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1) 나말려초의 교종과 선종
  • (3) 4무외사와 그들의 선사상

(3) 4무외사와 그들의 선사상

 고려 건국 이전에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던 大鏡 麗嚴·朱覺 逈微·眞澈 利嚴·法鏡 慶猷 등을 海東 四無畏士라 부른다. 이들은 왕건과 돈독한 연결을 가졌지만, 왕건의 외척과도 연고가 있었다. 뒤에 須彌山門을 이루는 이엄은 黃州지역의 대호족으로 왕건의 외척인 皇甫氏와 결연되어 있었다. 그의 재가제자에 皇甫悌恭과 前王子 太相인 王儒가 있었다. 경유의 재가제자로는 神聖大王(태조)·黔弼·劉權說·王濡·崔彦撝·韓桂逢·韓憲閏·韓平 등이 있었다.015)<長湍五龍寺法鏡大師普照慧光塔碑>(≪朝鮮金石總覽≫上), 167쪽. 경유는 충주지역의 대호족인 劉氏세력과 연고가 있었다.

 여엄은 속성이 김씨이고 그 선조는 慶州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본래는 진골 신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경문왕 2년(862)에 태어났으며, 無量壽寺 住宗法師에게 출가하여 처음에는 화엄을 익혔다. 헌강왕 6년(880)에 具足戒를 받았는데, 그 후 교종이 眞宗이 아님을 깨닫고 선종 쪽으로 기울어져 廣宗大師인 朗慧에게로 나아갔다.016)崔彦撝,<砥平萻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朝鮮金石總覽≫上), 131쪽. 곧 그는 聖住山門에 들게 되었고, 진성왕 원년(887)에 낭혜가 입적하자 스승의 法嗣인 深光和尙에게로 나아갔다. 심광은 그의 사형이기도 했다. 이후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중국으르 유학하여 雲居 道膺의 문하에 들었고, 그의 법인을 얻고는 효공왕 13년(909)에 귀국하였다. 武州 昇平(順天郡)으로 귀착한 여엄은 당시 이 지역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왕건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귀국에 도움을 준 이 지역의 軍事上國인 康萱은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귀국 후에는 왕건의 부름에 응해 菩提寺에 주지하였는데, 그의 문인으로는 昕政 등 50여 인이 있었다. 여엄은 태조 13년(930)에 입적하였다.

 형미는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났으며, 속성은 최씨이고 어머니는 김씨였다. 그의 집안은 光州에 있었는데 선대에 경주에서 이주하였다. 그는 迦智山門을 크게 일으킨 體澄에게 나아가 출가하였으며, 헌강왕 8년(882)에 華嚴寺의 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017)崔彦撝,<康津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朝鮮金石總覽≫上), 172쪽. 이후 그는 融賢長老를 찾아 뵈었으며, 진성왕 5년(891)에 중국에 들어가 道膺의 법인을 전수받았다. 효공왕 9년(905)에 귀국하였는데, 이 때 羅州를 정벌하여 이곳에 머물고 있던 왕건의 도움을 받았다. 왕건의 청으로 그는 無爲岬寺의 주지로 있게 되었으며, 그의 문하에 鎔俊·化白 등의 제자가 있었다. 그는 경명왕 원년(917)에 입적하였는데, 왕건과 함께 개경으로 나아가서는 궁예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엄은 경문왕 10년(870)에 태어났으며, 속성은 김씨이다. 그의 선조는 경주에 살았고 본래는 진골이었으나, 熊川지역으로 낙향하여 호족이 되었다. 헌강왕 7년(881)에 迦耶岬寺의 德良法師에게 출가한 그는 정강왕 원년(886)에 道堅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진성왕 10년(896)에 入朝使 崔藝熙를 따라 西學한 이엄은 도응의 법인을 받아 효공왕 15년(911) 나주의 會津으로 귀국하였는데, 이 때에 그는 왕건과 결연하였다. 그는 귀국할 때에 金海府知軍府事 蘇律熙의 도움을 받았는데, 소율희는 왕건과 연결된 인물이었다.018)金杜珍, 앞의 글(1981), 136∼137쪽. 태조 5년(922)에 왕건의 부름을 받아 이듬해에 舍那內院에 주지했다.019)<海州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朝鮮金石總覽≫上), 127쪽. 곧 다시 산사로 돌아간 그는 태조 16년에는 왕건의 하교를 받아 海州의 廣照寺에 주지하면서 수미산문을 개창하였다. 그는 태조 19년(936)에 입적했는데 문하에 處光·道忍 등의 제자가 있었다.

 경유는 경문왕 11년(871)에 태어났으며 속성은 장씨이고, 그의 가문은 南陽의 호족이었다. 진성왕 2년(888)에 近度寺의 靈宗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진성왕 5년에 중국에 유학하여 도응의 법인을 전수받았다. 효공왕 12년(908)에 무주의 會津으로 귀국하였는데, 이 때 그도 역시 왕건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그는 왕건의 王師가 되어 長湍의 五龍寺에 주지하였으며, 조정으로부터 가사 등을 하사받았다. 태조 4년(921)에 日月寺에서 입적하였으며, 그의 문하에 裝玄·神榮 등의 제자가 있었다.

 四無畏師는 왕건이 장군으로 있던 시절에 연결된 인물들이다. 그들은 중국에 유학하여 모두 운거 도응의 법인을 받았으며, 왕건의 도움으로 귀국하였다. 신라 하대의 선사들은 중국에 유학하여 대부분 南嶽 懷讓의 法嗣인 馬祖 道一의 法脈을 받아 귀국하였다. 그런데 4무외사는 도응의 법인을 받아오고 있는데, 이 점은 나말려초의 禪宗史를 규명하면서 중요하게 취급하여야 할 문제이다.

 도응의 스승인 曹洞 良介는 南嶽의 동학인 靑原 行思의 법맥을 이었다. 앞의<표 1>을 참고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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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羅末麗初 禪宗의 法派
<표1>羅末麗初 禪宗의 法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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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山禪門 가운데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一門을 이룬 道憲의 犧陽山門을 제외하면, 이엄의 수미산문 외의 7산문이 모두 마조 도일의 법맥을 받아왔는데, 신라 말의 4무외사만이 유독 청원의 법맥을 이은 도응의 법인을 받아왔다. 이후 고려 초의 중국 유학승들은 대체로 청원계 법맥의 법인을 받아 귀국하고 있다.

 그러면 청원계통의 선풍을 받아들인 4무외사의 선사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의 선풍에 대해서는 다음 기록이 참고된다.

① 大師가 말하기를 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능히 道를 弘布한다. 東山의 뜻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海州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朝鮮金石總覽≫上, 126쪽).

② 一心으로 법을 중히 여겨 十載 동안 同符했다(<五龍寺法鏡大師普照慧光塔碑>,≪朝鮮金石總覽≫上, 165쪽).

③ 어찌 他心을 빌려 한가로이 此門을 보겠는가. 본래 문자를 떠나 매번 心境을 생각하고, 끝내는 客塵을 털어버렸다(위의 글, 164쪽).

④ 大師가 비록 空을 觀照하여도 어찌 능히 本을 잊겠는가(<萻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 ≪朝鮮金石總覽≫上, 132쪽).

 4무외사는 도가 사람을 떠나 있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 않으므로 각자가 능히 도를 널리 편다고 하였다. 곧 他心이나 他悟를 부정하고 일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4무외사의 선풍은「非心非佛」을 강조한 마조 도일의 선풍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此心이 是佛이라 하면서 일심을 강조하는 行思의 사상에서020)金東華,≪禪宗思想史≫(太極出版社, 1975), 184쪽. 영향을 받은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가하면 행사의 法嗣인 希遷은「卽心是佛」을 말하면서 門門이 모두 一切境을 가진다고 했다.021)金東華, 위의 책, 188∼189쪽. 자기 안에서 불성을 찾아 깨치려는 뜻에서 4무외사의 선풍은 개인주의적 경향을 지닌다. 이 점은 그것이 신라 하대의 선풍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도응의 문하에서 청원계 선풍의 영향을 받아 無心이나 非心이 아닌 是心을 강조하였다. 곧 그들의 선풍 내에는 北宗禪의 경향이나 유가적 성향이 흡수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이엄은 923년에 왕건을 알현하고는 “道는 마음에 있고 일에 있지 않으며, 法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요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022)<海州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朝鮮金石總覽≫上), 127쪽.라고 하면서, 四海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奉行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일심을 강조하면서 유가적 성향까지를 포용한 4무외사는 장군으로서 호족적 기반을 가졌을 때의 왕건과 결속되었지만, 그들의 선사상 경향은 고려 성립 이후 왕건의 통치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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