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5) 승관조직과 승과제도
  • (2) 승과제도

(2) 승과제도

 중앙 승관조직인 승록사가 불교교단과 국가의 행정적 협력기구였다면, 승과제도는 불교교단과 국가가 공동으로 운영 관리하던 승려 선발의 시험제도였다. 이들은 다 같이 국가의 불교관리 제도였지만, 승록사가 국가의 불교정책 수행에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정도였던 것에 비해, 승과제도는 그 기능과 역할면에서 보다 광범하고 실제적인 것이었다. 즉 주지의 선발 파견, 종파에 대한 공인, 승려의 제도적인 法階 인정 문제를 비롯하여 왕사·국사 책봉 및 불교 교학의 발전 촉진 등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주요 불교정책 대부분이 승과제도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승과의 제도화 과정 및 내용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별도의 사료 또한 없다. 다만 승록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려 승려들의 행장과 비문 등에 그 단편적인 기록들이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영세한 대로 이들 자료를 종합하여 승과의 성립과 그 실시방법 및 僧階와의 관계, 고려 승과의 변천 등에 관해 대강을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자료의 미비로 인해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승과의 최초 실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과거제도의 시행과 함께 실시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잘 알다시피 고려의 과거제도는 後周의 귀화인이며 한림학사이던 雙冀의 건의에 의하여 광종 9년(958) 5월에 처음 시행되었다는 것이189)≪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9년 5월 및 권 73, 志 1, 選擧. 통설인데, 많은 학자들이 이 때 승과가 함께 실시된 것으로 보고 있다.190)李能和,≪朝鮮佛敎通史≫下 (新文館, 1918), 294쪽.
忽滑谷快天,≪朝鮮禪敎史≫(春秋社, 1930), 137쪽.
李丙燾,≪韓國史―中世篇―≫(震檀學會, 1961), 142∼143쪽.
그러나≪고려사≫에서는 물론 기타의 사서에서 과거제도 시행과 더불어 승과를 실시했다는 분명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승과가 실시되었음을 알게 하는 최초의 기록으로서 광종대 고승 圓空國師 智宗의 비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顯德 初에 광종대왕이 왕위에 올라 불교를 지극히 숭상하였으며 깊은 산의 禪僧들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角妙를 펴게 함에 ‘丹霞의 佛’을 선택하여 科題로서 明示하였다(崔冲,<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朝鮮金石總覽≫上, 255쪽).

 이것으로 최초의 승과가 顯德年間(954∼959, 광종 6∼10)에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같은 비문에는 승과에 급제한 다음 지종이 광종 10년(959, 현덕 6)에 중국 유학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반 과거가 광종 9년에 실시되었고 승과에 합격한 지종이 광종 10년에 중국으로 떠났다면 승과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된 시기에 관한 추정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즉 과거제도의 시행에 승과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처럼 일단 승과제도가 과거제도와 동시에 성립되었다고 볼 때, 다음으로 떠오르는 문제는 승과제도의 시행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과거제도의 실시 목적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광종의 과거제도 실시는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강화의 일환으로서 취해진 조치라는 기왕의 연구들이 있다. 고려 국초 이래 큰 정치적 비중을 가지고 있던 武勳功臣들의 관료독점화를 배제하고, 이와 동시에 종래 중앙집권력에 대립적 요소가 되어 오던 지방호족들을 관료기구에 흡수함으로써 인심을 일신시키고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시행케 되었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191)曺佐鎬,<麗代의 科擧制度>(≪歷史學報≫10, 1958), 126쪽.
金龍德,<高麗 光宗朝의 科擧制度問題>(≪中央大論文集≫4, 1959).

 광종이 그의 정치적 참모라 할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하게 된 목적이 이와 같다면, 일반 과거제도와 함께 시행한 승과제도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일까.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광종의 돈독한 숭불열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광종은 승과제도를 통해 불교 교단의 발전을 국가적 차원에서 도모코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대 어느 왕에 못지않게 불교에 대한 신앙심과 護法의 의지가 컸던 광종이 그의 흥불정책의 한 방안으로서 승과제도를 시행했으리라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는 개혁정책을 추진해 온 그의 정치적인 고려 또한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 불교계 및 승려들의 동향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신라 하대로부터 불교계에는 중국 유학승들에 의해 禪法이 전래되었거니와, 새로운 불교라 할 이 선법을 전해온 승려들은 주로 몰락한 진골이나 6두품 이하의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192)崔柄憲,<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崔致遠의 四山碑銘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7, 1972), 103∼104쪽. 이들은 고착된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불만과 함께 인습과 관념에 얽매어 있던 당시의 교종 불교계에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던 계층들이었다. 그런 만큼 기존의 지배체제와 교종불교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던 이들의 성향과 선사상은 특히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인 부와 군사력을 키워온 호족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선승들이 지방호족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각 지방에 禪門을 개창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선종불교는 신라 하대부터 지방호족 세력을 그 사회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九山禪門을 형성하면서193)新羅 下代부터 개창되기 시작한 각 지방의 禪門은 고려 태조 15년(932)에 왕건이 黃海道 海州에 廣照寺를 세워 利嚴을 주석케 함으로써 須彌山派가 이루어지고, 이어 태조 18년(935)에 兢讓에 의해 慶北 聞慶의 鳳巖寺가 중창되어 曦陽山派가 실질적으로 개창됨에 따라 비로소 九山禪門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초 禪門의 통칭인 九山禪派의 성립은 신라 때가 아니라 고려 초라고 말해야 한다(金煐泰,<五敎九山에 대하여―新羅代 成立說의 不當性 究明―>,≪佛敎學報≫16, 1979, 74∼76쪽). 점차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켜 온 것이다.

 당시 불교계의 동향이 이와 같았다면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시도하던 광종으로서는 아직도 대단한 잠재력을 갖고 있던 지방호족의 종교로서 성장해온 선종불교를 그대로 방임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선·교종 불교의 통합을 포함하여 전 불교계를 국가의 일정한 관리제도 안에 포섭할 필요가 있었을 것인데, 이것이 곧 승과제도 시행의 또 다른 의도였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과거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지방호족들을 관료기구에 흡수하여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종이 승과제도를 실시하여 선·교종 불교의 통합과 함께 불교계를 포섭하고자 한 것은 매우 현실적인 조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지방호족들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는 9산선문의 승려들을 승과를 통해 선발 대우하는 일은 그의 숭불열과 정치적 목적을 양면으로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안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승과제도가 광종의 숭불의지와 함께 일단의 정치적 고려에 의해 시행되었다고 추정하더라도 그 제도화 과정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승과제도 자체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일찍이 건국 초부터 태조가 새로 사원을 세우고 고승을 초치하거나 승려를 선발하여 각 사원에 주지로 파견한 사실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승과의 공식적인 실시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띤 승려선발이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海會와 談禪大會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태조 초에 해회가 설치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龍德 원년(921) 海會를 설치하고 승려를 선발하였다. 制하기를 ‘莊義別和尙은 어찌 다시 居士가 될 것인가. 바야흐로 名僧을 만들라’고 하였다. 드디어 발탁되었으니, … (金廷彦,<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朝鮮金石總覽≫上, 225쪽).

 장의별화상은 광종 때에 국사로 책봉된 화엄종 고승 坦文을 가리킨다. 태조 때에는 선종승의 활동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교종승인 탄문이 해회에서 선발된 사실은 태조의 불교시책이 종파를 초월하였음을 아울러 확인케 하지만194)許興植, 앞의 책, 364쪽. 해회는 곧 교종승을 대상으로 하는 선발제도였는지도 알 수 없다. 이렇게 가정했을 때 다시 선승들을 대상으로 담선대회가 열렸음을 李奎報가 쓴 다음의 叢林會 榜文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 태조께서 왕업을 열고 禪法을 독실히 숭상하여 이에 五百禪寺를 내외에 세우고 승려를 머물게 했으며 2년마다 京師에서 談禪大會를 열었으니 이는 北兵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9산선문의 승려들은 이 대회가 있기 1년 전에 그 山門으로서 지방의 伽藍을 정하여 法會를 열고 겨울을 지냈는데 이것을 叢林이라 하였다(李奎報,<龍德寺叢林會牓>,≪東國李相國集≫권 25).

 고려 건국 이후 서울과 지방에 세워진 많은 사원에 고승을 초치하거나 승려를 선발하여 주지로 파견했음을 짐작케 하며, 이와 동시에 선문의 승려 등을 모아 禪理를 담론케 하던 담선대회가 거란을 진압하기 위한 호국적 목적을 띠고 개최되었음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승과 실시 이전에 승려선발을 위한 해회와 선문 승려들의 통합에 기여했다고 생각되는 담선대회가 있었지만 이들이 제도화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해회는 태조대 이외에는 그 사례가 발견되지 않으며, 담선대회(혹은 총림)는 국초에 2년마다 개최되었다는 위 이규보의 기록 이외에는 중기 이후 특히 무신집권기에 가서야 자주 열리고 있는 것이다.195)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5에는 昌福寺談禪牓, 大安寺談禪牓, 西普通寺談禪牓 등이 실려 있다. 國初에 담선대회가 거란의 진압을 위해 열렸던 것처럼, 무신집권기에는 몽고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護國行事로 자주 개최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승과로 직접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해회의 성격 및 선문의 승려들을 모아 선리를 담론케 한 담선대회의 내용 등으로 미루어 이를 곧 승과 제도화의 한 과정으로서 이해할 수는 있겠다. 승과는 그런 의미에서, 해회와 담선대회 같은 승려선발 방법의 전단계를 거쳐 광종대에 이르러 또 다른 제도로서 성립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제도화 이후의 승과도 그 실시방법 및 내용 등에 관한 정리된 기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역시 금석문과 문집 등에 산재하는 부분적인 기록들을 종합해서 알 수 있을 뿐인데, 기본적으로 승과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선·교 각 종파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던 일종의 예비고시 혹은 자격고시라 할 宗選과 국가의 주관 하에 실시하던 본고시로서의 大選이 그것이다. 즉 종선에 합격한 자가 대선에 응시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종선은 종파의 선발시험이라는 뜻으로, 대선은 승과의 가장 중요한 시험이라는 의미로 각각 해석되지만, 이 두 단계에 걸친 시험의 명칭은 대우 다양한 편이다. 그 몇 가지 예를 금석문을 통해 살펴본다.

① 문종 때의 왕사·국사였던 瑜伽宗 海麟의 탑비

 이에 慈雲寺 唱薩之場에 나아가…21세에 王輪寺의 大選에 赴會하였다(鄭惟産,<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朝鮮金石總覽≫上, 285쪽).

② 예종 때 瑜伽宗 證智首座 觀奧의 묘지

 天慶 3년 癸巳 崇敎寺의 成福選에서 이름을 얻고 7年 丁酉에 奉恩寺의 대선에 합격하여 大德을 제수받았다(<崔觀奧墓誌>,≪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147쪽).

③ 명종 때 華嚴宗 靈通寺住持 通炤僧統 智偁의 묘지

 戊午年에 一中宗選에 합격하고…丁未年에 僧統을 제수 받았다. 己酉年에 中選을 典領하였으며…辛亥年엔 內殿의 大藏道場에서 우두머리가 되어 成福選을 典領하고, 壬子年 4월에 또 宗選을 관장하였다(<靈通寺住持智偁墓誌>,≪朝鮮金石總覽≫上, 417쪽).

④ 명종 때 龍門寺를 重修한 大禪師 祖膺의 행적

 大禪師 祖膺은 본래 海州人으로…14세 때 慧照國師의 門弟 英甫禪師에게 득도하여 머리를 깎고 乙巳年에 曹溪選에 합격하였다. 일곱 군데 절의 주지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이름난 절들이었다(<龍門寺重修碑>, 위의 책, 410쪽).

⑤ 고종·원종 때 修禪社 第4世 眞明國師 混元의 비

 총혜롭기가 보통사람보다 빼어났고 학문은 내외에 통달하였다. 崛山에서 藂席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禪選에서는 上上科에 합격하였다(<臥龍山慈雲寺贈諡眞明國師碑>,≪東文選≫권 117).

 위 자료를 통해 宗選으로서 ① 唱薩之場 ② 成福選 ③ 中選196)中選은 靈通寺 住持 智偁의 墓誌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一中宗選·中選이 있고,<普覺國尊碑銘>(≪朝鮮金石總覽≫上, 470쪽)에 ‘九山四選’이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敎·禪宗 모두 4종 宗選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④ 曹溪選 ⑤ 藂席 등의 명칭이 확인된다. 앞의 3종은 교종에서, 뒤의 2종은 선종에서 행해진 것임을 아울러 알 수 있다. 大選의 경우, 선종에서는 禪選으로도 불리웠지만 일반적으로 선·교종 모두 대선이란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외에도 천태종의 예비고시의 台宗選과 본고시로서의 天台選을 비롯하여, 五敎大選·九山選 등 대선에 해당하는 명칭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또 대선에 합격하여 大德이 된 자를 다시 선발한 太選·師科가 천태종과 선종에서 각각 1회씩 실시된 사례도 찾아진다.197)<國淸寺妙應大禪師墓誌>(≪朝鮮金石總覽≫上), 559쪽.
朴宜中, 앞의 글, 715쪽.
이는 일반 과거의 重試에 비견할 수 있지만 승과에서는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승과의 명칭이 이처럼 다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구성이 각 종파에서 주관하는 종선과 국가 주관의 대선 2단계 시험으로 되어 있던 것임에는 거의 틀림없는 것 같다. 종파의 시험을 거쳐 국가의 대선에 나아간다는 점에서, 승과는 불교 각 종단과 국가의 연계 하에 공동으로 운영 관리된 제도였다는 것도 아울러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같은 승과의 시행은 곧 종파에 대한 국가의 공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가령 大覺國師 義天에 의해 개창된 天台宗이 숙종 4년(1099)에 제1회 僧選을 실시하고, 이어 6년에 대선을 행함으로써 비로소 공인된 하나의 종파가 된198)金煐泰,≪韓國佛敎史槪說≫(經書院, 1986), 139쪽. 것과 같은 예가 이에 해당한다.

 불교종단과 국가의 공동관리제로서의 승과의 성격은 그 실시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승과의 실시 장소는 종선의 경우 각 종파의 주요 사원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대선은 다소 예외가 보이기는 하지만 주로 선종은 廣明寺, 교종은 王輪寺, 천태종은 國淸寺에서 각각 실시되었다. 이 때 승과의 주관자는 왕명에 의해 위촉된 각 소속 종파의 고승들이었다. 즉 국가가 임명한 고시관에 의해 시험이 실시된 것이다. 이들 고시관의 활동과도 관련하여 승과의 진행방법을 살펴보면, 그것은 선·교종 모두 필기방식이 아닌 문답식 혹은 토론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가 문종 때 瑜伽宗 고승 海麟의 탑비에 보인다.

21세에 王輪寺의 大選에 나아갔다. 經을 談論함에 말이 가깝고 뜻은 심오하였다. 승려에게 명해진 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이 달랐다(鄭惟産,<智光國師玄妙塔碑>,≪朝鮮金石總覽≫上, 285쪽).

 또 인종 때 왕사였던 선종 고승 學一의 비에서는 고시관이 응시자들의 토론에 대해 판별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이 해에 選席을 주관했는데 당시 학자들이 2종의 自己에 대해서 盛談했다. 대사가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일 뿐이다. 어찌 둘일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이전의 것을 마땅히 금지토록 해야겠다’라 하였다(<雲門寺圓應國師碑>,≪朝鮮金石總覽≫上, 350쪽).

 교종의 시험내용으로는 문답을 통한 談經이 주가 되고, 선종은 禪에 관한 문답이나 토론을 통해 우수한 승려를 선발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험을 주관하는 고시관의 식견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무신집권기에는 고승이 아닌 유학을 닦은 과거급제자가 고시관으로서 승과를 주관하는 일도 있었다.199)許興植, 앞의 책, 372∼373쪽. 그러나 이상의 승과 실시장소와 시관으로서 고승의 임명과 시험의 진행내용 등을 감안하면 승과는 불교종단과 국가와의 연계 하에 공동관리된 제도였음이 분명하다.

 고려 일대에 걸쳐 이같은 승과가 실시된 횟수와 그 합격자 수 등에 관해서도 정리된 기록이 없으므로 전체 윤곽이 파악되지는 않는다.

 승과는 광종 9년(958)에 일반 과거제도와 함께 실시된 것으로 추정되고는 있지만, 그 확실한 실시 연대를 보여주는 최초의 기록은 성종 9년(990)에 대선에 합격한 圓融國師 決凝의 비문200)高 聽,<浮石寺圓融國師碑>(≪朝鮮金石總覽≫上), 269쪽.에서이다. 광종 9년 이후 대략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승과가 실시된 정식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자료의 미비함을 감안해야겠지만, 제도 초기에는 승과가 산발적으로 실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승과가 일반 과거의 예에 따라 3년에 1회씩 실시토록 제도화된 것은 선종 때부터로 보인다. 즉 선종 원년(1083)에 진사 이하 모든 과거시험을 ‘三年一選’으로 한다는 원칙이 정해지자,201)≪增補文獻備考≫권 184, 選擧考 10. 불교측에서도 이에 준하는 승과의 실시를 청해 그대로 허락되었던 것이다.202)≪高麗史≫권 9, 世家 9, 선종 원년 정월 기사.
그러나 이는 九山門의 禪宗僧들에게는 그 동안 승과가 시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을, 普濟寺 僧 貞雙 등이 주청하여 선종 때부터 비로소 선종이 승과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동안 과거제도와 아울러 승과제도에 구체적인 세부지침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을 선종대에 비로소 3년에 1회씩 선발하는 제도가 정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 과거와 마찬가지로 승과 또한 반드시 이런 원칙이 지켜진 것은 아니다. 보다 시행 횟수가 잦았던 것이다. 어쨌든 현존 자료 가운데 그 연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만을 종합해 본다면 고려 일대에 실시된 승과는 41회에 합격자 수가 34명인 것으로 집계된다.203)許興植, 앞의 책, 367∼368쪽. 이는 어디까지나 파악 가능한 자료 범위 내에서 적출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 실시횟수 및 합격자 수가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임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204)예를 들어<靈通寺大覺國師碑>(≪朝鮮金石總覽≫上), 314∼316쪽에 실려 있는 義天의 華嚴宗 門徒만 해도 僧統 6인, 首座 21인, 三重大師 21인, 重大師 96인, 大師 14인, 大德 10인으로 모두 168인이 列記되어 있다. 이들이 모두 승과를 거쳤을 것임은 물론이다.

 한편 승과제도를 살핌에 있어서 반드시 함께 검토되어야 할 문제로 僧階제도를 들 수 있다. 승과와 승계는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승계란 일정한 자격을 갖춘 것으로 인정되는 승려에게 국가가 수여하는 法階로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禪宗:大德―大師―重大師―三重大師―禪師―大禪師

敎宗:大德―大師―重大師―三重大師―首座―僧統

 승계는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그 순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대덕으로부터 삼중대사까지는 선·교종이 동일하며, 그 이상의 승계에서 선종은 선사·대선사로, 교종은 수좌·승통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순서가 처음부터 한꺼번에 갖추어진 것은 아니며, 그 성립시기도 확실하지는 않다. 태조 20년(937)에 세워진<萻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와 경종 2년(977)에 세워진<高達寺元宗大師惠眞塔碑>陰記를 참고할 때205)崔彦撝,<萻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朝鮮金石總覽 上≫), 134쪽.
金廷彦, 앞의 글, 213쪽.
대체로 광종대까지는 대덕으로부터 삼중대사까지의 승계가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상의 승계는 경종 이후 현종대 사이에 모두 갖추어진 것으로 추정된다.206)孫夢周,<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朝鮮金石總覽 上≫), 237쪽.
高 聽, 앞의 글, 269쪽.

 승계제도가 승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승과 즉 대선을 통해 초급 법계인 대덕이 수여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승과를 검토하는 가운데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대덕 법계를 받은 이후에는 천태종을 포함하여 선종승은 대사∼대선사 순으로, 교종승의 경우는 대사∼승통의 순으로 법계가 승진하도록 되어 있다. 즉 일단 대덕이 된 이후에는 다시 승과를 거쳐 수여받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왕으로부터「授」「特授」「加」「勅加」로서 법계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승계의 수여는 곧 승려의 법계를 국가가 공인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 승계는 왕사·국사제도와도 서로 연결된다. 왕사와 국사는 선종의 최고 법계인 대선사나 교종의 최고 법계인 승통을 제수받은 고승 가운데서 추대되었던 것이다. 광종 19년(968)에 왕사로 책봉된 탄문의 법계가 삼중대사였던 예가 있지만207)金廷彦,<善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朝鮮金石總覽≫上), 228쪽. 이는 아직 승계가 성립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후 왕사·국사는 거의 대부분 승과를 거쳐 선·교종의 최고 법계에 이른 고승들인 것이다.

 승계제도는 무신집권 이후 승과제도와 함께 침체·쇠퇴하는 양상을 보인다. 일반 과거급제자 출신인 修禪社의 慧諶과 冲止 등이 승과를 거치지 않고 승계를 제수받거나 국사로 책봉된 사실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뇌물을 써서 승계를 제수받는 사례가 있어 羅禪師·綾首座로 불릴208)≪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7년 6월 계미. 정도로 승과·승계제도가 문란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원의 압제 아래서 승과의 실시가 철저하지 못했고, 이와 함께 승계 제수의 절차도 예외와 변칙적으로 운영되었음을 말해 준다.

 승과와 승계제도의 쇠퇴는 고려 후기의 僧政제도 변화와도 맥락을 함께 하는 것으로, 그것은 충선·충숙·공민왕대에 더욱 현저하다. 충선왕은 慈靜國尊 彌授에게 五敎都僧統이라는 非常僧階를 내리고 있으며, 충숙왕은 懺悔府라는 독립관부를 세우게 하여 미수로 하여금 승계의 제수와 주지파견 등 승정을 장악케 하였다. 또 공민왕은 그 5년(1356) 4월에 普愚를 왕사로 책봉한 데 이어, 역시 圓融府라는 관부를 설치하여 승정을 전담시키고 있다. 이같은 승정의 변화로 고려 전기의 승계를 포함한 승과제도가 정상적으로 운영 관리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민왕 19년(1370)에 懶翁和尙 慧動이 주관하여 廣明寺에서 功夫選을 열었다. 고려에서 실시된 최후의 승과로 보이는 이 공부선은 기존의 승과와는 형식을 달리 한다. 조계·천태 兩禪宗과 5敎의 모든 승려를 모아 대회를 열고 그들이 익힌 바를 시험하는 것이었다.209)李 穡, 앞의 글, 499쪽. 이 새로운 형식의 승과를 통해 당시 불교계를 통합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성황을 이루었던 전기의 승과제도에서 볼 때 그 제도 자체의 변화이자 쇠퇴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이상과 같이 고려의 불교계 통합정책과 체계적인 인사행정에 부응하고, 나아가 불교 각 종파의 교학 진흥 및 교단 발전에 실질적인 기능과 역할을 담당했던 승과제도는 고려 후기에 이르면서 점차 침체 쇠퇴하였다. 그러나 儒敎立國을 표방하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 전기까지는 여전히 승계와 함께 승과가 실시되다가 억불정책이 최고조에 달한 연산군 때에 드디어 폐지되고 만다. 조선 전기까지도 승과가 실시되었음은 그것이 지닌 국가제도로서의 성격이 결코 경시될 수 없었던 것임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李逢春>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