한 인상을 준다. 아마 그것은 왕건과 승려와의 결합이 지방호족의 연합을 위해 절대적으로 작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통일 이후 민심의 교화면에서 왕건은 불교를 숭상하였고, 여전히 승려들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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