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 도교사상
  • 2) 도교사상의 전개
  • (2) 재초청사의 도교이념

(2) 재초청사의 도교이념

 고려 도교가 과의도교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재초를 중심한 도교의 존재형태에서 드러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것이 齋醮靑詞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청사는 신라 말 崔致遠(857∼?)이 당에 있을 때 작성한 것으로부터 조선시대 黃啓沃(?∼1494)에 이르기까지 13인에 의한 90여 편을 헤아린다.596)梁銀容,<高麗道敎, 醮禮靑詞資料>(≪圓光大 論文集-인문-≫20, 1986) 참조.
최근에 확인된 문집류의 몇 건을 더하면 약 100편 정도가 남아있는 셈이다.
그 대부분이 고려시대에 이루어졌으므로 고려시대의 도교사상을 담고 있는 보고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청사의 지은이를 살펴보면 金富軾(1074∼1151) 3편, 崔惟淸(1095∼1174) 1편, 金克己(명종대) 4편, 李奎報(1168∼1241) 37편, 鄭誧(충선·충숙왕대) 2편, 李穀(1298∼1351) 3편, 權近(1352∼1409) 13편 등이다. 初·亞·終 3獻이 갖추어진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초명을 선명하게 전하는 것도 있고 찬술 당시의 상황까지를 소상하게 전하는 것도 있다. 이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청사의 구조적 형식이 역사적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청사는 크게 나누어 撰述緣起, 現實狀況, 祈願事項으로 조직되어 있다.597)金勝惠, 앞의 글, 109쪽에서 말한, 첫째 道의 신묘함을 묘사하는 서론 부분, 둘째 天災나 외적침입 등을 묘사하는 본론 부분, 셋째 복을 기원하는 결론 부분을 의미한다. 한편 金洛必,<高麗中期 道敎의 綜合的 硏究>(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 앞의 책, 1989), 49쪽에서는, 첫째 도의 찬양, 둘째 정치 사회상황, 셋째 참회와 각오, 넷째 청원기도로 세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은 최치원의 문건이 하나의 전형을 이루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승된다. 즉 그의 文名이 고려시대 이후 거듭 높아지고 그가 지은 청사가 고려시대 崔瀣의≪東人之文四六≫(1155)이나 조선시대 徐居正 등의≪東文選≫(1478)에 수록된 바와 같이, 그의 청사는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조선시대에 그를 海東丹學의 원류로 파악한 것이598)韓無畏,≪海東傳道錄≫. 어디에 근거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사상적 흐름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 청사는 고려 도교의 과의도교적 성격을 말해준다. 設醮主가 왕이고 청사작성은 왕명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공적 성격을 띤다. 그것을 관장한 사람은 도관이나 도사들이 아니라 秘書省의 관리였다.599)≪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11년 윤8월 임자조에 의하면 權知秘書校書郎 李白賁은 “先王之世 每押齋醮詞疏 必齋宿 昧爽坐殿 校書郞奉函御書 留院官奉筆 硯立殿下”라고 아뢰었다. 청사의 찬술자가 한결같이 조정을 대표할 만한 문신이었음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종 이전부터 재초가 설행되었음에도, 그 이후에 활동한 김부식의 撰文부터 청사가 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 도교의 의례작법이 이 때부터 정비되었음을 말해준다. 김부식이 인종 13년(1135)에 道詵讖記를 앞세운 妙淸(?∼1135) 등 서경천도세력의 난을 평정했던 인물이라는 점은600)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乙酉文化社, 1948), 174쪽. 도교와 도참간의 미묘한 흐름의 차이를601)金洛必, 앞의 글, 51쪽에서는 “도교사상을 一神과 多神의 혼합된 신앙, 철학적 道論과 종교적 神論이 혼재된 관점이라면, 이는 적어도 風水圖讖을 중심으로 한 祈福的 讖緯的 성격과는 그 흐름을 달리한다”고 보고 있다. 말해주는 동시에, 청사 작성의 국가적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셋째, 청사의 내용에는 당연히 도교사상이 밝혀져 있다. 道敎三寶를 갖추고 있는 상황이 나타나며,602)예컨대 李奎報의<年交道場兼醮文>에 “玆沿仙籙 聿峙法壇 邀羽服之高流 諷琳編之秘蘊 仰性靈鑒…”(≪東國李相國集≫권 40)이라는 일절이 있다. 이는 첫 구절부터 設醮法式, 造壇, 도사, 과의내용, 기원의 순으로 이해된다. 신앙의 대상인 神·上帝 등에 대한 일단의 관념이 피력된다. 왕의 본명초에서는 본명성이, 태일초에는 태일신이 각각 모셔지는 것은 당연하다. 上淸派의 흐름에 입각한 최치원의 사상은 후대의 흐름과 다소 다르지만,603)金洛必, 앞의 글. 그가 중시했던 元始天尊이 예종 때 옥촉정에 봉안되었다. 즉 청사에 나타난 사상은 신앙현상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잡다한 신관념 등은 당시의 신앙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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