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1. 과학과 기술
  • 4) 기술

4) 기술

 “고려의 기술은 아주 발달되어 있다”고 인종 원년(1123) 고려를 찾아왔던 중국의 사신 서긍은 기록하고 있다.358)徐兢,≪高麗圖經≫권 19, 工技. 실제로 잘 알려진 도자기기술, 목판인쇄기술을 비롯하여, 종·불상·무기·농기구 등의 제작에 기초가 되는 금속기술·종이·직물·선박기술 등이 발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술을 천시하는 풍조가 유교적인 사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고려 전기 동안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음도 분명하다.359)朴星來,<朝鮮儒敎社會의 中人技術敎育>(≪大東文化硏究≫17, 1983), 267∼288쪽.

 지금까지 많은 유물을 남겨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고려자기는 고려 전기에 이미 그 기술적 정점에 도달하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지금 전국에 퍼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당시의 窯地들이 이를 부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의 도자기 제조기술의 상세한 내용은 그 후 잊혀져 전해지지 않지만, 작품의 우수성은 당시부터 이미 인정된 사실이었다. 예를 들 면 12세기 초의 서긍은 고려의 靑磁가 근래에 더욱 그 기술을 높여가고 있다고 했는데, 그는 고려사람들이 翡色이라고 부르는 색깔의 이 도자기가 근래 색깔과 광택에서 더욱 아름다워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360)徐兢,≪高麗圖經≫권 32, 陶尊.

 목판인쇄는 이미 신라에서 실용화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극도로 발달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었다. 송에서 수입한 불경을 목판에 옮겨 보관하려는 노력이 현종 12년 6천 권 이상의 대장경 인쇄를 시작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 완성되어 있던 대장경판은 고종 19년(1232)의 몽고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려 후기에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판인쇄술의 발달이 곧 세계 처음으로 고려에서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낳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금속기술의 가장 대표적인 생산품으로는 우선 불상과 梵鐘을 들 수 있다. 고려 초기의 주조기술을 대표하는 범종 유물로는 현종 원년에 만들어진 天興寺 종과 그 후의 曹溪寺 동종을 들 수 있다.361)全相運,<科學과 技術>(≪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255쪽. 서긍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 普濟寺의 대종에 대해 용 모양의 고리장식에 나는 듯한 두 신선의 상이 새겨져 있으며 갑술년에 백통 1만 6천 근을 들여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362)徐兢,≪高麗圖經≫권 31, 巨鐘.

 고려에서는 금속기술자가 鍮器匠·赤鎭匠·銅器匠·鍊匠·鏡匠·白銅匠 등으로 나뉘어 분업화되어 있었고, 이들은 각각 도제식으로 훈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의 향로로는 表忠寺의 청동향로와, 일본 法隆寺에 보관되어 있는 金山寺 향로 등이 있다.

 광산의 개발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고려 초기의 銅鏡은 별로 뚜렷한 발달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성종 15년(996)에 처음으로 鐵錢을 쓰기 시작하여, 숙종 3년(1098)에는 銀甁이라는 은화를 사용했고, 숙종 7년에는 최초의 엽전으로 海東通寶 1만 5천 관을 제조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掌冶署가 국초부터 금속기술을 주로 담당했지만 주전을 위해서는 별도로 鑄錢都監을 두기도 했다.363)≪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고려 초부터 서적이 인쇄되었다는 사실에서 종이의 생산기술도 발달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청에는 紙田이란 명목의 토지가 지급될 정도였으니, 여기서 얻은 수입으로 각 관청은 종이 등의 문방구를 구입하거나 직접 제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려 초의 종이 제조기술이 어떻게 그 후 조선시대의 것과 달랐는지에 대해서는 밝힐 도리가 없다.≪고려도경≫에 의하면 당시 고려에는 닥나무로만 종이를 만든 것이 아니라 藤皮紙도 있었다고 한다.364)徐兢,≪高麗圖經≫권 23, 土産.

 왕건은 원래 호남지역에서 수군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고려를 건국하였다. 또 그에 앞선 청해진대사 張保皐의 활약도 있었으므로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선박기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무렵 왕건이 타고 다니던 배는 갑판 위에 다락을 꾸며 놓은 길이 96자의 큰 배였다. “수레를 몰고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의 큰 배라고 과장하여 기록되었을 정도인 것이다.365)金在瑾,≪우리 배의 歷史≫(서울大出版部, 1989), 155∼157쪽.

 고려 초에 漕運제도가 확립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선박 제조기술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방에서 조세로 거둔 곡물 을 서울로 해상을 통해 운반하는 데에 사용된 선박은 哨馬船이라 불리었는데 1천 석의 곡물을 실을 수 있었다. 고려 초에 조운제도가 시작된 것은 중국에 비해 2백 년이 뒤지지만, 바닷길을 통한 조운으로는 고려가 중국을 3백 년이나 앞섰으며, 초마선은「태조의 누선」이 조운용으로 개조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초마선이 사용되던 시기를 기준으로 한 11세기 초 정종년간 전후에 韓船의 기술적 특징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366)金在瑾, 위의 책, 161쪽.

 특히 궁정 중심의 수공업으로 발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직물의 생산을 담당하는 雜織署와 염색 등을 담당하는 都染署가 국초부터 설치되었고, 여 기서는 錦匠·繡匠·羅匠·綾匠 등의 전문기술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서울뿐 아니라 각 지방에는 雜織甲坊이란 직물공장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또 초기부터 금과 은실을 넣어 짠 직물도 만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銅鐵線을 넣는 방식으로 응용되어 직조되기도 하였다.367)洪以燮, 앞의 책, 126쪽.

<朴星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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