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2. 문자와 언어
  • 1) 문자

1) 문자

 고려시대에 사용된 문자는 漢字뿐이다. 그러나 문자를 어떻게 사용했느냐 하는 운용면에서 구분한다면 크게 두 가지 문자를 사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 다. 하나는 정통 한자이고 다른 하나는 借用 한자이다. 물론 이러한 문자사 용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자리잡은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긴 하지만, 앞선 시기보다 훨씬 활용의 진폭이 넓고 깊었다. 첫 번째 정통 한자는 한자를 중국사람들과 똑같이 한문을 짓는데 사용하는 것이고, 두 번째 차용 한자는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는 표기체계이다. 이 나중 문자를 흔히 漢字借用表記體系라고 한다. 우리 나라 문자체계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 는 것은 이 한자차용표기이다(간단히 줄여 ‘차자표기’라고도 한다).

 한자차용 표기체계는 다시 크게 문장표기와 어휘표기로 나된다. 어휘표기 는「借名」이라는 한 가지 뿐인데 차자표기의 초기단계에서 사람 이름, 땅이 름, 나라 이름, 벼슬 이름 등 여러 가지 고유명사를 적었던 표기자료를 가리킨다. 이 차명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한문으로 적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문장표기는 중국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적은 글 즉 번역문과 순수한 우리말을 글로 지은 것 즉 창작문의 두 가지로 나뉜다. 번역문은 중국식 한문에 우리말 吐를 붙여서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개발되어 고려시대에도 그 맥을 이었다. “신라의 薛聰이 우리말로 아홉 가지 경서를 해독하여 후생을 가르쳤으므로 오늘날까지 학자들이 그 방법을 으뜸으로 삼고 있다”는≪三國史記≫의 기록이 바로 그것인데 이 때에 우리말 토를 흔히 口訣이라 하고 이 구결이 들어있는 번역문을 구결문이라 한다.368)≪三國史記≫권 46, 列傳 6, 薛聰. 口訣文에 관하여는 곧 간행될≪한국사≫21,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의 Ⅱ-2. 문화와 언어항목에서 언급될 것이다. 한편 창작문은 다시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詩歌를 중심으로 한 문예창작문이요, 또 하나는 공문서를 중심으로 한 각종 글, 즉 실용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초기 노래인 鄕歌를 적은 표기체계를 鄕札이라 하고, 鐘·塔·碑 같은 것에 주조하거나 새겨 쓴 금석문이나 공문서 에 쓰인 다소 불완전한 우리말 표기체계를 吏讀라고 한다. 이두가 향찰에 비 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에 다소 불완전한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러나 그 까닭은 문맥이 통하면 되었기 때문에 향가에서와 같은 정밀한 표기 를 하고자 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한자의 訓과 音을 빌어 우리말을 나타내고자 한 차자표기의 원칙은 향찰이나 이두나 구결이 한결같은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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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네 가지 가운데 차명은 신라시대에 활발했던 것이었으나 고려시대에 오면 대부분의 고유명사가 한자화하여 쇠퇴하였다. 구결은 불교와 유교의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매우 활발하게 이용되었으나 고려 전기에 속하는 자료가 변변치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향찰과 이두의 사용 실태만을 살펴보 기로 한다.

 고려 시대의 향찰 자료는 均如大師(태조 6년∼광종 24년;923∼973)의<普賢十願歌>11수와 예종(문종 33년∼예종 17년;1079∼1122)의<悼二將歌>1수 도합 12수이다. 이들 향가의 해독은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어느덧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향가의 완벽한 해독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상당한 부분이 만족할 만한 풀이에 도달하였다. 향가 해독에 활용되는 기본 원칙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369)金完鎭,≪鄕歌解讀法硏究≫(서울大出版部, 1980) 참조.

첫째 一字一音의 원리이다.

 하나의 글자는 하나의 음으로 읽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만일에 같은 글자가 여러 가지 음으로 읽힌다면 차자표기체계 자체의 존립이 어려울 것이다.

둘째 訓主音從의 기준이다.

 우리말 낱말을 나타내기 위하여 한자를 빌어올 때에, 처음 글자는 뜻을 빌고 나중 글자는 음을 빌어 그 낱말의 끝소리를 나타내는 수법을 가리킨다. “川理=나리, 心音=, 慕理=그리-, 改衣=가-”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셋째 脈絡一致의 기준이다.

 이것은 향가가 문헌에 옮겨 적히는 과정에서 잘못되어 엉뚱한 글자로 변질되었을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바른 글자를 찾아내기 위한 방책이다. 부처님을 찬양하는 향가는 왕왕 절간 담벼락에 써 붙여 놓아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며 읊조렸다고 한다.370)赫連挻,≪大華嚴首座圖通兩重大師均如傳≫7, 歌行化世分에는 “이 노래가 널리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고 자주 담벼락에 써 붙여지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므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다른 글자로 얼마든지 바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넷째 律調的 기준이다.

 향가가 詩歌이기 때문에 노래로 읊거나 낭송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가락이 맞아야 할 것이다. 후대의 시조와 같은, 비교적 엄격한 정형성을 유지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래의 흐름에 거슬리는 말씨와 음절수가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원칙 외에도 빠진 글자가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그 빠진 글자를 추정하여 집어넣고, 또 어떤 글자가 훈으로 읽힐 것인가 음으로 읽힐 것인가를 판별하는 등 면밀한 검토를 거쳐 대체로 수긍할 만한 풀이에 도달하였다. 더구나 균여의<보현십원가>는 赫連挻이 지은≪均如傳≫에 崔行歸의 한문 번역시가 실려 있기 때문에 신라시대 향가인≪三國遺事≫수록 14수 보다는 해독하기가 용이한 것이다.

 <普賢十願歌>는 향가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10구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4구체 형식으로부터 발전하여 마지막 단계의 가장 원숙한 형식미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普賢菩薩의 열 가지 발원을 노래한 것으로 당시의 대중들에게 불교사상을 널리 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禮敬諸佛歌를 첫머리로 하고 그 뒤에 10수가 연이어 있어서 도합 11수로 구성되었다. 예경제불가의 원문과 최신의 해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371)여기에 소개된 해독은 金完鎭, 앞의 책, 157∼164쪽에서 옮긴 것이다.

원 문:心未筆留 慕呂白隱佛體前衣

    拜內乎隱身萬隱 法界毛叱所只至去良

    塵塵馬洛佛體叱刹亦 刹刹每如邀里白爭隱

    法界滿賜隱佛體 九世盡良禮爲白齊

    歎曰 身語意業旡疲厭 此世夫作沙毛叱等耶

해독문: 부드로 그리 부텨알

    져온 모마 法界업록 니르거라

    塵塵마락 부텻刹이여 刹刹마다 모리 

    法界 신 부텨 九世 다라 졀져

    아아 身語意業無疲厭 이렁  지 못야

현대역:마음의 붓으로 그리온 부처 앞에

    절하는 몸은 法界 없어지도록 이르거라

    티끌마다 부첫절이며 절마다 뫼셔놓은

    法界 차신 부처 九世 내내 절하옵져

    아아 身語意業無疲厭 이리 宗旨 지어 있노라

 이와 같이 현실을 초탈하는 경지에서 부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일반 백성에게서 널리 애송되었으니 이 무렵의 불교적인 생황 풍습이 어떠하였는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병든 사람이 이<보현십원가>를 노래로 부르면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까지≪균여전≫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를 이용한 향찰표기가 원숙해질수록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과 유교경전의 이해도 깊어졌고 정통 한문으로 글을 짓는 사람도 늘어갔다. 최행귀가<보현십원가>를 모두 한문으로 번역하고 거기에 덧붙여 번역의 이유를 밝힌 글을 보면 이미 이 당시 지식인들이「정통 한문」만을 가장 이상적인 언어 곧 ‘국제적으로 공인된 모범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생각했으며 우리 나라 말은 方言이라고 하는 통념이 확립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행귀의<譯歌功德分>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詩는 한문으로 되었으므로 五言七字를 갈고 닦으면 되는 것이요, 노래는 우리말을 배열하는 것이므로 三句六名을 잘 다듬으면 되는 것이다. 소리를 논하기로 한다면 동쪽 별과 서쪽 별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 같아서 중국과 우리 나라가 쉽게 구별이 된다고 하겠고, 이치를 따지기로 한다면 창과 방패가 서로 맞선 것과 같아서 강하고 약한 것을 구별하기 어렵다. 비록 글재주가 서로 맞설 만 하다고 하나 뜻풀이는 같은 자리에 돌아옴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시나 우리 나라의 향가가 모두 독특한 특징이 있으니 좋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우리 나라의 재주있는 선비와 이름난 벼슬아치들은 중국의 唐詩를 이해하고 읊을 수 있으나 중국의 덕망있는 선비와 스님들은 우리 나라 향가를 알 길이 없다. 중국글은 하늘에 그물이 잘 짜여진 것과 같아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으나 향찰은 비록 한자를 적어놓았다 할지라도 산스크리트 문자를 잇따라 늘어놓은 듯하여 중국사람은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梁나라 宋나라의 구슬같은 작품은 끊임없이 우리 나라로 흘러들어 왔으나 신라의 비단같은 문학작품은 서쪽으로 전파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우리 나라 안에서만 제한된 통용에 그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공자님이 이 땅에 살려고 하였으나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설총이 경전을 억지로 우리말로 바꾸려고 하다가 쥐꼬리만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라 할 것인가.

 이러한 개탄은 한문으로 기록된 것만이 온 세상에 두루 통용되는 보편적 언어체계이며 우리 나라 말이나 차자표기로 적은 향가와 같은 것은 우리 나 라에서만 부분적으로 통하는 것일 뿐이라는 신념을 대변하고 있다. 다시 말 하여 한문의 국제성과 효용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 지식인들의 언어문자관은 그 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19세기 말까 지 지속된다. 요컨대 우리는 이것을 편의상「한자·한문 우월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가는 그후로도 간간히 애송되었을 것이지만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 가운데,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悼二將歌>이다.

 이<도이장가>는 고려시대 유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예종이 그 15년(1120)에 팔관회를 열고 金樂·申崇謙 두 사람의 개국공신을 추도하여 지은 노래로≪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실려 전한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372)역시 金完鎭, 앞의 책, 210∼216쪽에서 옮겨 적었다.

원 문:主乙完乎白心聞 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 中三鳥賜敎

    職麻又欲望彌阿里刺及彼 可二功臣良

    久乃直隱跡烏隱 現乎賜丁

해독문:니믈 오오   하 밋곤

    넉시 가샤 몸 셰오신 말

    셕 맛도려 활자바리 가와뎌 됴타 두 功臣

    오래옷 고 자최 나토신뎌

현대역: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이 가셨으되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職分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와지기를

    좋다, 두 功臣이여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저.

 한편 이두(또는 이두문)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찰표기는 표기상의 완벽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까다로운 점이 있으나, 이두는 문맥이 통하는 정도에서 얼마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향찰보다는 부담이 적을 뿐아니라 실용문이었다는 점에서도 이두의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또 향가의 경우, 그 시가 장르가 점차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여 한편으로는 景幾體歌 같은 것으로 흡수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한문시가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향찰표기는 자연스럽게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전기에 활발했던 이두문은 상당량이 유실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慈寂禪師凌雲塔碑陰銘(941년) 2. 星州石佛坐像背銘(967년) 3. 校里磨崖石佛(977년) 4. 開心寺石塔記(1010년) 5.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1031년) 6. 普賢寺石塔記(1044년?) 7. 通度寺國長生石標(1085년) 8. 密陽國長生石標(1085년) 9. 蔚州國長生石標(1085년) 10. 羅州西門內石燈記(1093년) 11. 僧正景廉石棺銘(1102년) 12. 川北觀世音寺鍾銘(1107년) 13. 密陽五層石塔造成記(1109년) 14. 楊等寺半子(1161년)

 이들 이두자료 가운데 언어문자사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첫번째 자료인<자적선사능운탑비음명>이다. 이 탑비는 경상북도 醴泉郡 上里面 鳴鳳里 鳴鳳寺에 있는데, 중앙관서인 都評省에서 절에 있는 승도들에게 내린 帖文을 그대로 비석에 새겨 넣은 것으로 그 당시 고문서 양식 및 이두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그 원문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이 원문에서 [ ] 부분이 이른바 이두에 해당한다).

 都評省帖洪俊和尙衆徒右法師. 師[矣]啓[以]僧[矣段]赤牙縣鷲山[中]新處所[元]聞爲成造[爲內臥亦在之白賜]縣[以]入京[爲使臥]金達含進[置]右寺原問[內乎矣]大山[是在以]別地主無[亦在彌]衆[矣白賜臥乎□如]加知寺谷[中]入成造[爲賜臥亦之白臥乎未]及[白節中]敎旨 然[丁]戶丁[矣]地[段]知事[者]國家大福田處[爲]成造[爲使賜爲]敎 天福四年歲次己亥八月一日 省史臣光 五年辛丑八月□一日允, 國家[以]山院名幷十四州郡縣契[乙用]成造[令賜之].

 節成造使正朝 仁謙 停勵古寶

 이 글 전체를 이두문이라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밑줄친 글자들만 이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우리말의 격조사 또는 어미들이다. 현대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373)南豊鉉,<高麗 初期의 貼文과 吏讀>(≪국어국문학≫72·73, 1976) 참조.

 都評省은 洪俊和尙(慈寂禪師)의 僧徒 右法師에게 帖文을 보낸다. 右法師의 啓狀에 따르면 ‘僧들은 赤牙縣 鷲山에서 處所를 처음 上奏하여 허락을 듣고 成造하고 있습니다’하고 아뢰었었다. 縣에서 入京使로 보낸 金達含이 나아가 右寺의 터를 물음에, ‘大山이므로 따로이 地主가 없으며 중들이 사뢴 바와 같이 加知谷의 寺谷에 들어가 成造하고 있습니다’하고 사뢰기에 이르렀던 때에 敎旨하기를, ‘그러하다면 戶丁의 땅이라도 知事는 국가의 大福田處로 삼아 成造하도록 하라’ 下敎하시었다.

 天福 4년 歲次 기해 8월 1일 省史臣光 5년 신축 8월 21일 국가로부터 山院名을 允許받음. 아울러 14州郡縣의 契로서 成造시키다.

 節成造使 正朝 仁謙 停勵古寶

 위와 같은 해독은 아직 완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판독에 어려움을 느끼는 글자가 있고 해석상 깨끗하게 풀리지 않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비문은 홍준화상의 제자들이 새로 절을 짓고자 하여 중앙정부가 허가를 내려준 통지문인데, 그 당시 문자생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특징을 몇 가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문 문장이 그대로 삽입된 부분이 있다. 곧 첫 문장 都評省帖洪俊和尙衆徒右法師는 한문으로 되어 있다. 둘째, 이두의 어미가 상당히 길어졌다. 곧 ‘爲內臥乎亦在之’는 일곱 개의 한자를 쓰고 있다. 셋째, 다양한 고유어의 표기가 생겼다. 矣가 소유격과 처소격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고, 乙이 목적격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段이 특수조사 {-인 것은}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또 臥·亦·未·丁같은 것은 어미의 표기로, 進·置·用 등은 동사 어간으로, □는 명사로 쓰인 것이 확인된다. 넷째, 종결사에 변화가 생겼다. 신라 이두문에는 之가 종결사로 쓰였으나, 이 비명 이후에는 齊가 사용된다.

 이러한 이두문은 중앙관공서와 지방관공서 간에 주고 받는 공문서 양식으로 정착되어 그 후 꾸준한 발전을 보였다. 이 무렵 이두문에 나타나는 이두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374)여기에 인용한 이두 자료는 李丞宰,≪高麗時代 吏讀에 대한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89)를 참고하였다.

명사류:( )안의 것은 15세기 이후의 한글표기임.

由(견) 時(·) 今(옅) □(즛) 後(뒤) 事(일) 所(바) 次(례) 喩(디) 等() 節(디위) 味(맛) 不喩·不冬·不得·毛冬(안디 , 아닌지) 向事(아안일) 向敎事(아이샨일) 向入(안드러) 向前(안전) 旦驛(아녁) 一旦(아) 捧上(받자) 水梁(므돌) 山枝(묏갓) 次知(디) 件記(긔) 作文(질문) 爻周(엣더러 쇼쥬)

통사류:

無(어오-, 없-) 有·在(이시-, 잇-) 餘(남-) 想(너기-) 然(그러-) 進(-) 問(묻-) 聞(듣-) 同·如(-) 成(일-, 이-) 令(이-, 시기-) 邀·陪(모시-) 立(셰-) 審(피-) 斜(-) 了(-) 望(라-) 仰(울월-) 實(싣-) 除(덜-) 用(-) 仍(지즐-) 追(좇-) 白(-) 敎(이시-·이샨) 

부사류:

唯只(오직) 並只(다므기, 다모기) 最只(안기) 必于(비록) 這這() 科科以() 日日以(나날이) 初亦(처음) 仔細亦(자세히) 更良(가아) 逢音(마, 마침) 並以(아오로) 加于(더욱) 如一亦(아티) 爲等如(트러 , 통틀어)

 이두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격조사와 어미류라고 할 수 있다.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이들 조사나 어미가 쓰이지 않으면 우리말다운 문체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에 나온 명사·동사·부사류보다 일찍 발달하였는데 그것도 격조사보다는 어미류가 먼저 발달하였다. 다음은 고려시대 이두문에 나오는 격조사와 어미류들이다.

조사류:

亦(-녀, -이) 戈只(-익기) 矣(-의, -에) 叱(-ㅅ) 乙(-을, -에게) 亦中(-여) 中·良中(-아) 以(-로) 果(-와/-과) 元(비릇, -브터) 己只(록, -지) 置·投(-도) 段(-) 乙良(-을랑) 沙(-) 乃(-나)

어미류:

賜(-시/-으시) 白(-) 內(--, -/-는) 如(-더-) 去(-거-) 遣(-고) 㢱(-며) 良(-아/-어) 沙(-) 丁(-이, -히) 亦(-이, -히) 兮(-히) 于(-오/-우) 乙(-/-늘) 而亦(-마) 在乙(-견을<은데,-으니>) 去乙(-거늘) 如乙(-더늘) 在亦中(-견여<-인 것에 더하여) 在如中(-견) 絃如(-시우러<-때문에>) 如可(-다가) 音可(-음직) 在以(-이므로) 去乃(-거나) 良置(-아도/-어도) 良□(-아금<-아서/-어서>) 良結(-아져) 良只(-악/-억) 只爲(기<-도록>) 於爲·乙爲(-늘<-도록>) 等乙(-) 等以(-로) 乎矣(-호) 齊(-제) 之(-다) 如(-다, -라) -乎(-온) 乙(-/-읋) 音(-/-음) 

 위에 열거한 이두를 보면 비록 불완전한 점이 없지 않으나 그 당시에 이런 글을 사용한 사람들은 특별한 불편이 없이 매우 원만하게 의사전달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두표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하나는 과거의 관행에 따라 고정적인 상투어가 생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좀더 정교한 표현을 강구하여 어미나 격조사의 표기가 정밀해진 것이다. 이 두 가지 모순된 발전이 이두가 지니는 문자상의 특성이라 하겠는데, 결국 이 모순을 극복하여 言文一致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훈민정음의 창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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