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2. 풍수지리·도참사상
  • 2) 풍수지리·도참사상의 추이
  • (2) 서경천도운동

(2) 서경천도운동

 서경은 고구려 이래로 枕山帶水, 負江臨水의 풍수지리적 조건을 갖춘 중요한 땅으로 추앙받던 곳이다. 동쪽과 남쪽은 大同江에 면하고, 북쪽은 乙密臺와 牧丹峰을 포괄하는 錦繡山에 기대어 있는데, 이것을 主山으로 하여 명당이 펼쳐진 형세이다. 서쪽으로는 대동강의 지류인 普通江이 흐르고 있어 풍수가에서 흔히 말하는 山河襟帶 바로 그것이다.

 태조의 훈요 10조 제5훈에는 서경은 水德이 順調하여 우리나라 地脈의 근본이 된다고도 하였다. 이 곳은 이미 태조 26년(943)에 풍수지리설상 ‘大業萬代’의 땅으로서 국왕 巡駐地로 지목된 곳이며,661)≪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定宗 2년(947)에는 지리도참설에 의한 천도지로서 궁궐을 짓는 역사까지 착수되었으나 정종의 붕어로 그 실현을 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정종은 도참을 믿어 서경에 천도할 것을 결의하고 크게 토목을 일으키어 백성을 노역하게 함은 물론, 개경에 살고 있던 부유한 계층들을 억지로 서경에 이주케 하여 원성이 높아졌으나, 마침 승하하고 말았던 것이다.662)≪高麗史≫권 2, 世家 2, 정종 2년.

 정종이 대체 어떠한 내용의 도참에 영향을 받아 서경 천도를 결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다만 이 때의 도참이 개경과 서경의 地脈衰旺, 혹은 水德順逆의 설을 기조로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개경의 터는 수덕이 불순하고 지맥이 열세한 때문에 왕업이 쇠퇴하기 쉽고, 이에 반하여 서경은 수덕이 순조롭고 지맥이 왕성한 소위 ‘대업만대’의 지형이므로 마땅히 서경에 도읍하여 무궁한 복리를 받을 것이라는 지리도참설에 정종이 이끌렸을 것이라는 추측이다.663)李丙燾, 앞의 글, 108∼115쪽.

 서경은 광종 11년(959)에 개경을 皇都로 고침과 더불어 서도로 개칭되고, 성종 14년(994)에는 서경이라는 옛 명칭이 다시 사용되었다가 목종 원년(997)에는 다시 鎬京으로 개칭되었다. 여기에서 특히 서경을 서도니 호경이니 한 것은 周에서 東都인 洛邑에 대하여 鎬京을 西都라 한 데서 나온 것으로, 당시에 서경을 얼마나 중하게 여겼던가를 알 수 있다.664)金庠基,<妙淸의 遷都運動과 稱帝建元論에 대하여>(≪국사상의 제문제≫4, 국사편찬위원회, 1956), 44쪽.

 그 뒤 문종 16년(1072)에는 다시 西京留守官을 두고 특히 서경 중심의 京畿四道를 설정하였으며,665)≪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西京留守官. 역대 제왕들도 마찬가지로 지리도참설을 신봉하여 자주 서경에 巡駐하고 옛 궁을 수리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과정을 거친 서경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된 것은 인종 때에 승 妙淸과 日官 白壽翰 등이 들고 나온 上京인 개경의 地氣衰旺說 및 서경의 地德說, 그리고 뒤이어 서경 천도를 중심으로 하여 발발한 묘청의 난 때문이다. 한마디로 묘청의 난은 서경 풍수지리의 지덕설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결과는 西京畿라는 막강한 서경의 행정구역 명호가 해체되고 서경의 지위도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 전말을 살펴보면 시작은 인종 6년(1127)에 묘청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 즉 李資謙의 변란으로 인한 개경 궁궐의 全燒와 잦은 천재지변을 구실로 삼아 다음과 같이 인종에게 건의한 데서 비롯된다.

臣 등이 西京 林原驛의 땅을 살펴보건대, 이곳이 음양가들이 말하는 소위 大華勢가 틀림없습니다. 만일 이 곳에 궁궐을 세우고 移御해 있으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고 金國도 幣帛을 가지고 저절로 항복해 올 것이며, 36국이 모두 臣服할 것입니다(≪高麗史≫권 127, 列傳 40, 妙淸).

 여기서 핵심이 되는 풍수 개념은「大華勢」이다. 華는 花로도 쓰는데, 대개 풍수가에서는 산수의 發脈과 結局을 흔히 수목의 根幹枝葉花實 등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이 상례이다. 산과 물이 모여들어 吉格을 이루는 명당터를 흔히 花勢 혹은 花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풍수의 논리 체계로 말하자면 形局論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형국론은 지세를 전반적으로 개관할 수 있는 술법이기 때문에 술사 부류가 가장 많이 들먹이는 내용이고,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세의 개관이란 것이 보는 입장에 따라 달리 인식될 수 있는 것이며,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명확한 술법은 아니다.

 ≪雪心賦≫가 “物은 人·物·禽·獸類로 미루어 헤아릴 수 있고, 穴은 形으로 말미암아 취한다”고666)≪雪心賦正解≫권 4, 論穴形異同及沙水凶形應驗. 갈파한 바와 같이, 실제 踏山하며 길지를 고르는 과정에 있어서는 눈으로 직접 길흉을 판별할 수 있는 어떤 유형 분류의 필요성이 생긴다. 산에 들어가 보면 풍수 이론은 이론대로 머리 속에서 맴돌고 산천은 산천대로 존재하여 이론을 實地勢에 대비하여 보기 곤란한 소위 “山自山 書自書”의 현상이 벌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럴 때 애매모호한 산천형세를 인물 금수의 형상에 유추하여 판단하면 비교적 쉽게 地勢大觀과 그 길흉을 떠올릴 수 있다.

 형국론은 우주의 만물만상이 理氣가 있으며 形像이 있기 때문에 외형 물체에는 그 형상에 상응한 氣象과 氣運이 내재해 있다고 보는 관념을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앞서 밝힌 바와 같이 物形으로 유추한다 하여도 術師의 주관이 작용될 소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형국론은 풍수설의 본질적인 체계 구조에는 잘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 풍수 응용서나 備忘記 정도에나 나타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체적인 윤곽만으로 단정해서는 안되는 것이 역시 형국론이다.≪설심부≫에서도 이를 경계하여 “호랑이는 사자와 비슷하고 기러기는 봉황과 다르지 않게 보이지만 만일 조그만 차이가 있어도 사슬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꼴이다. 모두 한덩어리로 되어 구별이 없으면 지렁이를 뱀으로 안다”고667)위와 같음. 지적하고 있다.

 物勢形狀이 사람의 길흉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원시시대부터 類物信仰으로서 존재했었다. 원래 풍수설 성립 초기에는 이것이 개입되어 있지 못했던 듯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자생적으로 이 사고관념이 있었던 듯하나 중국의 경우에는 풍수지리의 발달 과정에서 유물신앙적인 관념이 이입되었는데, 이것은 풍수 논리가 음양오행설에 깊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지만 역시 중국의 경우에는 형국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만물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氣의 차이 때문인 것이고 이 氣의 象이 形으로 나타나는 만큼, 形으로 物의 元氣를 알아낼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 형국론으로 발전된 것이라 본다. 예컨대 나무가 우뚝 솟은 듯한 山形을 갖춘 산은 木氣가 흘러 木山으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산세는 火山으로 보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혹은 多産과 결부하여 여성의 생식기에 유추하거나, 길한 짐승의 형상을 비견하는 것 등이 모두 그와 같은 관념의 소산이다.

 산천이 融結하면 그 외관상 많은 象과 物形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 물형과 상은 각각 그에 상응한 理氣와 象運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풍수설에 있어서는 保局形勢와 山穴形體에 따라 이에 상응한 정기가 그 땅에 모여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穴處 주변의 국면이 어떤 형국을 갖는가 하는 것은 길흉판단에 있어 중요한 지표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山形 판단에는 5星法이 있다. “經에 이르기를 하늘에는 五星이 있고 땅에는 五行이 있다고 한다. 하늘의 5성은 별자리로 나뉘고 땅의 5행은 산천으로 벌리어, 氣는 땅으로 흐르고 形은 하늘에 걸려 있다. 따라서 형으로 기를 보아 人紀를 세운다”고668)≪地理正宗≫권 1, 靑囊經 권 中. 하였다. 이것이 산형을 5성에 비기어 보는 근거이다.

 5성은 오행설에 기초하며, 오행설의 근본은 剛柔와 같이≪書經≫의 洪範 중에 있는데, 홍범 九疇의 차례는 수·화·목·금·토로 되어 있다. 오행의 성격에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民用五材」라 하여 고대인의 생활 소재를 들어 오행이라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따라서 5材의 배열도 사람의 생명 지속에 가장 직접적인 수, 화로 시작하여 다음의 생활 소재인 목, 금에 이르고 최후로 일체 소재의 기본이 되는 토가 제시되었다. 이 생활 소재로서의 사람들이 쓰는 5재가 점차로 추상화되어 일종의 원리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 원리화된 5행조직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禮記≫의 月令이라 할 수 있다. 월령은 천문, 역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相生, 相剋의 형세를 취하기도 한다. 이 상생·상극원리가 산천 형국에, 특히 산의 모양에 결부되어 5성법을 낳게 되는 것이다.

 5성의 생김새는 둥근 모양을 한 것이 金星, 곧고 모나지 않으며 直聳한 것이 木星, 물이 흐르듯 큰 굴곡없이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뻗어 간 것이 水星, 불꽃같이 뾰족하고 날카롭게 생긴 것이 火星, 반듯하고 옆으로 뻗어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것이 土星이다.

 5성은 淸·濁·凶 3格으로 그 길흉을 논하는 바, 청이란 별이 수려하고 광채가 나는 것이며, 탁이란 별이 추악하고 거칠고 煞을 띤 것을 말한다. 산의 형세를 미루어 유형을 분류하고 그로써 형국을 논하려면 먼저 5성에 의하여 대관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또 국면을 이루고 있는 주위의 각 산들과 결부되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유형을 낳게 된다. 그 조사된 유형만도 수백 가지이며669)村山智順,≪朝鮮の風水≫(朝鮮總督府, 1931), 229∼246쪽.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궁무진한 가지수를 파생시킬 수도 있는 개념이다.670)崔昌祚, 앞의 책, 179∼188쪽.

 따라서 앞서 서경의 大花勢라는 것도 땅의 명당 모양을 꽃에 비유하여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경우인가를 표현하는 하나의 형국론적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인종 7년에는 드디어 林原驛에 大花新宮이 낙성되었으며, 묘청은 각종 음양비술로써 국왕의 移御를 잦게 하고 나중에는 서경을 국도로 삼아야 한다면서 서경 천도 운동을 벌이다가 개경에 있는 儒臣들의 맹렬한 배척을 받게 되자 드디어 난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반란의 결과로 서경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는데, 먼저 문종 때에 설치되었던 西京畿四道라는 행정 구역이 해체되어 江東·江西·中和·順和·三登·三和의 6縣으로 되고, 또한 3경 중에서 서경은 이미 국왕 巡駐地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린거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명종 이후부터는 전래의 3신사상과 산악숭배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는, 거리상 개경 가까이 위치한 三蘇(三山)를 神山으로서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 도참에 부응하는 길지로 중시하여 여러 차례 相地하고 궁궐을 조성하며, 더 나아가서는 천도의 후보지로서까지 논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崔昌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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