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4. 사원의 경제 활동
  • 1) 사원경제의 배경
  • (2) 종교적 배경

(2) 종교적 배경

 우리가 흔히 고려를 불교국가라 할 만큼 고려시대에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큰 것이었다. 고려의 불교는 위로 왕실로부터 아래로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사상면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고려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지만, 나말려초의 정치적 혼란기에는 이것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가 통일되기 이전의 신라사회는 敎·禪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경전 중심의 교종에 반대하고, 不立文字·見性悟道를 중시하여 修心과 실천을 강조하고 나선 선종이 지방호족의 지지를 받으면서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교계의 분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종과 선종 내에서도 다시 종파간에 대립이 일어나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자신 호족출신으로 입신하여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 태조 왕건은 불교의 각 종파에 대해서도 폭넓은 포용책을 펴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물론 그는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利嚴의 須彌山門의 檀越이 될 만큼 선종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삼국의 통일 후에는 민심의 귀일이라는 측면과 중앙집권화의 사상적 이데올로기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교종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하여튼 태조는 자신이 독실한 신자였으므로 숭불정책을 채택하여 불교를 국교로서 신봉토록 하였다. 그리고 태조는 죽기에 앞서 그의 숭불정책을 후대 왕들도 잘 지킬 것을 당부하였는데, 훈요10조의 제1조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국가의 대업은 필연코 여러 부처님의 호위하는 힘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禪宗과 敎宗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보내 焚修케 하여 각기 그 業을 닦게 하라. 후세에 간신이 집정하여 승려의 간청에 따라 각 종파의 寺社를 다투어 서로 바꾸고 빼앗는 일도 일체 금하도록 하라(≪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태조는 고려의 건국이 전적으로 여러 부처님의 호위에 힘입은 것으로 여기고 선종과 교종을 같이 수행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것은 곧 태조의 뒤를 잇는 역대 왕들이 불교를 신봉하면서 나아가야 할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불교의 호국사상 및 국가와 국민의 화합이었다. 이러한 호국사상과 화합사상은 고려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려사회에서 호국적 성격으로서의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큰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외적이 침입하거나, 반란 및 천재지변이 발생했을 때에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재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불교행사가 자주 열리게 되었다. 그 예로 현종 2년(1011)에 契丹의 聖宗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됨에 따라 남방으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려 조정은, 부처의 힘을 빌어 적군을 물리치고자 大藏經板을 각성하였다. 그 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자, 다시 부처의 힘을 빌어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고종 23년에 대장경 조판에 착수하여 16년간에 걸쳐 완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태조 이래 많은 불사가 행해졌는데, 여기에는 많든 적든 간에 호국적 성격이 나타나고 있다. 여러 불경 가운데 특히≪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에는 호국적 성격이 강조되어 있어서 그에 따라 仁王百高座會가 자주 열렸다. 즉 이≪仁王般若經≫의 護國品에 보면, 국가가 재난을 없애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국왕이 이 불경을 하루에 두 번씩 외울 것과, 또 각기 1백의 불상과 보살상 및 나한상을 모시고 1백 명의 고승을 청하여 1백 개의 등불을 밝히고 1백 가지 향을 피우는 등 의식을 갖추어 三寶를 공양할 것을 설하고 있다. 이 도량이 인왕백고좌회로서 인왕회 혹은 백고좌회 등으로도 불렸는데 이 역시 국가의 안태를 비는 법회 중의 하나로 자주 베풀어졌던 것이다. 이 밖에도 변란이나 외적의 침입 등 국가의 대내외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불교의 수호신이며 전투신인 帝釋天을 모시는 제석도량, 질병과 천재지변을 없애고자 베푸는 消災道場 등도 개최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 법회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경비가 요구되어 보시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불교에서는 보시와 불사의 공덕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승려나 사원에 보시하여 불사를 개설함으로써 개인적 욕망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역대 왕·후비·귀족 등이 사원에 많은 토지와 노비 및 재화를 시납했던 현상은 호국사상에 의해 왕실 조정과 불교 사원이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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