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5) 향도조직
  • (2) 고려 전기 향도의 조직과 활동양상

(2) 고려 전기 향도의 조직과 활동양상

 고려시기에 이르면 향도는 더욱 많이 조직되고 그 활동도 보다 활발해진다. 그러나 대개 향도는 지방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중앙의 기록에는 풍부하게 자료를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여러 향도의 사례가 단편적으로나마 남아 있어 이 시기에 다수의 향도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 利川지역에서 결성된 향도는 경종 6년(981)의 磨崖觀音菩薩半跏像에서 살필 수 있다. 銘文은 마모가 심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上首 즉 향도의 지도격 승려가 관음보살반가상을 조성하였다는 것은421)<利川磨崖半跏像銘>(≪韓國金石全文≫中世 上, 亞細亞文化社, 1984). 이 향도가 관음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높았음을 알려준다. 이천 향도와 비슷한 시기에 玄風信士들이 결성했던 향도는 香木을 사찰에 바치는 일을 하였다. 成梵이라는 승려가 萬日彌陀道場을 열어 이후 50여 년간 지속하였는데, 이 향도가 해마다 향목을 채취하여 사찰에 시납하였다.422)≪三國遺事≫권 5, 避隱 8, 包山二聖.

 석탑을 조성한 향도의 예도 찾아진다. 醴泉의 開心寺 석탑은 현종 3년(1012)에 彌勒香徒와 椎香徒라는 두 개의 향도 집단이 조성하였다.423)李泰鎭, 앞의 글. 석탑을 조성하기 위해 결성한 향도는 그 밖에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찰의 시설을 조성하는 역할을 수행한 향도 이외에 사찰에서 사용하는 佛具를 마련하는 향도도 있었다. 廻眞寺의 金鐘은 승려가 化主가 되어 有緣者를 모아 결성한 향도가 조성하였다.424)<東京廻眞寺鐘>(≪韓國金石遺文≫), 294∼295쪽.

 그 밖에 埋香과 立碑를 하는 향도도 있었다. 八歆島의 매향비는 목종 5년(1002) 승려 및 일반인으로 구성된 향도가 매향을 하고 비를 세운 사례이다.425)≪世宗實錄≫권 16, 세종 4년 2월 병진. 매향의 행위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금석문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매향이란 그 결과로서 얻어지는 沈香을 매개로, 장래에 하생할 미륵불과 연결되고 구원을 받고자 하는 신앙행위로서 저급의 下品修者를 위한 논리구조를 갖는 것이다.426)李海濬,<埋香信仰과 그 主導集團의 性格>(≪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향도는 이처럼 기본적으로 불교신앙과 관련하여 조직된 것이며, 불사를 함께 도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석탑이나 불상, 종을 조성하였으며, 향목을 제공하거나 매향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격이 명확하지 않고 국가로부터 문제가 된 萬佛香徒라는 것이 있다. 만불향도는 僧俗雜類들이 무리를 지어 결성한 것으로 염불독경을 하며 詭誕한 짓을 하거나 술과 파 등을 팔거나 무기를 들고 포악한 짓을 하면서 倫常과 풍속을 어지럽혔다고 한다.427)≪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인종 9년 6월.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고 염불독경을 하므로 불교와 긴밀히 관련되는 향도인 것은 분명하나, 그들의 행위는 위정자의 시각에서 윤상과 풍속을 어지럽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행동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사회질서와 배치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고 하겠다.428)蔡雄錫, 앞의 글.

 향도조직이 불교신앙 행위와 관련됨은 일차적이나, 이들이 당시의 향촌사회구조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향도를 구성하거나 주도한 계층, 향도에 참여한 인원의 출신지역과 규모는 이 시기의 향촌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여 준다.

 이천지역에서 마애불을 조성한 향도는 그 규모가 20인 정도였으며, 상수 즉 향도의 지도적 승려가 존재하였다.429)<利川磨崖半跏像>(앞의 책). 香木을 채취하여 사찰이 납부하기 위해 조직한 玄風지역 향도의 경우는 20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신사 즉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결사를 조직하였다.430)≪三國遺事≫권 5, 避隱 8, 包山二聖. 이 두 경우는 향도의 규모가 20인 정도에 그치는 소규모의 것이었다. 이 보다는 규모가 큰 향도의 예도 있었다. 팔흠도에 매향을 함께 하였던 향도는 승려 및 일반인 3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431)≪世宗實錄≫권 16, 세종 4년 2월 병진. 회진사의 금종을 조성한 향도는 회진사의 승려가 화주가 되어 유연자 3,000여 명을 모아 결성하였다. 그 밖에 규모가 매우 큰 예로서는 개심사 석탑을 조성하는 데 동원된 醴泉의 미륵향도와 추향도를 들 수 있는데, 양자를 합하면 1만 명에 이르는 규모였다.432)<東京廻眞寺鐘>(앞의 책).

 이처럼 향도는 대체로 승려와 세속인의 결합에 의해 결성되었지만 신도만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향도는 상당한 재력을 요하는 다양한 불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주가 가능한 층이 되어야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향촌사회에서는 일반 농민들보다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유력계층 특히 향리층이 주로 향도의 결성에 참여하기 마련이었다. 노비나 재력이 없는 백성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향도에 참여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겠지만, 노동력을 제공하는 여유를 갖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향도에 참여하는 것은 당시 사회실정 속에서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불교계가 백성을 위한 적극적인 신앙을 제공하지 않는 처지에서 백성들이 향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흔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향도의 규모는 작게는 20명에서 크게는 1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불사의 내용이나, 신앙행위의 종류, 신앙심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규모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모든 백성이 공동체적인 결속감을 가지고 동원되어 향도를 결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향촌사회조직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집중적으로 주목되어 온 것이 개심사 석탑에 동원된 향도였다.

彌 勒 香 徒 椎 香 徒
上 社
長 司
行 典
位 剛
神丨·順廉434)종래는 ‘廉長’이라고 판독한 것을 채웅석이 정정하였다(채웅석, 앞의 글).
正順
福宣·金由·工達·孝順
香德·貞嵒 등 36인
上 社
仙 郞
大 舍
位 奉

位 剛
京成
光叶·金叶·阿志
香式·金哀
楊寸·能廉 등 40인
隊正·邦祐·其豆·昕京
亻 品 平·矣典·次衣 등 50인

<표 1>開心寺 香徒 組織433)李泰鎭, 앞의 글, 78쪽.

 개심사 석탑에 동원된 향도는 미륵향도와 추향도로 일컬어지는데 각각 42명, 95명에 달하는 임원이 있었으며, 일반 구성원(僧俗郎)의 합계는 1만 인에 달하였다. 그리고 석탑기에는 林·權(昕)·邦·崔氏 姓이 보이는데, 앞의 세 성씨는 예천군(당시의 본주)의 土姓과 村姓이었으며, 후자는 예천과 인접해 있고 당시 속현관계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多仁縣의 토성이었다. 그리고 군의 최고 유력계층인 호장가가 棟梁으로서 役事를 주도하였으며, 光軍조직까지 동원하였다.435)李泰鎭, 앞의 글, 85∼87쪽. 그러나 여기 향도에 참여한 백성이 예천군과, 그 곳에 인접한 다인현의 군현민이 모두 망라되어 참여한 것인지, 아니면 그 지역민 가운데 일부가 참여한 것인지 또 다른 지역출신의 인물이 참여할 수는 없었는지 등은 명확하지 않다.436)향도가 자발성을 전제로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개심사의 경우에도 석탑의 조성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백성으로 한정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1만 인은 예천지방 출신인들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탈락한 주민도 있었을 것이고 타지역 출신인물도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戶長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은 중앙정부에서 문제가 되기 때문에 (≪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자발성이 전제되지 않은 백성의 강제적인 동원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은 또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심사 석탑의 조성에 동원된 백성들은 자발성을 전제로 한 것이며, 그 목적에 찬동한 타지역민도 참여하였을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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