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4) 대각국사 의천의 불교개혁운동과 천태종의 창립
  • (3) 의천의 행적과 연학

(3) 의천의 행적과 연학

 義天은131)의천의 활동은<靈通寺大覺國師碑銘>·<僊鳳寺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과 ≪大覺國師文·外集≫(建國大出版部, 1974) 참조. 고려 문종의 넷째 왕자로서 불교를 독신하는 仁睿王后 李氏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이름은 후(煦)이고 자는 의천이다. 대각국사는 그의 시호이다. 그는 고려가 바야흐로 전성기에 접어든 문종 9년(1055)에 태어나 숙종 6년(1101)에 입적했다. 왕자들에게 승려로 출가할 뜻을 타진하는 부왕에게 11세된 어린 후가 선뜻 출가의 소원을 사뢰었다고 전한다. 景德國師에게 출가한 문종 19년(1065) 10월에 佛日寺의 계단에서 계를 받았다. 이듬해 경덕국사 爛圓은 입적하고, 의천은 15세 때인 문종 23년(1069)에 僧統의 법계와 祐世라는 호를 왕에게서 제수받았다. 고려는 광종 이후 과거제도가 정비되면서 승과제도도 시행되었으므로 승려의 사회적 신분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 의천의 출가는 자신의 주체적 의지의 발로에서 이룩되었다. 이러한 주체적 의지에 의한 삶의 방향은 그가 불법을 硏學하는 행적에서도 뚜렷이 부각된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의 미묘함 때문에 송에 건너가는 일이 조정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구법·연학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결국 미복으로 비밀리에 바다를 건너갔다. 그 때 의천은 당의 玄奘이 인도에서 구법을 하고 의상이 중국에 구법한 사례를 들어, 스승을 찾아 구법하는 일은 출가자의 본분이라고 왕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는 23세(1077) 때 처음 강의하기 시작하였는데, 출가 초기에는 賢首와 淸凉의 화엄학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후에는 淨源(1011∼1088)과 직접 서신을 왕래하면서 송나라에 갈 의지를 굳혀, 31세 때인 선종 2년(1085) 송나라에 건너가 이후 정원의 강의를 慧因院에서 청강하고 귀국할 때는 그로부터 법등을 전하는 징표로서 손향로와 拂子를 전수받았다. 송나라 화엄종은 당 말 이후 상당히 침체하였는데, 의천은 산일된 많은 華嚴章疏를 송에 전해주어 화엄을 융성케 하였다.132)鎌田茂雄,≪中國華嚴思想史の硏究≫(東京大出版部, 1965), 594∼595쪽.
趙明基,≪高麗大覺國師와 天台思想≫(東國出版社, 1964), 16쪽.
大屋德城,≪高麗續藏雕造考≫(便利堂, 1936).

 의천의 행적을 보면 불법에 대한 구법의 폭이 다양했을 뿐 아니라 그 밖에 여러 학설에도 관심을 가졌다. 즉 불교를 연학하는 데 있어서 頓敎·漸敎, 大乘·小乘을 가리지 않았고, 경전·율전·논전과 이에 대한 주석서들까지 포괄하였다. 이것은 의천이 특정한 교학이나 방법론만을 고집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유교·도교·제자백가의 학설도 섭렵하였음을 볼 때 의천에게서는 학문적 폐쇄성을 찾아볼 수 없다. 정원법사와는<華嚴經>·<楞嚴經>·<圓覺經>·<大乘起信論>등의 경론을 담론하고 확인하였다. 이어서 慈辯 從諫법사에게서는 천태교관을 익히고 논의하였다. 나아가 懷璉·宗本·了元 등의 선사를 방문하기도 하고, 戒律宗의 擇其·元照와 唯識學의 慧林, 그리고 梵語에는 天吉祥과 紹德을 찾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의천이 교류한 고승은 무려 50여 명이나 된다. 의천에게 있어 송나라 유학이란 단순히 법을 배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고, 스스로 독학했던 지식을 여러 고승과의 논의를 통해 검증하는 길이었다.

 의천은 화엄종 출신이지만 그가 지향한 불교는 전통적 종파 관념에 의한 것이 아니고, 통합적 불교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송나라에서도 그를 가리켜 “天台·賢首·南山·慈恩·曹溪·西天의 梵學을 일시에 전해 터득한 대보살행자”라고 하였다.133)<僊鳳寺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과≪大覺國師文·外集≫13. 의천의 구법이 중국의 종파불교만이 아니라 인도불교의 본질까지도 이해하려는 의도였음을 알게 한다. 의천이 배웠던 중국 불교는 분파적 관념을 가지고 어느 학파·종파에 편집되어 불교를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천이 초기에 화엄교학을 통해 불교를 이해하고 후배를 기른 것은 물론이다. 화엄학 강의를 할 때는 三觀五敎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제자들의 이해를 촉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천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어느 특정 종파에 치우쳐 불교를 이해하는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보편적 진리인 불교를 객관적인 학문의 시각으로 깨치려 하였다. 그의 학문의 역정을 가리켜 兼學者라고 규정짓기도 하지만, 이는 학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피상적인 현상일 뿐이다.

 의천은 송에 갔을 때 맨처음 有誠과 만났다. 그 때 함께 문답을 주고 받았는데 주로 화엄과 천태의 교상판석에 있어 같고 다름을 이해하고, 또 이 두 종파의 유현하고 오묘한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원법사를 떠나 천태의 자변 종간의 천태교관을 강론하는 데서 청강하였는데, 귀국할 때에 의천은 종간으로부터 전별의 시 1수와 손향로, 여의주 등을 받아 법등을 전하는 징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천태산 智顗대사의 탑에 참배하면서 “귀국하면 목숨이 다하도록 이 법을 널리 선양하겠노라”고 맹세하였다.134)위와 같음. 선종 3년(1086) 귀국 후에는 복지사업으로 指南館·兼濟院 등을 복구토록 하고 국왕의 업무에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화폐의 필요성을 건의하여 숙종이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135)趙明基, 앞의 책, 49쪽. 그리고 14개월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 1천 권의 장서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경·율·론 三藏 즉 대장경에 수록되지 않았던 많은 학자들의 저술이었다. 그는 요·송·일본 등 동아시아 각지에서 25년 동안 수집한 1,010부 4,759권의 저술을 가지고 선종 8년(1091)≪新編諸宗敎藏總錄≫(이하≪敎藏總錄≫이라 칭한다) 혹은「海東有本現行錄 3卷」이라 하는 목록을 편찬하였다.136)李永子,<義天의 新編諸宗敎藏總錄의 獨自性>(≪佛敎學報≫19, 1982), 179쪽.
大屋德城, 앞의 책.
이≪교장총록≫은 불교서적 목록으로서 현대불교학에 필수적인 書誌學(Bibliography)의 기본자료가 된다. 이≪교장총록≫은 11세기 경 동아시아 불교관계 저술의 경향뿐 아니라, 의천이 추구한 사상적 향방과 함께 불교학의 체계를 보여주는 독자성이 있는 목록이다. 여기에는 신라 고승들의 저술뿐 아니라 거란인의 희귀한 저술이 수록되어 있다. 화엄·유식·법화·천태관계 저술은 포함되어 있으나, 반면 선종의 어록이나 연구서들은 제외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일반적으로 균여대사의 저술이 의도적으로 제외된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동시에 이 목록 제3권 말미에 거의 天台止觀관계 저술을 수록하고 있는 점은 의천의 말년의 사상적 귀추를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그 후 정치적 혼란으로 해인사에 은둔하였다가 국청사가 숙종 2년(1097)에 낙성되자 천태교관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는데, 숙종 6년(1101) 天台大選 실시 후 입적하였다.

  大覺國師 義天의 연보 ○ 1세 문종 9년(1055) 9월 28일, 왕의 제4자로서 인예왕후 이씨를 어머니로 궁중에서 태어남. 휘는 煦이며, 자는 義天이다. ○ 11세 문종 19년(1065) 靈通寺 景德國師 爛圓에게 출가하고, 화엄종 佛日寺계단에서 계를 받음. ○ 13세 문종 21년(1067) 법호는 祐世, 법계는 僧統이 됨. ○ 23세 문종 31년(1077) 여러 경론(화엄경 등)을 강의하기 시작함. ○ 30세 선종 원년(1084) 송에 갈 것을 아뢰었으나 조정에서 허가하지 않음. ○ 31세 선종 2년(1085) 4월, 왕과 모후에게 서신을 남긴 후 변복을 하고 송나라 상선을 타고 시자인 壽介와 함께 도항함. 조정에서 관료와 제자인 樂眞·慧宣·道隣 등을 수행토록 보냄.
5월, 송의 板橋鎭(현재 河北省) 도착. 이 때 관리 范鍔이 국사를 환영하고 송의 哲宗은 관리 蘇注廷으로 하여금 국사를 안내케 함.
7월, 啓聖寺에 들어감. 화엄종의 有誠법사를 만나 법을 문답하는 가운데 유성법사는 국사에게 “法王의 아들이고 義想(相)의 후신”이라 찬탄함.
이어 淨源법사를 祥符寺에서 만나 法門을 청함. 그리고 정원법사가 강의를 하던 慧因院과 다른 절에도 경제적 지원을 하고, 대장경 7천여 권도 봉납함. ○ 32세 선종 3년(1086) 2월, 眞如寺에 가서<楞嚴經疏>저자의 탑을 수리토록 희사함. 그리고 慈辯大師 從諫의 천태경론의 강의를 들은 인연으로 전별시 1수와 손향로와 여의주를 증정받음.
4월, 慧因院에서 경서·향로·拂子를 정원법사로부터 전등의 신표로 받음. 송에 체재하는 동안 국사는 圓炤禪師 宗本, 西天三藏인 天吉祥, 佛印禪師 了元, 그리고 慧林, 善淵, 元照, 紹德, 大覺禪師 懷璉 등 50여 인을 만나 禪·律·敎를 담론함.
또 天台山 智者大師 부도에 참배하고 고려에 돌아가 전교할 것을 서원함.
6월, 14개월 간의 외유를 마치고 장서 1천여 권을 수집 귀국하여, 興王寺에 敎藏都監을 두고, 그 후 요·일본에서 수집한 장서를 포함 4천 권을 간행함. ○ 35세 선종 6년(1089) 2월, 海印寺에서≪天台四敎儀≫를 重刻하여 간행함.
10월, 왕태후의 발원으로 國淸寺를 개창하기 시작함. ○ 36세∼37세, 선종 7년(1090)∼8년(1091)≪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편집하여 완성함. ○ 38세 선종 9년(1092) 인예태후가 天台宗禮懺法을 1萬日을 기해 白州 見佛寺에서 베품. 이 해 9월 인예태후 별세함. ○ 40세 선종 11년(1094) 2월, 洪圓寺에서 교학을 강의하며 주지가 됨.
5월, 海印寺에 은둔함. ○ 41세 헌종이 11세로 즉위(1095)함. 李資義의 반란이 일어남. ○ 42세 숙종 원년(1096) 興王寺로 돌아와 강의하고 주지가 됨. 國淸寺가 인예태후의 忌辰道場이 됨. ○ 43세 숙종 2년(1097) 5월, 국청사가 완공되자 祥宗僧의 6·7할 이상을 흡수하여 天台宗을 개창함. ○ 44세 숙종 3년5(1098) 왕이 제4왕자(諱:澄儼)로 하여금 삭발케 하고, 국사의 시자가 되게 함. ○ 47세 숙종 6년(1101) 洪圓寺에 九祖堂을 낙성함. 天台宗 僧科 大選을 실시하고 40명을 선발함.
元曉와 義相에게 각각 和諍국사·圓敎국사의 贈諡를 내리도록 함.
8월에 병환이 나서 10월 5일에 입적하니 諡號를 大覺國師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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