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 도교사상
  • 1) 고려 도교의 수용과 전개
  • (1) 고려 초기의 도교

(1) 고려 초기의 도교

 고려시대의 도교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는 儒·佛·道 3교 정립의 治世觀544)삼국시대 말 고구려의 淵蓋蘇文이 “三敎譬如鼎足 闕一不可”를 내세워 唐으로부터 도교를 유입한 사례(≪三國遺事≫권 3, 寶藏奉老 普德移庵)나, 신라 말의 崔致遠이<鸞郎碑文序>에서 3교를 等位로 보던 관점(≪三國史記≫권 4, 新羅 本紀 4, 眞興王)은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전승된다.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바로 經世濟民을 위해서는 유·불·도 3교를 솥의 세 발과 같이 하여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고루 수용한다는 관점이다.

 특히 신라 말·후삼국시대의 전란을 거치면서 三韓一統을 국가적 과제로 삼던 태조는 당시 호족들의 신앙으로 각광을 받던 선종 각 山門의 연합을 표방하는 등 불교를 건국의 신앙기반으로 하였지만, 國家祚業의 융창을 기원하는 호국신앙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유신앙과 함께 유·불·도 등 여러 종교의 신앙과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즉 鎭護國家와 經世濟民을 위해 3교를 等位로 보는 鼎足的 관념을 계승함으로써, 도교는 유·불 2교와 더불어 일컬어지게545)성종 원년(982)에 崔承老가 撰進한 時務二十八條에 “三敎 各有所業 而行之者 不可混而一之也”(≪高麗史節要≫권 2)라 하였다.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도교는 건국 초기부터 그 흐름을 찾을 수 있으므로, 고려 초의 八關會를 道敎齋醮로 보는 견해도 있다.546)李能和,≪朝鮮道敎史≫(李鍾殷 역;보성문화사, 1977), 88쪽에서 고려 도교의 존재를 道佛習合關係에서 찾은 이후, 고려 초기의 도교를 흔히 圖讖信仰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宋恒龍,≪韓國道敎哲學史≫,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87, 59쪽). 그러나 도교가 도참 등과 관련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하더라도, 도교의 위치에 도참을 대치시켜서 파악하는 것은 재고해 볼 사항이다. 그러나 각종 속신적 요소를 포함하여 王室 五禮의 賀禮雜儀로 이루어진 팔관회는 시대에 따라 그 성격도 변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도참신앙이 유행하는 가운데 불교의 호국적 전개와 관련되어 행해진 국가적 祭儀이며, 도교행사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547)梁銀容,<高麗時代의 道敎와 佛敎>(≪韓國宗敎≫8, 1983), 294쪽 참조.
고려시대의 도교자료에 대해서는 梁銀容,<高麗道敎의 歷史資料>(≪韓國宗敎≫10, 1985), 95쪽 참조.

 또 신라 말의 道詵(先覺國師, 827∼898)에 의해 집대성된 裨補寺塔說548)비보사탑설이란 佛寺·佛塔·浮屠 등의 건립에 의해 地氣를 북돋아 祚業에 資補한다는 원리로, 風水圖讖說의 전개이다(梁銀容,<道詵國師 裨補寺塔說의 硏究>,≪先覺國師 道詵의 新硏究≫, 靈岩郡, 1988, 183쪽).에는 陰陽五行說과 地氣衰旺說 등 전통신앙의 요소가 적지 않게 수용되었다. 그리고 태조의 訓要十條549)제2조에 “모든 사원은 道詵의 의견에 따라 국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세운 것이다. 도선의 말에 따라 내가 선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다면 地德을 손상시켜 祚業이 길지 못할 것이다”(≪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라 하였다. 이러한 習合思想的 경향은 940년 삼국통일을 기념하는 성격의 開泰寺 華嚴法會의 疏에서 태조가 佛·菩薩·羅漢·聖衆 등 불교의 신앙 대상뿐 아니라 日月星辰·天龍八部·岳鎭海瀆·名山大川 및 天地一切靈祗 等에게 기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崔瀣,≪東人之文四六≫권 8).에는 도교적인 면모를 살필 여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호국원리에 입각한 신앙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으므로 반드시 도교적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도교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태조 7년(924)에 수도 개성에 세운 九曜堂을 들 수 있다. 즉 구요당은 이 해에 外帝釋院·神衆院과 함께 건립되었는데550)≪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7년.
종래에는 구요당의 성격이 밝혀지지 않아, 함께 세워진 사원들과 같이 막연하게 佛寺로 인정되어 왔으나(金煐泰,≪韓國佛敎史槪說≫, 경서원, 1986, 122쪽 등),≪東國輿地勝覽≫권 5, 開城府 下 古跡條에 나타난 것처럼 日月星辰에 제사지내는 초성처이며, 이후 그러한 행사내용이≪高麗史≫등에서 散見된다.
이것이 확인된 고려 최초의 도교기관 즉 醮星處이다. 성종 2년(983) 이전에 조정에서는 이미 빈번한 齋醮를 설행했으므로,551)≪高麗史節要≫권 2, 성종 2년 崔承老의 時務二十八條에서 재초가 빈번하게 행해진 사실이 확인된다. 구요당 외에도 도교 祠宇가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 초기에는 도교 사우를 말하는 宮·觀·堂 등이 정례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교의례인 재초나 도량이 궁궐의 전각 등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그러므로 구요당 외에 어떤 도교기관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곳의 재초설행 전통은 후대로 계승된다. 물론 구요당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도교를 成立道敎(교단 도교)로 볼 것인가 혹은 民衆道敎(민간도교)의 차원에 머문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祈福禳災와 鎭護國家를 염원하면서 다양한 의례를 번다하게 행하던 고려 왕실의 醮를 도교적인 재초로 보는 것은 당연하며, 성립도교로 체계화되는 고려 중기 이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고려에서 도교가 존재했던 이유 내지 기능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구요당에 관련된 기사는 이후≪高麗史≫등에서 총27건을552)梁銀容,<高麗道敎思想의 硏究>(≪圓光大 論文集≫19, 1985), 54쪽.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을 재위 기간별로 분석해 보면, 재초설행이 문종대에 2회, 예종대에 1회, 충렬왕대에 1회, 충숙왕대에 2회로 모두 6회 나타난다. 그리고 왕의 親行이 예종(1105∼1122)과 인종대(1122∼1146)에 각1회, 고종대(1213∼1259)에 14회, 충렬왕대(1274∼1303)에 2회로 모두 18회 등이다. 이를 살펴보면 구요당은 초성처로서의 성격과 함께 왕의 친행을 맞이할 정도의 국가적 위치를 지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 중에 주목되는 것은 구요당의 창건 기사가 두 차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앞에서 살펴본 태조 7년의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고종대의 權臣 崔沆(?∼1258)이 고종 45년(1258)에 창설한553)≪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0년 6월. 것이다. 최항 당시는 몽고에 밀려 조정이 江都(강화)로 옮겼을 때이므로, 사직의 수호를 기원하는 재초도 빈번히 설행되었던 모양이며 구요당의 창건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고종은 구요당에 전후 14회나 친행하였는데, 이는 고종의 재위 기간이 몽고와의 항쟁과 굴종으로 점철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당시의 사조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같은 해 3대에 걸친 최씨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왕권이 회복되자「권신가의 淨事色器械」를 거두어 設醮都監으로 淨事色을 설치하였는데,554)≪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淨事色.
또 이 기사에 의하면 충선왕 때에 정사색을 齋醮都監으로 고쳤다고 한다. 정사색의 설치과정과 그 성격은 梁銀容,<高麗道敎의 淨事色考>(≪韓國宗敎≫7, 1982) 참조.
「권신가의 정사색」이란 바로 최항이 창건한 구요당을 말하며, 고종은 設醮를 통해 왕권회복을 조야에 선양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구요당의 재초를 살펴보면 祈雨를 위해 설행된 것이 3회이며, 十一曜醮라는 명칭은 1회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십일요초가 그 밖에도 설행되었으므로 구요당과 관련된 것도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당내에는 十一曜像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像 안에서 주악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국가에 어떤 징조가 있음을 예시하는 이른바 도참으로 인식되며, 왕실에서는 이에 따라 祈禳災變을 위한 재초를 십일요전에서 베풀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보면 십일요상은 구요당의 本尊列像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구요당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다만「堂」이라는 명칭으로 보아「宮」이나「觀」보다는 소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道觀에는 흔히 三淸像을 중심으로 星宿가 배열되나, 거기에는 당호로 미루어 九曜像이 봉안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구요는 일·월·화·수·목·금·토의 7政과 羅喉·計都를 합한 것이다. 이 나후·계도는 紫氣·月孛를 합하여 4曜라 하며, 7정과 4요를 합한 것이 11요이다. 壽祿貧富와 生死禍福을 북극성을 비롯한 일월성신이 주재한다고 믿는 星宿信仰이 고려 초기부더 왕실에 수용되어 星醮設行을 자극해 온 것이라 보인다. 왕실의 입장에서는 재초의례에서 왕이 醮主가 되기 때문에 초성처는 왕권을 상징하며, 고종대에 왕권회복에 맞추어 설초도감을 마련한 것도 그 한 예일 것이다. 따라서 설초도감의 전통은 태조 때의 구요당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