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Ⅰ. 교육
  • 2. 지방의 교육기관
  • 3) 서재

3) 서재

 고려시대의 私學 교육기관으로는 12도와 서재·서당 등이 있었다. 그 중 서재는 고려 후기에 조명된 사대부의 개인 독서실로 가내에 한정된 폐쇄적 형태의 家學的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그런데 점차 외부인에게 개방·확대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서재는 고려의「家塾 黨庠」의 교육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사대부들의 욕구 즉 학문적 전통과 지배층으로서의 지위를 전승시키려는 의욕에서 자신들의 자손이나 근친에 한하여 교육의 기회를 부여한 가학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308)李秉烋,<麗末鮮初의 科業敎育-書齋를 中心으로->(≪歷史學報≫67, 1975), 48 ∼49쪽.

 고려시대의 서재에 관한 기록은 성종 11년(993) 12월에 내린 다음의 교서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勝地를 가려 널리 書齋와 學舍를 짓고 田庄을 지급하여 學粮에 충당하도록 하라(≪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11년 12월 敎).

 그러나 이 교서 중의 서재는 사립의 교육기구가 아니라 관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시대에도 사학 교육기구가 널리 설치되었음은≪高麗圖經≫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래로는 여염집거리에도 經館·書社가 두세 집 건너 바라보고 있어 백성의 미혼 자제들이 무리지어 스승에게 글 공부를 받았다(≪高麗圖經≫권 40, 儒學).

 여기에 나오는 經館·書社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서재나 서당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고려시대에 서재가 조영되어 교육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무신정권기 이후로 보인다. 무신정권기에는 문무가 교체되고 잇따라 몽고의 침략으로 국토가 황폐되어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환 하에서는 국가의 교육재정 부담 능력의 한계와 교수관의 부족 등으로 개경과 지방의 관학 교육기능이 약화되어 향촌의 교화교육이나 관인 양성을 위한 과업교육은 물론 문운이 크게 쇠퇴하였다. 이같은 상황 하에서 국가는 향촌사회의 교육기능을 보강하려는 현실적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며, 향촌사회의 재지세력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향촌을 교화하고 유교적 지배질서를 수립하여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구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무신정권 이후 산림이나 산사에 은둔한 文儒나 낙향한 顯官들은 그들의 가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통하여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연고가 있는 곳에 서재를 지어 학문을 닦으면서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국가는 약 화된 관학교육의 기능을 보강하고자 과업교육을 서재에 맡겨 이를 묵인하 거나 어떤 경우에는 권장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309)李秉烋, 위의 글, 50쪽.

 초기적인 서재의 존재는 韓彦國의 서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서재는 경관이 수려한 산간에 마련된 독서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10)李仁老,≪破閑集≫권 上. 그러나 그것 이 교육장으로 활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재의 초기적인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서재교육은 사대부가의 가학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사대부가의 가학의 사례는 金九容이 그의 외조인 閔思平에게서 수업한 것 을 비롯하여311)李穡,≪牧隱文集≫권 13, 題愓若齋學吟後. 金台鉉이 그의 숙부에게서,312)崔瀣,≪拙高千百≫권 1, 金文正公墓誌. 尹澤은 그의 고조부에게서,313)李穡,≪牧隱文集≫권 17, 墓誌銘 栗亭先生尹文貞公墓誌銘. 安輔는 그의 형에게서,314)安軸,≪謹齋集≫권 4, 墓誌銘. 崔瀁과 朴訔은 그의 妻父에게서,315)李行,≪騎牛集≫권 2, 附錄, 杜門洞七十二賢錄 崔瀁.
≪國朝人物考≫권 1, 相臣, 朴訔.
李原은 그의 매형에게서,316)≪國朝人物考≫권 1, 相臣, 李原. 鄭麟趾는 그의 아버지에게서,317)≪朝鮮金石總覽≫下, 鄭麟趾墓表. 각각 수업한 것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학은 자기의 자손이나 근친에게 한하여 폐쇄적 형태 의 성격을 띠었으나 여말에 이르러서는 외부인에게 개방·확대되어 갔다.

 여말 辛旽의 전횡,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의 정치적 세력 다툼,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은 정치 정세의 불안을 가져왔다. 왕조교체기라는 격동기에는 관인사회 내부의 정치투쟁에서 패배하여 도태되었거나 현실에 적응하기를 거부한 사대부들이 일시적으로 또는 일생 동안 재지적 기반이 있는 향촌이나 산간에 은둔하여 서재를 조영하고 학문을 연찬하는 한편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여말의 서재교육을 담당한 주체로 등장하였으며, 여말의 정치적·사회적 변화는 서재교육의 발전을 자극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吉再가 선산의 金烏山 아래 낙향하여 대규모적이고도 본격적인 서재교육을 하였으며,318)吉再,≪冶隱先生言行拾遺≫.
成俔,≪慵齋叢話≫권 3.
趙庸이 謫所에서도 교육활동을 전개하여 명유·고관을 배출시켰던319)≪新增東國輿地勝覽≫권 25, 慶尙道 眞寶縣, 人物. 것은 여말 격동기에 서재교육의 발전상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여말의 면유나 현관으로서 서재교육을 담당하였거나 그 곳에서 수업을 한 경력이 없는 이는 드물었을 정도였다.

 다음<표 3>은 여말의 명유나 현관이 서재교육을 담당하였거나 그 곳에서 수업을 한 경력을 나타내주는 자료로서,320)李秉烋, 앞의 글, 56쪽. 이를 보면 서재교육이 외부인에까지 개방·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授業者 受業者 전 거
禹 倬
尹 澤
安 輔


李 穡





泰中吉
鄭夢周





鄭夢周




李 行
權 近


權 遇
吉 再



鄭道傳

趙 庸

李 穡

李 集
禹玄寶

文益漸
崔元道
卞季良
李文和
吉 再

卞季良
李文和
吉 再
河 演
鄭師仲
洪彦修
李之直
朴 融
朴 昭
朴 聰
朴 調
李 璠
卞季良
許 稠
金 泮
鄭玉潤

王 沽
曹尙治
金淑滋


尹 祥
高麗史 권 109, 列傳 22
牧隱文集 8, 序
謹齋集 4, 墓地銘
遁村集 4, 師友淵源錄
朝鮮歷代名臣錄 2
牧隱文集 10, 說
朝鮮歷代名臣錄 2
    〃    2
    〃    3
    〃    3
冶隱集 上, 行狀
牧隱文集 20, 傳
朝鮮歷代名臣錄 3
    〃    3
冶隱集 上, 行狀
朝鮮歷代名臣錄 3
    〃    3
    〃    2
遁村先生世稿 1, 附錄
朝鮮歷代名臣錄 3
    〃    3
    〃    3
    〃    3
    〃    3
    〃    3
國朝人物考 1, 相臣
朝鮮歷代名臣錄 3
    〃    3
    〃    3
    〃    3
    〃    3
佔畢齋集彛尊錄 上
東國輿地勝覽 권 25, 奉化 人物
別洞集 年譜

<표 3>

 서재교육은 교육을 담당하는 師儒의 능력이나 교육목표·수준에 따라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누어지며, 그로 인하여 교육내용이나 양상도 달라지게 된다. 서재 가운데는 초보적인 교과교육(유학교육)에서부터 과업교육, 더 나아가서는 성리학의 이론 탐구까지의 폭넓은 영역을 모두 감당해 낼 수 있는 교 화적·과업적·위학적인 성격의 것이 있었다.321)李秉烋, 위의 글, 57쪽.

 李穡·鄭夢周·吉再 등에서 비롯하여 金叔滋 부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자들의 서재는 위학적 교육의 서재에 속할 수 있을 것이나, 학문적 깊이와 교육 대상의 범위가 성리학 연구보다는 과업교육의 성격이 강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교화적 교육이 배제된 것은 아니나 과업적·위학적 수준의 高弟的 서재의 성격이 강하였던 듯싶다.322)李秉烋, 위의 글, 58쪽.

 다음은 문과를 목표로 한 과업교육을 위한 고제적 서재는 朴恒의 서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항은 현직 관인으로서 과업교육을 실시하여 그가 殿試의 고시관이 되었을 때 자신의 제자들을 많이 급제시켰는데, 이것은 과업교육의 한 예이다.323)≪高麗史≫권 106, 列傳 19, 朴恒.

 끝으로 유학의 기본교육이나 유교도덕교육을 목표로 한 교화교육을 위한 서재가 있었다. 여말의 羅興儒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塾舍를 열어 동몽을 교육한 것은 그 예이다.324)≪高麗史≫권 114, 列傳 27, 羅興儒. 이러한 서재는 처음부터 교화 수준의 교육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수업자와 師儒의 수준이 그에 상응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서재는 수적 규모나 그 확산범위에 있어서 당시의 사학 교육기관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사학 교육기구이면서도 집권적 관인사회의 보호 와 장려를 받으면서 조선시대로 이어져 발전하였다.

 서재의 교육내용은 儒士의 능력·수준이나 교육목표에 따라 다를 것이나 과업교육이 중요시되었던 당시에 있어서는 유교의 경전이나 제자백가서 등이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조선 초의 사실이지만 김숙자는 자신의 자제를 교육하면서≪동몽훈≫·≪효경≫·≪대학≫·≪논어≫·≪중용≫·≪시경≫·≪서경≫·≪춘추≫·≪주역≫·≪예기≫·≪통감≫·諸史·百家 등을 그 讀誦 순서에 따라 차례를 거치지 않고 뛰어넘는 일이 없이 학습하도록 당부하였다.325)金宗直,≪佔畢齋集≫, 彛尊錄 下, 先公事業. 이것을 보면 여말 서재교육의 과목도 이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과목을 아무리 흘륭한 사유라도 능통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때로는 서재를 편력하면서 복수의 사유가 수업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길재가 어렸을 때 商山의 司錄 朴賁에게 수업하고, 뒤에 상경하여 이색·정몽주·권근 등에게 편력하면서 수업한 뒤 등제한 사실은326)吉再,≪冶隱先生言行拾遺≫권 上, 行狀. 이를 말하여 준다. 특히 성리학이 전래되어 사대부들의 새로운 이념적 철학으로 수용 보급되면서 여말에는 성균관에 4서 5경 재가 세워졌고, 과거에 있어서도 고려 후기에는 경학을 중요시 하였다.327)許興植, 앞의 책, 97쪽. 이처럼 여말의 학풍이 전기의 사장풍에서 경학풍으로 바뀌어짐에 따라 서재교육의 과목도 경학을 중요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말의 서재교육은 광주·천녕 여흥(여주) 등 근기지방 중심의 양상을 띠었던 것 같다.328)개경 중심의 지배체제하에서는 그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곧 지배층의 지위를 상실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므로 관인들은 대부분 개경이나 근기지방에 생활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李秉烋, 앞의 글, 63쪽·文炯萬,<麗代「歸 鄕」考>,≪歷史學報≫23, 1964 참조). 광주는 廣州 李氏의 본관으로 李集과 之直·仁孫·克培·克堪·克增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후손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천녕은 이집이 은거했던 곳이기도 하거니와329)李集,≪遁村先生遺稿≫권 4, 附錄 遺事. 여흥은 閔令謨의 후손으로 宗儒·頔·思平으로 연결되는 벌족 驪興 閔氏의 세력 근거지였으며, 驪州 李氏의 본관으로 李奎報·李行 등을 배출한 곳이었다.330)李秉烋, 앞의 글, 64쪽. 또한 廉興邦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민사평의 외손인 김구용과 이집을 매개로 한 이색·정몽주·이숭인·이존오·이달충·이행·정도전 등이 연결되어 이곳을 중심으로 학문적 교류와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331)金九容,≪愓若齋學吟集≫, 世系行事要略. 또한 선산과 밀양을 잇는 지역은 서재교육이 전형적으로 부각된 곳이기도 하였다.

 여말 서재 중심의 과업교육은 사대부나 재지세력의 농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농장 내부에 있는 亭·軒·齋·菴·室 등의 건물이 교육장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332)李秉烋, 앞의 글, 65쪽.
柳洪烈,<麗末鮮初の私學>(≪靑丘學叢≫24, 1936), 92쪽.
李晟의「竹溪村舍」나333)≪高麗史≫권 109, 列傳 22, 李晟. 李集의「川寧江舍」는334)李集,≪遁村先生遺稿≫권 4, 附錄, 遺事. 후진교육에 활용된 한 예이기도 하다.

 고려 후기에 조영된 사학 교육기구인 서재는 여말의 정치적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관학 교육기능의 약화로 인한 향촌사회의 유학교육을 보강하고 과업교육의 수행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아가 爲學敎育의 기능도 수행함으로써 성리학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이런 점에서 여말의 서재가 갖는 교육적 의의와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宋春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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